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유세운의 얼굴에 귀찮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관도를 온통 막고 있는 가지각색의 복장의 사내들. 살기라기보다는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듯 한 모습에 유세운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백장의 거리를 떨어져 있다지만 그들의 기세는 쉽게 길을 내줄 것 같지 않았다. 유세운은 천천히 말을 몰아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관백이 옆에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행색을 보아하니 용병단(用兵團)인 것 같습니다.”
“용병단?”
동무벽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간단히 말해서 돈을 위해 움직이는 무사들이라고 보면 되지만 저들은 그중에서도 무리를 지어 다니는 자들이오.”
“그렇다면 또 나를 보려고 온 모양이군.”
앞으로 나아가던 유세운은 백여 명에 달하는 사내들의 선두로 나서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오척의 단신에 약삭빠르게 보이는 염소수염. 초로의 나이에 등에는 긴 곰방대를 매고 있었다. 거드름을 피우며 앞으로 걸어 나온 사내는 유세운을 보며 히죽 웃었다.
“네가 유세운이냐?”
유세운은 사내를 내려다보며 웃음 지었다.
“알고 온 것 아닌가?”
“흘흘흘. 그렇지. 당연히 너인줄 알고 이렇게 막았지.”
유세운은 웃고 있는 사내를 보고 짜증난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넌 뭐냐? 얍삽하게 생겨가지고…”
유세운의 말에 사내의 인상이 험악하게 변했다.
“뭐야!”
“관호법. 저놈 뭐하는 놈인지 혹시 알아?”
“훗. 알고 있습니다. 이십년 전부터 용병단에 있었는데 오늘 보아하니 용병단의 단장이 된 듯 하군요. 이름은…”
“닥쳐랏! 관백!”
사내의 일갈에 미안의 관백의 표정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사내는 등줄기를 훑는 느낌에 진저리 쳤다.
“지금 나를 보고 한말인가?”
관백의 말에 사내는 애써 코웃음을 쳤다.
“흥! 그럼 관백이란 자가 강호에 너말고 또 있겠느냐. 나를 이십년 전의 나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래?”
관백의 낮아지는 목소리를 들은 사내는 시선을 돌려 유세운에게 말을 걸었다.
“흘흘. 나는 도병우라고 한다. 별호는 경천뇌(驚天腦)라고 하지. 용병단의 단장이다.”
“그래?”
유세운은 입가에 가는 미소를 지었다.
“네가 단장이라고 하는 걸 보니 별로 대단해 보이지도 않는군.”
“뭐야?”
“아무리 잘 쳐줘 봐야 일초지척도 되지 않아 보이는 자이니 말야.”
“흐흐흐. 무식한 놈. 무림이 무공만으로 통하는 곳인 줄 아느냐!”
유세운은 도병우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아닌가?”
“물론이다. 백명으로 천명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느냐.”
“진법을 말하는 것인가?”
“흐흐흐. 멍청한 놈. 그래. 혼자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일인을 상대할 경우는 더욱 그렇지.”
“하하하. 그래?”
“물론이다. 이제 너를 해치우면 인정하게 되겠지.”
유세운은 웃음 지으며 도병우를 향해 물었다.
“하하하. 그럼 우리 내기할까?”
“내기?”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내기.”
“흥.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니냐? 네놈의 목숨은 이 어르신의 손아귀 안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
유세운은 도병우의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아아. 오해하고 있군. 지금 네 목숨이 내 손안에 있는거야.”
“웃기는 소리!”
유세운은 손사래를 치며 웃음 지었다.
“그렇게 일행 밖으로 나오면 언제라도 내손에 죽을 수 있다는 걸 알아 줬으면 좋겠는데…”
“흐흐흐. 아주 혼자 웃기고 있군.”
유세운은 손을 들어 도병우의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봐. 너는 벌써 한번 죽은 거야.”
“무슨…”
강하게 반발하려던 도병우는 오싹해지는 느낌에 몸서리 쳤다. 마치 단번에 머리가 꿰뚫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놀란 눈으로 유세운을 바라보자 그는 여전히 웃음 짓고 있었다.
“생각보다 제법인걸?”
여유 있는 웃음을 보며 도병우는 등줄기를 훑어 내리는 느낌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리가…”
유세운은 혼란해하는 도병우를 향해 결론지어 말했다.
“네가 이기면 네 소원을 하나 들어주지. 물론 네가 노리는 것은 내 목이겠지만. 하지만 내가 이기면.”
“네가 이기면?”
유세운은 말해 줄듯 입을 달싹이다가 그냥 웃음 지었다.
“그건 그때가서 얘기하지.”
갈등하는 도병우를 보며 유세운은 말을 이었다.
“간단해. 네가 이기면 된다. 네가 자랑하던 그 진법이라는 것으로.”
“흐흐흐. 좋다. 어디 나중가서 딴소리 하지 마라.”
“하하하. 좋아. 관호법. 동호법. 물러나 있어.”
“문주님. 그래도 혼자서 상대하는 것은…”
걱정스레 말하는 관백을 향해 유세운은 손을 내저었다.
“저놈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줘야 하니까 물러나 있어.”
“…예.”
관백과 동무벽이 말을 뒷걸음질 치게 만드는 것을 본 유세운은 사람들 사이로 숨어버린 도병우를 향해 웃음 지었다.
“이제 시작하지?”
“좋다! 모두 백첩연환진(百疊連環陣)을 펼쳐라!”
가지각색의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도병우의 외침에 일순간에 잘 정련된 군인인양 열 명씩 줄을 서는 모습에 유세운은 미소를 지었다.
열 명씩 열 줄로 섰을 뿐이지만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사뭇 달랐다. 흑무기마대의 진법보다 한층 더 위험한 느낌이 느껴졌다.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말의 갈기를 한번 쓰다듬어 주었다.
“위험하니 피해있거라.”
알아 들을리 없건만 말에게 속삭이고는 유세운은 가볍게 말등을 밟으며 날아올랐다. 새처럼 가볍게 날아오르는 유세운의 몸은 십여 장이나 올라가서야 속도가 느려졌다. 정점에 달한 모습을 본 도병우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지금이다! 암기를 던져라!”
슈슈슈슉.
순식간에 하늘을 매우며 날아오는 암기를 본 유세운은 실소를 지었다. 가지각색의 인물이라 그런지 다양한 암기들이 날아왔다. 작은 세침부터 심지어 손도끼까지 날아오는 것을 본 유세운은 고개를 흔들며 허공을 딛고 다시 몸을 날렸다.
하늘을 가득 매우던 암기들은 속절없이 사라졌지만 도병우의 외침은 멈추지 않았다.
“일조부터 오조까지 원형진을! 육조부터 십조까지는 저자가 떨어질 때 다시 한 번 암기로 공격!”
가지각색의 복장 중에서도 근거리 무기를 든 자들이 유세운이 떨어져 내릴 부분에 원형으로 진을 짰고 그들의 뒤로 다시 한 번 원형진을 짜는 것이 보였다. 눈에 가득 살기를 띠우고 손에 가득 암기를 쥐는 모습을 본 유세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심하군.”
우뚝 멈춰선 유세운.
허공에 멈춰서 내려다보는 유세운의 눈빛에 용병단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헉!”
“저…저건.”
“서…설마? 능공허도(能空虛渡)?”
경악하는 용병단을 내려다보는 유세운을 향해 도병우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심검에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전설 속에서나 가능할 경지를 보여주는 모습을 보니 오늘의 행사가 불안했다. 하지만 결과가 중요했다. 이정도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됐다.
“흥! 허공에 떠 있기만 한다고 승부가 나는 것이냐. 내려와라!”
도병우의 일갈에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맞는 말이지.”
유세운은 마치 매가 사냥감을 노리듯 머리부터 아래로 하고는 허공을 박차고 쏘아져 내려갔다. 도병우는 유세운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오행환(五行環)을 펼쳐랏!”
열명씩 모여 다섯 방위를 점하고 있던 일조부터 오조의 인물들이 삼각 진형으로 서며 한 명씩 앞으로 나왔다. 앞으로 나선 다섯의 인물들에게 내력을 뒤에서부터 몰아주는 것이 보였다.
다섯의 검강이 치솟는 것을 본 유세운은 장력을 내 뻗어 몸을 허공으로 다시 뽑아 올렸다.
“뭐지 이건?”
다섯 개의 검감 정도라면 이정도 위화감이 들 리가 없었다. 전혀 다른 기운의 다섯 가지 검강을 든 검들이 진의 중앙에 모였다.
슈아아악.
다섯 개의 검강이 모여 만든 하나의 검환. 오색영롱한 하나의 검환을 바라보는 유세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도병우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크흐흐. 어때? 이걸 위해서 우리 용병단은 십년을 수련했다. 이들은 용병단에서도 가리고 가려서 뽑은 존재들. 같은 오행의 기운을 익힌 자들을 추려내는데 걸린 시간만 해도 이년이 넘었다. 크흐흐.”
유세운은 도병우의 웃는 얼굴을 한번 쏘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하지만 언제까지 네가 그렇게 웃는지 지켜보마.”
유세운은 깊이 자연지기를 받아 들였다. 교차해 올라가는 손에 은빛의 강기가 선명하게 나타났다.
허공에 우뚝 서 양손에 은빛 강기를 머금고 있는 모습을 본 도병우는 등줄기를 훑는 위험한 예감에 몸서리 쳤다. 애써 자신의 예감을 무시하며 소리쳤다.
“쳐랏!”
일제히 뻗어 올라가는 다섯 개의 검의 궤적을 따라 오행환이 유세운을 향해 쏘아져 왔다. 유세운은 두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이것으로 끝이다!”
유세운의 양손이 내리 그어지며 두 가닥의 은빛강기가 와선형으로 회전하며 쏘아져 갔다.
콰쾅!
격렬한 폭발음과 미친 듯 몰아치는 경력에 유세운은 허공으로 더욱 떠올랐다.
“커헉!”
비틀거리며 간신히 버텨선 오십 명의 인물을 향해 쏘아져 내려가는 유세운의 귓가로 도병우의 외침이 들려왔다.
“연환강편(連環罡片)을 펼쳐랏!”
오십 명의 인물들 뒤에 원을 그리며 서 있던 인물 중 다섯이 강기를 발출하는 것이 보였다.
유세운의 눈에 웃음기가 띠어졌다.
“그깟 걸로 승부가 나겠는가!”
하지만 강기를 향해 쏘아지는 수많은 검기들을 보고 유세운의 눈에는 의혹이 서렸다.
“무슨?”
파파팟!
날아오던 강기가 조각조각 나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사방 어느곳 하나 피할 곳이 없어 보였다. 다시 들려오는 도병우의 목소리.
“다시 한번 오행환을 펼쳐랏!”
슈아앗.
방금 전 같은 기세는 아니지만 역시나 위험하기는 매한가지인 오색의 검환이 만들어졌다. 유세운은 눈을 빛냈다.
“나를 원망하지 마라.”
피할 곳 하나 없는 사방을 메우는 강기의 조각들과 자신의 코앞으로 쏘아져 오는 오행환. 유세운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모두 물러서랏!”
유세운의 일갈에 담긴 뜻이 절박했음인가. 오행환을 쏘아낸 자들은 미친 듯이 몸을 뒤로 뺏다. 듣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은 유세운의 일갈.
“은광천세!”
츄아앗-
유세운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찬란한 은빛의 광채.
사방 십장을 가득 매우는 은빛의 광구.
유세운의 사방을 뒤덮던 강기의 조각들도 그의 앞으로 쏘아져 가던 오행환도 모두 거짓말처럼 은빛의 광채에 사라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모든 용병과 도병우, 관백과 동무벽의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은빛의 광채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의 눈에는 아직도 은빛의 여운이 남았다.
점점 사라져가는 은빛의 여운 속에 오연히 서 있는 유세운.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에 사내들은 하나 둘 무릎을 꿇었다.
거대한 화구를 하나 만들어낸 유세운은 화구의 중앙. 허공을 딛고 서서 용병들을 돌아보았다.
다행이 그의 말을 들었음인지 은광천세에 휘말린 사람들은 없는 듯 했다. 유세운은 눈을 들어 도병우를 바라보았다.
고양이 앞에 쥐처럼 도병우는 식은땀을 흘리며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유세운은 손가락을 까딱이며 그를 불렀다.
도병우는 마치 주문에 걸린 듯 비틀거리며 유세운의 앞에가 무릎을 꿇었다.
유세운은 말없이 도병우를 내려다보았다.
철마성으로...(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