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오문-116화 (116/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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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돌려본 유세운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천풍쌍기 역시 손쉽게 상대들을 제압한 상태다. 동무벽만이 쌓인 것이 많은지 눈이 작은 사내를 데리고 장난을 치는 중이다. 유세운의 시선은 수방주에게 향했다.

수방주는 유세운의 시선이 닿자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유세운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멈춰.”

“예.”

바로 대답하며 멈추어서는 수방주는 두 다리를 보는 이가 안쓰러울 만큼 떨었다. 유세운은 수방주의 얼굴을 바라보며 천천히 한손을 들어올렸다.

“내가 현판을 깨준다고 했지.”

“예.”

고분고분 대답하는 수방주는 유세운의 손위에 나타나는 은빛의 강환을 보고 기겁을 했다. 유세운의 손 위에서 맹렬히 회전하는 강환을 보는 수방주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일단 첫 번째 말한 것은 지켜야지.”

유세운의 손을 떠난 강환. 박살난 대문의 위쪽 현판이 있는 곳을 향해 날아갔다.

콰쾅.

대문위의 지붕이 애초에 없었던 것 마냥 산산조각이 나며 비산했다. 현판이 있어야 할 자리. 흔적조차 남지 않는 모습에 수방주는 절로 오줌을 지리며 주저앉았다.

“이…이게 무슨 짓이냐!”

찢어질 듯 소리치는 여인의 목소리가 장내에 울렸다. 유세운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삼십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미인이 내원에서 나오며 소리쳤다. 날카로운 인상이지만 그것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미인이었다.

“부…부인.”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양관척을 돌아본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떨리는 목소리의 양관척은 내심 크게 흔들리는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여인은 양관척을 보고 두 눈을 치켜떴다.

“당신이 여기는 무슨 일이야!”

여인은 당황하는 양관척을 쏘아보다가 시선을 돌려 천풍쌍기를 발견하고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다…당신들은.”

관백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랜만이군요. 부인.”

관백의 말에 당황하는 여인은 화등잔만한 눈을 부릅뜨고 쏘아보는 동무벽을 발견하고는 뒷걸음질 쳤다. 동무벽은 자신의 고슴도치 같은 수염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 이곳이 어디라고 있는 것이오? 내 진정 잘못 들은 게 아니란 말이오?”

여인은 그제야 주변을 돌아보았다. 자신의 집에 머무는 식객들이 모두 천풍쌍기 앞에 제압 되어 쓰러져 있고 남편이 그토록 믿던 흑무기마대원들이 모두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여인의 얼굴은 더욱 사색이 되었다.

동무벽은 서슬 퍼런 보도를 들고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내 진정 재수씨에게 실망이오. 양가녀석이 가장 힘들 때 곁에 있어주어야 할 사람이 아니오.”

동무벽의 살벌한 기세에 여인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멈춰 섰다. 동무벽의 기세에서 살기를 느꼈음인가. 양관척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내게 맡겨다오.”

동무벽은 양관척의 얼굴을 잠깐 쏘아보고서는 고개를 내 저었다.

“아니. 이 일에 있어서만큼은 너에게 맡겨서는 안돼. 다른 문제는 몰라도 재수씨에 대한 문제만큼은.”

양관척은 흔들림 없이 동무벽의 앞을 막아선 채 입을 열었다.

“네 맘은 안다. 하지만 나에게 맡겨다오.”

양관척의 흔들림 없는 모습에 동무벽은 말없이 그를 쏘아 보았다. 눈으로 말함인가. 둘의 시선은 오랜 시간 허공에서 얽혔다. 동무벽은 한숨을 내쉬며 보도를 도집에 넣었다.

“결국은 네가 해결해야 할 일. 우리의 일은 여기까지 인 듯하군.”

동무벽은 양관척의 시선을 외면하며 몸을 돌려 나가다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눈이 작은 사내에게 발길질을 했다.

퍼억.

“컥!”

“네놈이 우리를 우습게 봐!”

양관척은 동무벽의 뒷모습과 걱정스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관백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뒤돌아서는 양관척의 눈에 흔들림은 찾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부들부들 떨고 있는 여인을 본 양관척의 시선은 다시 흔들렸다.

“부인.”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동무벽과 관백이 이 일에 물러섰음을 알았음인지 여인의 목소리는 다시 찢어졌다. 양관척은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

“령아.”

여인의 눈이 표독해졌다.

“어떻게 나를 그렇게 부를 수 있죠?”

여인은 양관척을 쏘아보며 계속해서 쏘아 붙였다.

“당신은 내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어! 언제나 저 둘을 걱정만 하고 모든 것이 무너져도 천풍루만은 지키려고 했어!”

대답 없이 바라보는 양관척을 향해 여인은 더욱 소리쳤다.

“당신에게 있어 나는 뭐야! 예전의 패기 넘치고 자신감이 넘치던 당신의 모습은 저들이 사라지고 나서 철저하게 무너져갔어. 힘이 들어도 내게 기대지 않고 저들만을 걱정했잖아!”

여인의 한마디 한마디에 관백과 동무벽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신들만이 힘든 줄 알았다. 적어도 양관척이라면 그들이 없어도 뭐든지 해결해 낼 줄 알았다. 이십 년이란 긴 시간동안 단 한번도 양관척이 그렇게 힘들 줄은 생각한 적이 없던 그들이었다.

양관척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당신은 그냥 떠나더라도 천풍루의 문서를 가져가서는 안 되는 거였다오.”

여인은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소리 질렀다.

“그래서야! 그래서 더욱 천풍루를 팔아 치우고 싶었어!”

양관척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 역시 자신만을 생각한 것. 그녀 앞에서 당당하게 소리칠 입장이 되지 못했다.

“흑흑. 왜! 왜!”

눈물을 글썽이는 여인을 힘겹게 바라보는 양관척에게 바닥에 주저앉은 수방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삼 년 간 독수공방을 했습니다.”

수방주의 말에 양관척은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수방주는 잔뜩 겁에 질린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진부인이 제게 천풍루를 팔면서 내건 조건이었습니다.”

양관척의 시선은 수방주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의혹의 눈길은 이어지는 수방주의 말에 의해 지워졌다.

“저도 상도를 아는 상인입니다.”

양관척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그늘에 가려 항상 이인자의 자리밖에 차지 할 수 없었던 수방주라는 사내를. 흑무기마대의 지원이 있었다 해도 그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쉽게 중원 상권의 삼분지 일을 차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양관척의 시선이 다시 여인에게로 향했다.

여인은 모든 걸 포기했음인지 고개를 숙이고 울고만 있었다. 서럽게 우는 여인에게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는 양관척의 어깨에 유세운의 손이 얹어졌다. 양관척이 돌아보자 유세운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그를 여인에게 밀었다.

양관척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여인의 앞에 섰다. 양관척은 말없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흠칫 놀라는 여인을 천천히 품으로 끌어안았다. 여인은 양관척의 품에 안기며 울음을 더욱 터트렸다.

“흑흑. 가가(可可).”

양관척은 여인의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미안하오. 내 부인을 힘들게 했구려.”

여인은 양관척의 손길을 느끼며 더욱 서럽게 울었다. 삼년. 짧다고 볼 수 없는 시간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후회했는지 모른다. 양관척이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어 했던 천풍루를 자신의 손으로 훔쳐 나오면서 얼마나 후회를 했던가.

평생을 짊어지고 갈 짐을 벗어 던지는 기분이었다. 여인은 울면서 양관척의 품에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양관척은 아무 말 없이 여인의 머릿결을 쓰다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유세운은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떠오르는 백연혜의 생각에 심술이 났다. 유세운의 시선이 장원의 무사들에게 쏘아졌다.

“오늘부로 천마방은 없어졌다. 뭘 구경하는 거냐!”

일갈에 이은 사방으로 뻗어가는 유세운의 기세에 무사들은 정신없이 지금은 사라진 대문이 있던 곳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갔다.

유세운은 고개를 돌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부대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중원에 나온 자들 중 책임자인가?”

“그렇다.”

바닥에 쓰러진 채로 힘겹게 입을 여는 부대장의 대답에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우두머리에게 가서 전해라. 중원을 넘볼 생각은 내가 있는 한 버리는 것이 좋을 거라고.”

“크흐흐. 웃기는군. 대장님이 이곳에 있었다면 너 따위가 이렇게 설칠 수 있었을 것 같은가?”

유세운의 입가에 장난끼 어린 미소가 어렸다.

“하하하. 광오문의 문주. 유세운이다. 가서 그렇게 전해라. 언제라도 상대해 주겠다고. 단 나를 넘기 전에 중원의 그 어떤 것에도 너희의 손길이 닿지는 못할 거다.”

유세운의 말과 함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 자신의 의지를 표명하는 유세운에게서 태산 같은 기도가 뿜어져 나왔다. 부대장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답했다.

“그 말 그대로 전하마.”

유세운은 힘겹게 일어나는 부대장에게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적어도 내상은 치료하고 떠나라.”

“흥!”

코웃음을 친 부대장은 비틀거리면서 힘겹게 일어섰다.

“우리는 초원의 늑대. 남의 도움 따위는 받지 않는다.”

부대장을 따라 일어선 사내들을 바라보던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내 말을 들을 것 같지는 않군.”

유세운의 품에서 황금 열 냥짜리 전표 세장이 나왔다. 부대장의 인상이 잔뜩 구겨졌다. 유세운은 내력을 담아 전표를 날리며 말했다.

“다른 뜻은 없다. 나와의 겨룸 중에 죽은 너희들의 말 값이다.”

부대장은 자신의 눈앞에 떠있는 전표를 넘어 유세운을 쏘아보았다. 유세운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난 동정 따윈 하지 않아. 하지만 말은 있어야 하겠지. 너희가 이곳에서 약탈이나 하도록 보고 있을 수는 없으니 가지고 가라.”

유세운의 말에 부대장은 힘겹게 전표를 움켜쥐고는 코웃음을 쳤다.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언제라도 와라.”

부대장은 힘겹게 손짓을 해서 부하들과 함께 장원을 벗어났다. 그토록 넓은 장원이건만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나자 유세운의 일행과 여인, 수방주만이 남았다. 수방주는 모든 것을 포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앞으로 나서려는 유세운의 앞에 양관척이 어느새 무릎을 꿇고 앉으며 막아섰다.

“양총관. 뭐하는 거지?”

“문주님.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부탁?”

유세운의 말에 양관척은 고개를 숙였다.

“이자를 용서해 주십시오.”

“무슨 말이야? 양총관을 이십 년 동안 피를 말리게 한 자야.”

유세운의 말에 양관척은 더욱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제 마음을 내준 친구들이 관백과 동무벽이라면 제가 상계에서 살아나갈 수 있었던 것은 저와 항상 경쟁하던 이 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세운은 양관척의 말에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의 시선도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양관척의 이어지는 말에 절로 입가에 웃음이 지어졌다.

“힘으로 이 자의 것을 다시 뺏는다면 그건 상도에 어긋나는 일. 제 힘으로. 제 능력으로 다시 되 찾아오겠습니다.”

양관척의 말에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생각은 못했군. 하지만 그게 정답이야. 알았어.”

“감사합니다.”

양관척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오른 손을 들어 왼팔을 향해 수도를 내리쳤다. 오른 손의 수도에 어린 날카로운 기세에 유세운은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유세운은 양관척을 향해 노호성을 터트렸다.

“뭐하는 짓이야!”

“문주님이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은 죄. 왼팔로 사죄하겠습니다.”

유세운은 양관척의 말에 코웃음을 터트렸다.

“흥! 내 허락 없이는 광오문의 모든 문도는 다칠 수도 해할 수도 없어.”

유세운의 말에 양관척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유세운은 양관척을 보며 밝게 웃음 지었다.

“그런데 부인은 소개 안 해 줄 생각이야? 언제까지 저렇게 어리둥절한 시선을 계속 받아야 하지?”

유세운의 말에 양관척은 당황하며 여인을 데리고 왔다.

“인사드리시오. 광오문의 문주님이신 유문주님이시오.”

여인은 당황한 눈으로 양관척을 바라보았다. 양관척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내가 지금 총관으로 있소.”

여인은 양관척의 말에 유세운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진령이라고 하옵니다.”

유세운은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이런 식으로 인사하란 말은 아니었으니 일어나세요.”

양관척이 비록 총관이라지만 나이는 이미 자신의 아버지뻘이니 여인이 아무리 작게 잡아도 자신의 어머니뻘은 될 터. 아무리 유세운이라도 쉽게 대하지 못했다. 진령은 천천히 일어나 양관척의 옆에 섰다.

관백이 천천히 다가와 입을 열었다.

“미안하오. 부인. 우리가 오해했었소.”

“아닙니다.”

진령의 대답에 동무벽이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딴 데로 돌렸다.

“흠흠. 아까 전의 일은 미안하오.”

진령은 동무벽의 모습을 보며 눈물진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후훗. 아닙니다.”

유세운은 왜 저렇게 날카롭게 생긴 여자에게 양관척이 반했을까 했지만 그 의문은 그녀의 웃음을 보고 사라졌다. 유세운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 깊은 가을의 하늘은 백연혜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경천뇌(驚天腦) 도병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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