(123)
철마풍 독고황
유세운은 경악으로 물든 독고황의 얼굴을 바라보며 귀찮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거봐. 후회할거라고 했잖소.”
유세운의 비아냥거림에 독고황의 얼굴이 분노로 물들어갔다. 유세운은 그런 독고황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감히 일문의 문주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다는 것은 전면전을 각오한거라고 생각해도 되겠소?”
유세운의 말에 보도를 집어넣고 돌아서던 동무벽이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문주 너무 점잖게 말하는 거 아니요? 듣기 거북하오만.”
유세운은 동무벽이 훼방을 놓자 결국 헛기침을 터트렸다.
“흠. 뭐 나라고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유세운의 시선은 다시 독고황을 향했다.
“내가 한말에 이의 없으시오?”
“성주. 그냥 해치우는게 어떻겠습니까?”
성주는 자신의 옆에 선 묵철삼왕중 첫째인 묵철일왕의 말에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호법이라 불린 자가 강환의 경지에 이른 고수 둘을 꺾었다. 더욱이 그 중 한명은 자신도 한수 접어줘야 될만한 자.
삼십년 전부터 강남 무인들의 우상이자 철마성 이인자의 자리를 지켜온 염악이다. 묵철삼왕의 말대로 해치우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그게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유세운은 고민에 빠진 독고황을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추호도 이일을 간과할 생각이 없소.”
“그렇다면 어쩔 샘이냐!”
묵철일왕의 말에 유세운은 독고황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옆에서 저렇게 떠드는 놈들을 지켜보는지 모르겠지만 경고하나 하지. 계속 떠든다면 내손으로 벌을 내리겠소.”
“크하하. 미쳐도 단단히 미쳐…컥!”
묵철일왕은 뭐가 일어난지도 모른 새에 자신의 오른쪽 어깨에서 피가 샘솟자 신음을 참지 못했다. 유세운은 손으로 묵철일왕의 머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한번만 더 너희 성주와 이야기하는데 끼어들면 이번엔 머리다.”
독고황은 유세운의 손가락을 바라보며 신음처럼 입을 열었다.
“고금제일지법…”
유세운은 손을 거두며 독고황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독고황은 유세운을 바라보며 어깨를 폈다.
“그래. 내가 자네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네.”
“흐음.”
“자네 손에 입은 본성의 피해는 거의 사 할에 가깝다고 봐도 무방하지. 총력을 다해서라도 자네를 해치우는 것이 육백년에 이르는 철마성의 역사에 누가 되지 않을 일이니 말이다.”
유세운은 말없이 독고황의 이야기를 들었다. 무공만이라면 자신보다 한참 아래지만 지금 그의 기세는 대종사의 것. 일성의 성주로써 내뿜는 기세는 결코 우습게 들을 수 없었다.
“난 단 한번도 너의 목에 현상금을 건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흔들림없는 독고황의 얼굴을 보며 유세운은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저런. 그런데 어쩌지? 나도 곱게 죽어줄 마음은 없어. 시작도 너희부터였다. 우리 유가장을 공격한 것도 너희였고 가는 길에 계속해서 내게 시비를 건 것도 너희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목에 현상금을 걸어 이곳까지 오게 한 것도 너희다.”
유세운은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나또한 너희를 용서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유세운의 말에 독고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너의 말도 일리가 있군.”
독고황은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전면전? 철마성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곳은 다른 육대세력 밖에는 없다는 것을 알아라. 너의 오만이 너의 죽음을 부른 것. 쳐라!”
독고황의 뒤로 서 있던 내성의 고수들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덮쳐왔다. 유세운의 입가에 장난끼 어린 미소가 어린순간 노호성이 터져왔다.
“그만!”
한마디에 실린 내력이 심상치 않았다. 유세운의 눈썹이 꿈틀댔다.
거짓말처럼 날아오던 내성의 고수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고 다섯 명의 호위를 받으며 장내로 들어서는 노인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청아한 모습의 노인. 그리고 그의 반보 뒤에서 따라 걸어오는 죽립인을 보며 유세운은 등줄기를 훑어 내리는 짜릿한 기운을 느꼈다.
“만만치 않은 자가 둘이나?”
작게 중얼거리는 유세운의 말에 그의 뒤에 있던 동무벽과 관백도 표정이 굳어졌다.
이곳에 들어서면서 이미 삶은 포기했다고 해도 허언이 아니지만 왠지 모를 기대감에 마음껏 무공을 펼쳤다. 하지만 유세운의 입에서 만만치 않다는 말을 듣는자가 둘이나 있다는 것은 예상을 벗어난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유세운은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독고청은 유세운의 눈을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네가 유세운이냐?”
“그렇다.”
유세운의 대답에 장내의 인물들의 얼굴에 변화가 생겼다. 광오문도에겐 웃음을 철마성도들에게는 분노를 심어줬다.
독고청은 태연하게 웃음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버릇없는 아이로구나.”
“선배를 보고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자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어이가 없군.”
유세운의 말에 독고청은 웃음을 터트렸다.
“후후후. 그렇군. 네가 무광의 제자라는 것을 잊었었구나.”
유세운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사부님의 대명을 함부로 입에 담지마라.”
“하지만 그가 이미 무림을 떠난 지가 백년이다. 아직도 그의 시대인줄 아는 거냐?”
유세운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뭘 몰라도 한 참 모르는군. 내가 알기로 아직껏 무림에서 사부의 발끝에라도 도달한 자를 만나보지 못했다.”
“그 생각이 바뀌게 되겠지.”
유세운은 천천히 말에서 내려섰다.
“당신 정도라면 사부의 일초지척도 되지 않아.”
“격장지계인가? 귀엽군.”
유세운은 독고청의 말에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아니. 농담이 아냐. 당신정도라면 죽었다 깨도 사부의 옷자락 하나 건들지 못해.”
독고청은 유세운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부도 지금 너의 목숨을 구원해주지는 못한다.”
독고청의 말에 유세운은 코웃음을 쳤다.
“흥! 웃기는 소리하는군. 난 누구에게도 내 목숨을 구원해 달라고 바란 적이 없다.”
독고청은 앞으로 한걸음 내딛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 너의 목에 현상금을 건 것은 노부다.”
“그래?”
유세운은 태연히 되물었다.
“이유는?”
“초마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자를 만나보고 싶었기 때문이지.”
유세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실수한거야. 방법이 잘못 됐어.”
유세운은 손을 들어 독고청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냥 나에게 비무첩이라도 보냈어야 되는 거였어. 그 일로 나는 충분히 화가 났다구.”
유세운의 말에 독고청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래서 네가 철마성에 바라는 것은 뭐냐?”
유세운은 독고청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남에 있던 문파들을 흡수 한 걸로 알고 있다. 그들을 풀어줘라.”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독고청의 말에 유세운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내 얘기 끝나지 않았어. 그리고 앞으로 삼 년간 봉문(封門)하라.”
유세운의 말에 철마성의 모든 인물들의 얼굴에 분노가 서렸다.
“건방진…”
분노해 소리치려는 독고황의 말을 독고청이 손을 들어 막았다. 독고청은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대체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지? 여기서 너를 죽이고 입을 다문다 해도 강호의 어느 문파도 우리를 추궁하지 못한다. 모르는가?”
유세운은 어깨를 피고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나를 믿는다. 그리고 우리 광오문의 문도를 믿는다.”
독고청은 고개를 흔들었다.
“노부가 그리 만만해 보이는가!”
독고청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
초마의 경지에 들어선 자가 뿜어내는 기세임을 한눈에 알아봤다. 유세운은 그런 그의 기세에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승부는 붙어봐야 알겠지만 은태정과 십년을 넘게 살아온 자신이다. 이정도의 기세는 우습기만 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달랐다.
“아버님.”
독고황의 감격에 찬 목소리에 독고청은 손을 흔들어 보였다.
“되었다. 내가 이 경지에 들어선 것을 숨기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니라.”
유세운은 독고청을 바라보며 가볍게 어깨를 풀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난 나의 뜻을 관철 시킬 거다.”
독고청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좋다. 그렇다면 네 실력으로 네 뜻을 말하라.”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말뿐이고 싶진 않아.”
유세운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에 관백과 동무벽은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병우도 뒤로 물러나며 유세운의 등을 쏘아보았다.
유세운은 독고청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어쩌겠는가?”
독고청은 가만히 유세운을 바라보다가 웃음을 지었다.
“노부가 너도 이기지 못한다면 봉문을 당한다 해도 할말이 없다. 더욱이 강남의 군소방파들 풀어주는 것이야 일도 아니지.”
독고청은 더욱 기세를 끌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네 뜻을 관철시키겠다면 나를 꺾어라.”
“그런건 말 안 해도 그렇게 하니 걱정마.”
유세운은 독고청의 십 장 앞까지 걸음을 옮긴 후 멈춰 섰다.
독고청에게서 느껴지는 기세. 결코 예전의 영호천 못지않았다. 이미 심검의 경지에 들어선 자.
유세운의 입가에 장난끼 어린 미소가 걸렸다.
창천궁 별궁의 향원정.
날씨가 상당히 추워져서 인지 국화들이 지고 향기는 남아 있지 않았다. 아직 매화가 피기는 이른 시기.
백연혜는 예전처럼 자신 앞에 하나의 찻잔을 놓고 혼자 차를 마시고 있었다.
“소공녀님. 날씨가 춥습니다. 그만 들어가심이.”
백연혜는 자신의 뒤에 가만히 서서 말을 거는 여운에게 가벼이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그보다 오랜만이네요.”
“죄송합니다.”
백연혜는 여운의 일취월장하는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여대장의 실력이 날이 갈수록 빼어나지는 것 같아요.”
“과찬의 말씀입니다.”
여운뿐이 아니다. 여운의 매일 같은 독촉으로 창천백검수는 이미 예전과 다르게 정예화 되어갔다. 오죽하면 백선후가 직접 나서서 그들에게 술을 하사하며 독려했겠는가.
철마성과의 일전에서 창천척마대 오백을 잃은 시기에 그들의 정예화는 창천궁 입장에서도 고마울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정예화의 계기 또한 그에 의한 것.
백연혜는 자신의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시며 애써 웃음 지었다.
“오늘쯤이겠죠?”
“예. 아마도 오늘이면 충분히 도착하셨을 것 같습니다.”
백연혜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 시간이 지날수록 걱정만 쌓이네요. 혈천문과의 일도 그렇고 천마방과의 일도 그렇고…”
백연혜의 말에 여운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유문주님이라면 걱정할 것 없습니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분이라면 이미 천하를 논할 수 있는 분입니다.”
“훗.”
백연혜는 여운의 말에 담긴 진심에 저도 모르게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하긴 이미 천하제일로 거론되고 있죠. 하지만 철마성의 아성에 도전하기엔…”
여운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걱정 않으셔도 될 겁니다. 어차피 철마성에서 유문주님을 상대할 고수는 없으니 말이죠. 여차하면 몸 하나 빼내시는데 문제는 없을 겁니다.”
백연혜는 여운의 말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요. 하지만 과연 물러날지…”
백연혜의 이번 말에는 여운도 쉽게 대답해 주지 못했다.
그가 보아온 유세운의 모습.
단 한번도 피하거나 물러나지 않았었다. 상대가 몇이든 어떤 고수이든 간에 단 한번도 피한 적이 없었다는 것에 약간의 불안감이 느껴졌다.
여운은 걱정 때문에 풀이 죽어있는 백연혜를 뒷모습을 보며 작게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애써 태연하게 대답했다.
“하긴 천하 어디에도 그분을 물러나게 할 자는 없지요. 몇 명이든 어떤 고수이든 간에 말입니다.”
여운의 말에 백연혜는 웃음을 지었다.
“여대장도 저만큼이나 걱정하는 것 같아요.”
“흐흠.”
여운은 백연혜의 말에 작게 헛기침을 했다. 백연혜는 여운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지었다.
“걱정 안 해요. 결과야 며칠이면 알 수 있을 테니까요.”
백연혜는 말없이 자신 앞에 놓인 찻잔을 바라보았다. 단숨에 차를 들이키던 유세운의 모습이 떠올라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무사히… 제발 무사히 돌아와요.’
철마풍 독고청(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