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철마성으로…
유세운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제법인데? 은광천세를 써야 할만큼 몰아넣다니 말야.”
대들 법도 하건만 이미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을 짓는 도병우를 보고 유세운은 싱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가 내기를 했었군.”
유세운의 말에 도병우는 정신이 드는지 눈빛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유세운은 도병우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고민했다.
“뭐 생긴게 예쁜 것도 아니고 무공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무…무슨 소릴 지껄이는 거냐!”
“거봐. 게다가 입도 더럽고. 대체 뭘 시키지?”
유세운의 말에 도병우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이…말하지 않았냐! 강호는 무공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유세운은 그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웃기는군. 방금 증명되지 않았어?”
“으윽! 이건…”
따지려는 도병우에게 유세운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십년이 넘게 수련시킨 진법인건 알겠는데 결국에 무용지물이었잖아.”
“크윽.”
따지려고 했지만 유세운의 미소를 본 도병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시키고 싶은게 뭐냐.”
유세운은 가만히 도병우를 훑어보다가 관백을 바라보았다.
“관호법. 이 자 머리는 좋아?”
유세운의 물음에 도병우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관백은 미소를 지은 채 대답했다.
“경천뇌 도병우라하면 어려서부터 머리가 좋기로 소문났었습니다. 꽤나 유명했었죠. 처음 무림에 나와서도 무공보다는 자신의 머리를 믿었던 녀석입니다.”
“자신의 머리를?”
“진법을 쳐놓고 상대를 유인해 잡았던 걸로 많은 사람들의 웃음을 샀었지.”
동무벽의 말에 도병우의 인상이 구겨졌다.
“누가 나를 비웃었단 말이냐!”
동무벽은 도병우를 보며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구냐고?”
“그래! 감히 나를 비웃다니…”
“나.”
“뭐?”
간단하게 자신이라 대답하는 동무벽을 보고 도병우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동무벽은 혀를 차며 말했다.
“검 위에 서겠다고 강호로 나온 자가 치사하게 함정 같은 것을 파놓다니. 그놈이 멍청하지만 않았어도 그리 쉽게 당하진 않았을 거다.”
동무벽의 말에 도병우는 얼굴을 더욱 붉게 물들였다. 자신도 자신의 머리와 오성이라면 어떤 무공이라도 쉽사리 익힐 수 있을 줄 알았다. 물론 처음 강호에 나와서 쉽게 명성을 얻기 위해 자신보다 강한 자를 상대한 건 사실이었다. 죽을힘을 다해 진법까지 도망친 후 그를 이긴 기억이 좋게 기억될 리 없었다.
유세운은 입가에 미소를 짓고 둘의 대화를 들었다.
“머리는 좋단 말이지? 진법에 능하고?”
“흥! 내가 모르는 진법은 천하에 몇 되지 않을 거다.”
유세운은 가만히 도병우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는 저 자신감인데. 대체 저 터무니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지?”
“뭐가 터무니없다는 거냐!”
유세운은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자신감은 좋은 거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냐.”
“흥!”
유세운은 관백을 돌아보며 물었다.
“관호법 생각은 어때요?”
관백은 유세운의 표정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무림에서 머리 좋기로는 유명한 자이니 괜찮을 것 같기도 합니다. 워낙 대세의 흐름을 잘 타는 인물로도 알려져 있으니.”
“대세를 잘 타는?”
“관가야!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동무벽은 관백을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그것도 옛말인가보다. 너한테 저렇게 대드는 것을 보니.”
“그런 것도 같군.”
동무벽의 말에 관백도 고개를 끄덕였다. 도병우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만 붉힌 채 쏘아 보았다. 관백은 도병우의 시선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아직 배신을 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습니다. 자신의 말은 지키기로 유명했지요.”
“그래?”
유세운은 도병우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광오문으로 들어와라. 단 네가 가지고 있던 용병단은 오늘부로 해체다.”
“무…무슨 소리냐!”
유세운의 눈에서 넘볼 수 없는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도병우는 전신을 옥죄는 듯한 유세운의 기세에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감히 내 앞을 가로막은 죄. 앞으로 네가 광오문에 들어가서 갚아야 할 일이다. 그렇다고 그 단체를 용서 해 줄 생각도 없다.”
“그…그런 말도 안 되는!”
“그리고 한 가지 더. 넌 언제까지 문주인 내게 반말을 할 거지?”
유세운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던 탓인지 도병우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알겠소.”
“가서 말하고 와.”
도병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여태껏 얘기를 듣고 있던 용병단에게 다가갔다.
도병우의 뒷모습을 보던 동무벽이 투덜 거렸다.
“머리 좋은 놈은 있어봤자 성가실 뿐인데.”
관백은 동무벽의 말에 그저 미소만 지었다.
온통 검은 구름이 가득 하늘을 매우고 있다.
언제라도 눈이 쏟아질 것만 같은 분위기의 암흑색 하늘을 올려다보는 자가 있다.
북천의 지배자.
가슴팍까지 내려오는 검은 수염에 굵은 눈썹. 선이 굵은 콧날은 그의 강인한 인상을 돋보이게 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
남쪽 하늘 아래 숨쉬고 있을 중원.
아직 단 한번도 외세의 침입에 굴하지 않았던 곳.
북천방 방주. 광천주(光天主) 이청형.
그는 암흑색 하늘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찌 되어 가는가?”
그의 뒤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사내가 보고를 올렸다.
“북천방의 사대천왕을 포함 그 밑으로 사천의 북천방의 무사들이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래?”
“북천의 강호에 포고문을 알린 결과 이천의 무인이 모였습니다.”
“후후. 그들도 중원의 땅을 밟아보고 싶은가 보군.”
이청형은 작게 웃음을 지었다.
보고를 올리던 자는 주저하다가 결국 입을 열어 마지막 보고를 올렸다.
“그리고 포고문을 보고 그도 왔습니다.”
“그?”
이청형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보고를 올리던 자를 바라보았다. 보고를 올리던 자는 고개를 숙인 채 보고를 마쳤다.
“청룡도(靑龍刀) 육우령도 왔습니다.”
이청형의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다.
“호오. 그가 왔단 말이냐? 그는 분명 내게 더 이상 북천에 미련이 없다고 떠난 자가 아니더냐?”
“예. 맞습니다.”
북천방주는 웃음을 지으며 다시 천주각의 창문 밖으로 보이는 암흑색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나 둘 하얀 눈송이가 내리기 시작했다.
“첫눈인가?”
“예?”
이청형의 작은 혼잣말에 저도 모르게 되물었던 보고를 올리던 자는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결코 이런 일을 용서하는 인물이 아님을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면서 뜻밖의 보고를 올림으로 긴장해 실수를 했다.
하지만 이청형은 탁자로 걸음을 옮기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그를 들라 해라.”
“예.”
보고를 올리던 자가 물러나자 이청형은 탁자에 앉아 옆에 내려온 줄을 잡아 당겼다.
숫자로 열을 헤아리기도 전에 여인이 들어왔다.
단아한 이마와 오똑한 콧날. 그리고 도톰한 붉은 입술은 색기(色氣)마저 물씬 풍겼다. 새하얀 피부 때문인지 더욱 입술이 돋보였다. 청순한 듯 보이는 전체적인 인상에 유독 붉은 입술이 조화를 깨며 색기를 물씬 풍기는 여인이었다.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는 여인을 바라보며 이청형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첫눈이 오는 구나.”
“예. 그렇사옵니다.”
이청형은 자단목 탁자에 팔을 괴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뜻밖의 손님이 온다는 구나.”
이청형은 창밖을 돌아보며 말했다.
“첫눈이 오니 설향차가 생각나는 구나.”
“예.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부탁하마.”
물러가는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청형은 입가에 훈훈한 미소가 지어졌다.
“방주님. 데리고 왔습니다.”
이청형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오라.”
문이 열리고 보고를 올리던 자와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자가 보였다.
홍안(紅顔)에 짙은 흑염을 가슴아래까지 기른 사내의 호안(虎眼)은 여전했다. 등에 한 자루 언월도를 비켜 맨 사내를 바라보던 이청형은 웃음 지었다.
“너는 그만 물러가거라.”
“예.”
보고를 올리던 자가 물러가자 이청형은 의자를 가리켰다.
“일단 앉게.”
이청형의 말에 사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를 바라보는 이청형의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다.
청룡도 육우령.
도환에 이른 고수이자 북천의 하늘 아래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고수.
자신의 회유에도 더 이상 북천에 미련이 없다며 떠난 자.
북천방의 사대천왕이라 해도 그와의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
유일하게 자신 앞에서 무기를 들고 설 수 있는 자다.
이청형이 자리에 앉자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주님. 차를 준비했습니다.”
“그래. 들어 오거라.”
문이 열리고 여인이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차를 들고 들어왔다. 여인은 고운 섬섬옥수를 이용해 두 잔의 차를 따르고는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청형은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웃음 지었다.
“흠. 첫눈이 와서인가. 오늘따라 차향이 깊군.”
이청형은 육우령을 바라보며 차를 권했다.
“들게. 차향이 깊군.”
육우령은 호안을 들어 이청형을 바라보고는 뜨거운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이청형의 안색이 미미하게 떨렸다.
“그렇게 마셔서 차향을 느끼겠는가?”
육우령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차를 마시고자 이곳에 온 것이 아니오.”
“흐음. 하긴 그렇겠지. 다시는 오지 않겠다던 이곳에 자네의 발길이 향한 이유가 무언가?”
육우령은 말없이 이청형을 바라보았다. 여유 있는 미소를 짓고 있는 자. 북천의 주인인 그의 청을 들었던 날이 떠올랐다.
자신을 따라 북천의 주인이 되자고 했던 말.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무인의 길을 걷는 자신에게 북천의 주인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안주하면 칼은 무뎌지는 법. 스스로에게 채찍질하기 위해 그의 청을 거절했다.
미련이 남아서인가. 북천에서 유일하게 그의 앞에서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자는 자신뿐이다.
“중원으로 간다고 들었소.”
육우령의 말에 이청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북천의 하늘은 내게 좁군.”
이청형의 말에 육우령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천하를 논할 위치에 올라간 자임을 누구보다 자신은 잘 알고 있다.
“중원의 고수들을 만나보고 싶을 뿐이오.”
“후후후. 역시 그런가?”
육우령의 대답을 들은 이청형은 그가 그런 말을 이미 할 줄 알고 있었다.
이청형은 말없이 한 모금 차를 마셨다. 이청형은 찻잔을 내려 놓으며 웃음 지었다.
“솔직히 놀랐네. 자네가 올 줄은 몰랐으니. 하지만 왔다면 그 이유뿐이라고 생각했지.”
이청형은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갔다. 하얀 눈발이 천천히 내려왔다. 이청형은 손을 창밖으로 내밀었다. 작은 눈송이가 손위로 다가와 작게 소용돌이 쳤다.
이청형은 가만히 자신의 진기를 따라 춤추는 눈송이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자네에게 포고문을 듣고 모인 무인 이천의 지휘를 맡기겠네.”
육우령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휘를 맡는 다는 것은 그들의 목숨을 책임져야 하는 것. 그렇다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맘껏 기량을 발휘할 수 없다.
이청형은 천천히 손을 거두며 말을 이었다.
“물론 자네에게 무거운 짐이겠지. 하지만 자네 이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자가 없군. 부탁하지.”
이청형의 말에 육우령은 결국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알겠소.”
육우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포권을 취해보이고는 방을 나갔다.
이청형은 천지를 온통 하얗게 물들이는 눈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중원이라…”
철마성으로...(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