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천마방(天馬房)
“끄응.”
지끈거리는 머리를 움켜쥐고 일어난 유세운은 창문을 열었다. 거의 폐허에 가깝게 변한 양관척의 집이었지만 무성한 나무와 잡초들 사이로 새들이 날아다니는 모습은 보기에 그리 나쁘지 않았다. 유세운은 힘껏 기지개를 켰다.
“으윽.”
내력을 사용하지 않고 분위기에 취해 들이부은 것이 실수였다는 것은 계속해서 머리를 옥죄는 통증이 알려줬다. 유세운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토록 술이 센척하던 동무벽도 술병을 껴안고 대자로 누워 잠들어 있었다. 그나마 관백은 구석에 앉아서 눈을 붙였는지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유세운은 양관척이 보이질 않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청으로 들어오는 양관척이 보였다. 손에 든 쟁반에서는 달콤한 향이 나고 있었다. 유세운의 눈과 마주친 양관척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문주님. 이렇게 일찍 일어나셨습니까?”
“그야 워낙 머리가 아파서…”
양관척의 입가에 웃음이 진해졌다.
“어제는 조금 무리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유세운은 멀쩡해 보이는 양관척을 보며 눈을 흘겼다.
“혹시 아무도 내력을 안 사용하기로 했는데 몰래 취기를 내보낸 건 아니지?”
“하하하. 문주님도. 제가 술만 마시고 산 것이 벌써 올해로 삼년 째 입니다. 이정도 마시고 정신을 못 차린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가?”
양관척은 유세운에게 다가와 손에 들고 온 쟁반을 내밀었다.
“꿀물이라도 한잔 하시지요.”
“고마워.”
유세운은 양관척이 내민 쟁반에서 꿀물을 들어 천천히 마셨다. 달콤한 향이 입안을 감돌자 조금은 정신이 깨는 것 같았다.
유세운에게 꿀물을 넘긴 양관척의 발이 동무벽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퍽!
“윽! 뭐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허리춤의 도를 움켜쥐는 동무벽을 향해 양관척의 코웃음이 날아갔다.
“헛소리말고 일어나기나 해.”
동무벽은 자신의 옆구리를 공격한 발이 양관척의 발임을 알고 인상을 험악하게 구겼다.
“오랫동안 맞아보질 않았다 이거지?”
동무벽의 말에 양관척은 쟁반위에 놓인 꿀물이 든 잔을 집어 던졌다.
“먹고 싶음 받아 먹어라.”
동무벽은 양관척이 던진 잔을 가볍게 받아 들고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거냐?”
양관척은 동무벽의 말에 관백에게 다가가며 투덜거렸다.
“너희 두 놈 때문에 사둔 꿀이 얼만데 그걸 잊어 버리냐?”
양관척이 관백을 깨우는 동안 유세운은 동무벽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야?”
동무벽은 유세운을 바라보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크크크. 그건 관백이나 나나 워낙 술 마신 다음날에는 꼭 꿀물을 마시다 보니 양가놈이 항상 그것을 준비해 놓았었소. 그게 아마 아직도 남아 있었던 것 같소.”
“흐음. 꿀물이라… 속 풀기는 좋군.”
유세운은 꿀물을 모두 들이킨 다음 방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동무벽이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더 자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아니. 취기를 조금 몰아내려고.”
유세운의 말에 동무벽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양관척에게 다가갔다.
방안으로 들어선 유세운은 창문 앞에 서서 깊이 심호흡을 했다. 한 호흡에 깊이 들어오는 자연지기를 몸에 휘돌리자 아침부터 머리를 옥죄던 취기가 사라짐이 느껴졌다. 깊이 들이마신 숨을 내뱉으며 탁기를 뿜어낸 유세운은 가볍게 몸을 풀었다.
“일단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은 해결해야지.”
유세운은 방문을 열고 양관척을 불렀다.
“양총관.”
“예.”
다가오는 양관척의 뒤에서 옷매무새를 매만지는 관백과 하품을 하는 동무벽을 향해 유세운은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두 명도 같이 오면 좋겠는데.”
“알겠습니다.”
관백과 동무벽도 같이 방으로 들어오자 유세운은 침대에 걸터앉으며 입을 열었다.
“일단은 양총관의 주독부터 몰아내고 움직이는 게 좋을 듯해서 불렀어.”
동무벽은 양관척을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삼년 동안 쌓인 주독을 전부 몰아내려면 적어도 한달은 걸릴 테니 그냥 볼일을 보는 게…”
유세운은 동무벽의 말을 도중에 막으며 말을 이었다.
“음. 내가 보기엔 해봐야 알겠지만 길어도 한시진이면 될듯하니 일단 양총관은 운공을 시작하고 두 호법은 잠시 동안 호법을 부탁해.”
“한시진이라고 하셨습니까?”
놀라 묻는 관백에게 고개를 끄덕인 유세운은 이미 운공에 들어간 양관척의 명문혈에 장심을 갖다대었다.
다른 사람의 운공에 섣불리 도움을 준다는 것은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것과 같이 위험한 일. 유세운은 눈을 감고 양관척의 운기하는 경로를 지켜보았다. 이렇게 남의 운기를 도와본 적은 없었지만 자신의 자연지기라면 충분히 해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양관척의 대주천과 소주천을 지켜본 유세운은 천천히 자연지기를 보태주기 시작했다. 유세운의 자연지기가 도와주자 양관척의 운기하는 속도가 배 이상 빨라졌다.
관백과 동무벽은 양관척과 유세운의 운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혀를 내둘렀다. 양관척의 전신에서 뿌연 안개처럼 뿜어져 나오는 기운을 보고 유세운의 말이 농담이 아님을 알았다. 관백과 동무벽은 자신의 애병을 들고서 시선을 돌렸다.
막상 운기를 도와주던 유세운은 이미 장기에까지 스민 주독을 뽑아내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몸속에 깃든 기운을 전부 뽑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님을 이제야 확실히 알았다. 삼년간 쌓인 주독을 천천히 몰아냈지만 이것은 하루 이틀에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양관척도 그것을 느꼈는지 천천히 운기를 멈추었다.
양관척은 두 눈을 번쩍 뜨고서 내력을 갈무리했다. 유세운도 명문혈에서 손을 떼고 일어나 자리에 앉았다.
양관척은 유세운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문주님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하하하. 뭐 사실 예상했던 것보다 쉽지 않네. 장기에 스민 주독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뽑아내도록 해.”
“예.”
유세운은 양관척의 한결 나아진 화색을 보고는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세운은 입가에 장난끼 어린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제 약속한 일을 하러가지.”
양관척의 두 눈에 의아함이 깃드는 것을 본 유세운은 어깨를 으쓱 거렸다.
“분명히 천마방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했는데?”
양관척은 유세운의 말을 듣고 나서는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문주님. 제가 문주님을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정말 강합니다.”
양관척의 말을 듣는 동무벽과 관백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렸다. 혈천문과의 일전. 유세운이 보여준 무위는 이미 그들의 예상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강환에 이른 고수가 있다는 흑무기마대라지만 유세운의 안중에 있을리 만무했다.
역시나 유세운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일단 그들이 광오문을 건드린다면 설령 황제라해도 무사하지 못할테니 걱정 말고 안내나 해줘.”
유세운의 광오한 말에 양관척은 난색을 표했다. 주저하고 있는 양관척을 향해 관백이 조용히 말을 건넸다.
“어서 안내해주게. 솔직히 문주님이 아니더라도 우리라도 가서 담판을 지어야 할 만한 문제이니까.”
양관척은 관백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들을 잃고 싶지 않아.”
유세운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만약 지금 안내해 주지 않겠다면 그렇게 해. 설마 악양에 있는 천마방을 못 찾아 갈리야 없겠지.”
동무벽은 그런 유세운을 향해 웃음을 지었다.
“크크. 문주 혼자라면 못 찾을 수도 있지.”
유세운은 하얗게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음을 지었다.
“동호법. 아직 술이 덜 깬 건가?”
유세운의 웃음 뒤에 숨겨진 기운을 읽은 동무벽은 고개를 돌려 딴청을 피웠다. 유세운은 시선을 돌려 양관척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난 적어도 천마방의 현판이 깨지는 순간을 양총관이 지켜봤으면 좋겠어.”
유세운의 말에 양관척은 잠시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유세운의 눈에 담긴 빛은 허언을 하고 있지 않았다. 오늘부로 반드시 천마방의 현판을 깨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양관척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제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천마방의 현판이 깨지는 순간을 봐야겠습니다.”
양관척은 유세운을 바라보며 입가에 가는 미소를 지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악양의 중심가에 자리 잡고 있는 천마방(天馬房).
장원의 넓이가 이미 한눈에 들어올 크기를 넘어서 있었다. 가로세로 어디를 봐도 수백 장(丈)에 달하는 위용을 보였다. 금박으로 입혀진 현판의 크기만 해도 가로 삼장에 세로 일장에 달하는 크기였다.
사람들이 들어가기에 부담이 될 만큼 커다란 대문 앞에는 두 명의 무사가 장창을 어깨에 기댄 채로 주변을 쏘아보고 있었다. 두 눈에 형형히 뿜어져 나오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다각. 다각.
두 무사는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에 인상을 구기며 시선을 돌렸다. 네 기의 기마를 바라보던 두 무사는 날카로운 안광을 뿜어댔다. 이미 악양에서 아니 천하에 천마방을 모르는 이가 몇이나 될까. 그러다보니 이곳을 찾아오는 이 또한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이곳 대문을 지나갈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은 쪽문으로 들어가기 일쑤였다. 그래서 항상 대문이 닫혀 있었고 그 옆에 달린 쪽문이 열려있었다. 쪽문이라고 해도 어지간한 장원의 대문보다 큰지라 사람들은 별 부담 없이 들어서곤 했다.
하지만 네 기의 기마는 전혀 주저함이 없이 대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장창을 교차해 막으며 무사의 입에서 침착한 목소리가 세어 나왔다.
“누구신지부터 밝혀 주십시오.”
유세운은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무사를 향해 웃음을 지어보였다.
“비켜.”
무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웃는 얼굴로 말한 유세운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뭐라고…?”
유세운은 살짝 인상을 구겼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비켜.”
무사의 얼굴이 붉게 타오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무사의 입에서 일갈이 터져 나왔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유세운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귀찮게 하지 말고 비키라니까.”
장창을 들어 유세운을 겨눈 무사는 양관척을 발견하고 입가에 조소를 띄웠다.
“이게 누구야? 양대인이군.”
장창을 겨눈 무사의 말에 옆에 서 있던 무사도 웃음을 터트렸다.
“흐흐흐. 이제는 술 마실 돈이 없어 빌리러 왔나보지?”
분노한 양관척이 출수하기도 전에 커다란 그림자가 두 무사를 덮쳐갔다. 미쳐 들고 있던 창을 휘둘러보기도 전에 두 무사의 목덜미를 움켜쥔 커다란 손이 있었다.
“캑!”
“꾸륵!”
동무벽은 두 무사를 달랑 들어 올린 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희 같은 것들한테 무시당할 만한 녀석이 아니다.”
동무벽은 두 무사의 얼굴을 자신의 코앞까지 가지고 와서는 천천히 말을 내 뱉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다시는 그런 허튼 소리하지마라.”
동무벽의 기세에 눌린 두 무사는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유세운은 동무벽을 향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다가 죽을거 같으니 놔줘.”
동무벽은 두 무사를 대문 양쪽으로 집어 던지며 혈을 짚었다. 실신한 채로 구석에 처박힌 두 무사를 바라보던 양관척은 동무벽을 다시 보았다.
출수하고 무사들을 제압하는 일련의 과정을 알아보지 조차 못했다. 이미 이십년 전과는 차원이 달라진 것 같았다. 자신이 비록 상업에 매달려 있었다해도 이렇게 까지 차이가 날줄은 몰랐다.
유세운은 대문을 바라보다가 웃음을 지었다.
“일단 첫인사가 중요한 법이니까. 누가 대문을 부술까?”
높이만 이장에 달하는 거대한 대문을 바라보며 하는 말에 양관척은 고개를 내저었다. 저 정도의 대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뿐더러 그렇게 까지 힘을 낭비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문이었다. 관백이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이번에는 제가 해보겠습니다.”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하죠.”
관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에서 내렸다. 아무래도 무공을 펼칠 때 말에게 무리가 갈까 저어하여 내려선 관백은 대문을 바라보았다. 이장에 달하는 대문을 바라보던 관백은 삼장 앞에 멈춰 섰다. 활짝 펼쳐든 부채를 바라보며 양관척은 금세 혀를 내둘렀다.
관백의 부채에 서린 시퍼런 강기는 예전에 보아오던 것과 궤를 달리 하고 있었다. 보이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핫!”
관백의 입에서 터져나온 짧은 기합성과 함께 뻗어간 푸른 강기는 거침없이 대문에 부딪쳤다.
콰콰쾅.
귀청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먼지를 날리며 이장에 달하는 대문이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장원 안으로 날아 들어간 대문 조각들이 떨어지는 소리 또한 요란했다.
양관척의 표정에 놀람이 가득했다.
“허허. 이거 자네 무공이 못 본 사이 많이 늘었군. 강기를 이렇게 자유롭게 쓰다니…”
“응? 하하하. 별거 아닐세.”
유세운은 관백과 양관척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웃는 거는 나중에 하고 일단 들어갑시다.”
천마방(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