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주태진의 미염이 분노로 파르르 떨려왔다.
“차라리 죽여라!”
관백은 고개를 내저으며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미안하오. 문의 내규 때문이니 이해해 주시오.”
“웃기지 마라!”
다시 출수하려는 주태진을 막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하게.”
주태진은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천천히 장내로 들어서는 인물. 현 철마성의 성주인 철마멸뢰 독고황이 장내로 들어섰다.
주태진은 어금니를 깨물며 뒤로 물러났다.
유세운은 말없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철마성의 성벽에 올랐는지 모를 홍의의 인물들이 자신들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다. 대략 이백여명 정도 되어 보이는 인원이었다.
유세운은 눈을 들어 독고황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철마성주요?”
유세운의 물음에 독고황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내 살아생전에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구나.”
“성주. 저 아이는 노부가 손을 봐도 되겠소?”
독고황의 뒤에 서 있던 백염의 노인이 앞으로 나서며 말하는 것을 본 유세운은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감히 어디라고 끼어드는 거냐?”
유세운의 말에 백염의 노인의 얼굴은 단숨에 분노로 일그러졌다.
“갈! 건방진 꼬마로고!”
유세운은 더 이상 시선을 두지도 않고 철마성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성도 관리가 형편없군. 성주가 얘기하고 있는데 앞으로 나서다니 말야.”
“허허.”
독고황은 유세운의 말에 단지 헛웃음만을 터트렸다. 지금 자신에게 말을 한 자는 아버지 때부터 철마성에 기거한 거력마장 염악이었다. 내성을 담당하고 있는 그가 그런 말을 듣고 참을 리가 없었다.
이미 염악의 시선은 유세운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독고황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에게 아버지 같은 분이니 막을 방법도 없었다.
“그럼 부탁 드리겠습니다.”
“고맙네.”
잔혹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서는 염악을 바라보며 유세운은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성주. 지금 후회할 짓을 하고 있는 거요.”
“성주를 탓할 필요 없다. 네놈의 그 말도 안 되는 소문. 여기서 묻어주마.”
유세운은 말없이 앞으로 나서는 염악을 바라보았다. 제대로 한다면 일초지척도 안될 상대. 자신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해치워야겠다고 생각할 때 동무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주. 나도 좀 내보내 주시구려.”
유세운은 동무벽을 바라보았다. 동무벽의 눈에는 이미 호승심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물론 관백보다 무공 면에서라면 반초 정도 앞선다고 보는 동무벽이니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 했다.
“쩝. 지면 다시는 내 얼굴 볼 생각 하지마.”
“크흐흐. 농담 한번 진하게 하지 마쇼.”
동무벽은 말에서 내리고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염악의 백염이 부르르 떨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뭐하는 짓이냐?”
동무벽은 가볍게 어깨를 풀며 웃음 지었다.
“무슨 소리하는 거지? 철마성주가 직접 나선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야?”
염악은 시선을 들어 유세운을 바라보았다. 유세운은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불만 있으면 철마성주가 되지 그랬어?”
“후회하게 될 거다.”
거력마장 염악은 자신의 팔십 평생에 이런 일은 단 한번도 겪은 적이 없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오른 지가 삼십년도 넘었건만 이제와 저런 말을 들으니 머리에서 김이 날 지경이었다.
염악은 앞으로 한 걸음 더 내디디며 내력을 끌어 올렸다.
동무벽은 자신의 고슴도치 같은 수염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마인들의 우상인 당신과 겨루게 되다니 영광이야.”
염악의 입가에 가는 미소가 그려졌다.
“영광일 것 까지는 없을 거다. 이생에 마지막 겨룸일 테니 말이다.”
동무벽은 자신의 보도를 천천히 뽑으며 웃음 지었다.
“아닐껄? 죽이진 않을테니 이생에 마지막이란 말은 마.”
염악의 입가에 미소가 진해졌다.
“미친건 문주나 문도나 똑 같구나.”
“글쎄?”
은은히 감도는 차향을 맡으며 미소 짓는 철마멸뢰 독고청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왔는가?”
독고청은 태상각으로 들어서는 죽립인을 바라보았다. 죽립인은 가볍게 목례했다.
“예.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일단 앉게.”
죽립인은 자리에 앉으며 찻잔을 챙기는 독고청을 향해 물었다.
“가서 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허허. 무슨 소리인가?”
독고청은 찻잔을 들고와 죽립인에게 건네고는 차를 따랐다.
“내가 보고자 부른 아이인데 당연히 나가봐야지.”
독고청은 자신의 찻잔에도 차를 따르고는 향기를 음미했다.
“아! 오는 길에 봤겠군. 어떻던가?”
죽립인은 차를 한모금 마시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서 봐서 확실히 느낄 수는 없었지만 심검의 경지에는 든 것 같습니다.”
“그런가?”
독고청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초마의 경지에 들어선 자를 만나고 겨룰 수 있다는 것은 묘한 흥분을 느끼게 했다.
“흐음. 오늘따라 차향이 깊군.”
죽립인도 독고청의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염악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이십 년도 전에 무림에서 혈천문에 의해 도망친 자들이라고 알고 있었다. 당시에는 육룡보다 뛰어난 자들이라는 말이 많았었지만 쉽게 사라져 버렸던 자들이었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염악의 눈썹이 다시 한번 치켜 올라갔다. 지금 보여주는 실력은 자신과 호각을 이루고 있는 것이지만 저 말투는 아무리 봐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건방진!”
염악은 진각을 밟으며 자신의 절기를 뽑아냈다.
텅!
진각에 이어 밀려오는 장력을 보며 동무벽은 웃음 지었다.
“이제야 제대로 할 생각이군.”
동무벽의 보도가 사선을 그었다.
반으로 갈라지는 장력 사이로 다시 한번 염악의 장력이 밀려왔다.
태산 같은 기세. 거력마장의 성명절기인 거력삼혼장(巨力三魂掌)이 펼쳐졌다. 일인을 상대하기에는 이만한 장법이 없다고 할 만큼 위력적인 장법이다. 거력마장의 심후한 내력이 전신으로 느껴졌다.
“이정도로는 안돼.”
하지만 물러나 줄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핫!”
힘찬 기합성과 함께 베어가는 보도에 동무벽의 마음이 담겼다.
슈악.
갈라지는 장력 사이로 염악의 표정에 경악이 어림과 동시에 분노가 어렸다.
“건방진 놈이로고!”
다시 한번 내뻗어가는 진각.
나아가는 손에서 뻗어가는 강기의 위력은 자신이 보기에도 흡족했다. 하지만 전혀 흔들림 없는 동무벽의 표정을 보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염악의 노도와 같이 밀려오는 장력을 보며 동무벽은 불현듯 유세운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의기상인.
마음먹는 것만으로 상대를 상하게 할 수 있다는 심검의 묘리.
아직 정확한 뜻은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의 보도에는 이미 자신의 마음이 담겼다.
무엇이든 베고야 말겠다는 의지.
슈악.
다시 한번 갈라지는 강기 사이로 염악의 얼굴이 보였다. 처음으로 염악이 뒷걸음치며 물러났다. 동무벽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당신이 뒷걸음을 치다니.”
동무벽의 말에 염악의 얼굴이 수치로 붉게 물들었다. 자신도 알고 있었다.
무림 출도 이후 단 한번도 뒤로 물러난 적이 없었다는 것도. 특히나 거력삼혼장을 십이성 완성한 후로는 자신의 세 걸음을 받아낸 무인은 단 한 명뿐이었다.
철마성의 태상성주인 철마풍 독고청 이후로 처음으로 자신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자다.
조금도 경시할 수 없는 상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정하마.”
“무엇을 인정한다는 거지?”
염악의 표정에 분노는 사라지고 결연한 의지만이 느껴졌다.
“네놈의 능력이 그 광오한 태도에 어울림을 말이다.”
동무벽은 자신의 턱수염을 긁적이며 웃음지었다.
“아직 잘 모르나 본데 내 능력은 더욱 뛰어나. 이정도로 놀라면 곤란하지.”
염악은 천천히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지금까지 만난 자중에서 네놈이 두 번째로 강하다는 것은 인정하마. 하지만 거기까지다.”
“두 번째라 철마성의 태상성주 다음인가?”
“그래. 내 거력삼혼장을 막아낸 두 번째 인물이니 말이다.”
염악의 기세가 점점 심상치 않아짐을 느낀 동무벽은 천천히 도를 들어 올렸다. 염악을 향해 겨누어진 도에 동무벽의 마음이 전해졌다.
염악은 걸음을 멈춰 서서는 내력을 끌어 올렸다. 들어올려진 장심 앞에 서서히 강환이 나타났다. 흑색의 강환을 보며 동무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마인의 우상이라는 것에 부족함이 없군.”
동무벽의 도에도 서서히 강기가 모이기 시작했다. 붉은 빛이 감도는 도환이 만들어지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염악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허허. 그 나이에 그 경지에 들었단 말인가?”
동무벽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유세운을 바라보았다.
“문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염악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훗. 그야 겨뤄보지 않아서 모르겠다만…”
염악의 얼굴에 단호함이 다시 깃들었다.
“이번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동무벽은 입가에 가는 미소를 그렸다.
“쉽다면 재미없지.”
“받아보라!”
염악은 동무벽을 향해 신형을 날리며 강환을 내뻗었다. 쾌를 위주로 한 초식으로 아무 변식 없이 상대를 노리는 것이었다.
동무벽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렸다. 유세운에게 들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세상에 마음보다 빨리 이르는 것은 없다던 말. 동무벽의 도환이 순간을 갈랐다.
콰쾅.
동무벽의 도환이 자신의 강환을 막는 순간 염악의 발이 기묘하게 교차됐다. 순식간에 세 개로 불어나는 신형. 사방으로 장력을 내뻗었다. 환의 요결을 담은 초식.
사방을 가리는 염악의 장력 사이로 동무벽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크하하하.”
동무벽의 품에서 찬란하게 뻗어나가는 도세에 염악의 장력은 반으로 갈렸다. 동무벽은 더 볼 것 없다는 듯이 갈라진 장력 사이로 뛰어 들었다.
“이만 끝내는게 좋겠어.”
염악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쾌와 환의 요결을 깨달았다고는 했지만 자신이 평생을 바쳐온 강의 요결만 하겠는가.
터텅.
마보를 밟는 염악의 자세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동무벽의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쾌의 요결과 환의 요결과는 다른 강의 요결이 느껴지는 기세. 거력마장 염악이 평생을 바쳐온 길이다.
물론 자신도 그랬다.
텅!
동무벽의 신형이 바닥에 내려서며 진각을 밟았다. 이어지는 노호와 같은 외침.
“풍마참공도!”
동무벽의 도환이 거침없이 뻗어 감을 바라본 염악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좋구나!”
염악의 쌍장이 앞으로 내밀어지며 그의 강환도 맹렬히 뻗어 나왔다.
도환과 강환의 격돌을 예상하던 인물들이 살며시 눈을 감을 때 유세운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벌써 거기까지 이르렀나?”
내리긋던 동무벽의 도가 비스듬히 옆으로 기울어지고 그의 신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염악의 두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극히 짧은 순간을 이용해 동무벽은 도환으로 강환의 옆을 쳐냈다.
콰쾅.
옆으로 날아간 강환과 도환이 철마성의 성벽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냈다.
서걱.
다시 한번 내뻗어오는 도에 힘껏 뒤로 물러났지만 새하얀 백염이 잘리는 것은 막지 못했다. 동무벽은 염악을 향해 도를 겨눈 채 웃음 지었다.
철마풍 독고황(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