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오문-111화 (111/194)

(111)

말을 타고 앞으로 나오던 여인의 입가에 가는 미소가 그려졌다.

“네가 유세운이냐?”

유세운의 한쪽 눈썹이 꿈틀댔다.

“그런데 왜 반말이냐?”

유세운의 물음에 여인의 아미가 파르르 떨렸다.

“흥! 건방지기가 하늘을 찌른다는 말이 진짜로군.”

여인은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오만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난 황혜란이다.”

“그래서?”

유세운의 되물음에 황혜란의 안색이 약간 붉어졌다. 황혜란의 당황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뭐……뭐야?”

유세운은 황혜란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 뒤에 서 있는 다섯 명의 노인들을 쳐다보았다. 혈의를 입은 노인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노부는 혈천오로(血天五老)중 일로(一老)라네.”

“혈천오로?”

유세운의 되물음에 혈천일로의 얼굴도 구겨졌다. 관백의 전음이 들려왔다.

(혈천오로는 혈천문의 내문 중 가장 핵심이 되는 고수들입니다. 다섯이 전원 강환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유세운은 아무렇지 않은 듯 팔짱을 끼며 고개를 쳐들었다. 혈천일로가 천천히 씹어 뱉듯 말을 이었다.

“우리는 혈천문에서 왔네.”

“흠. 오지 않아도 찾아가려 했건만 수고를 덜어줘서 고맙군.”

유세운의 말에 혈천오로 전원의 얼굴에 분노한 기색이 어렸다. 유세운은 그들의 분노한 살기를 전신으로 받으며 황혜란을 슬쩍 쳐다보았다.

“좋아. 그건 그렇다치고 저 여자는 뭐야?”

혈천일로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대답했다.

“허허. 그 분은 혈천문의 소문주이신 혈라묵편(血羅墨鞭) 황소저일세. 삼봉 중 한 분이시지.”

황혜란은 일로의 설명에 흐뭇해하며 오만한 표정으로 유세운을 내려다봤다. 유세운은 황혜란의 그런 표정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흥! 그런데 왜 반말을 하냔 말이지.”

“뭐…뭐얏! 죽고 싶어?”

유세운은 황혜란의 말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 그 말 진심이냐?”

“죽엇!”

황혜란은 외침과 동시에 허리에 차고 있던 채찍을 잡고 휘둘렀다. 채찍의 끝이 현란하게 움직이며 다섯 방향을 노리고 날아왔다. 유세운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는 오른손을 내뻗었다. 다섯 방향으로 날아오던 채찍은 손쉽게 유세운의 손에 잡혔다.

황혜란의 안색은 사색이 되었다가 금세 밝아졌다. 황혜란은 전신의 내력을 이용해 채찍을 비틀며 자신 쪽으로 당겼다. 하지만 채찍은 요지부동.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유세운은 멀뚱히 황혜란을 보며 물었다.

“뭐하냐?”

“이익! 묵각혈린망(墨角血鱗蟒)의 껍질로 만들어져 맨손으로는 절대 잡을 수 없는 신병이기(神兵利器)인데……”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유세운은 손을 뿌려 채찍을 돌려주었다. 황혜란은 채찍을 받아서 멍하니 쳐다보다가 유세운을 향해 이를 갈았다.

“하긴 뭔가 숨겨 놓은 한 수가 있으니 감히 우리 혈천문을 건드렸겠지.”

“흥. 웃기지 말고 어서 도망가라.”

“뭐?”

“감히 나한테 채찍을 휘두르고 그냥 넘어가리라는 상상은 버려. 지금부터 도망가면 내손에 안 잡힐지도 모르니 도망가. 내손에 잡히면 평생 오늘을 후회하며 살 거다.”

“으윽! 혈천오로!”

“왜 그러십니까?”

“저 자식. 반죽여서 무공을 전폐해서 내 앞으로 끌고 와요!”

“허허. 반만 죽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황혜란은 오늘따라 되는 일도 없다고 속으로 욕을 하며 말을 천천히 뒤로 물렸다.

“그렇다면 죽여서라도 제게 가져와요.”

유세운은 머리를 긁적이며 미소를 지었다.

“악독한 심보로군. 누가 데려갈지 고생 좀 하겠어.”

“아악! 죽여 버려요!”

흥분해 목소리마저 갈라져 나오고 있는 황혜란을 보며 혈천오로가 앞으로 나섰다. 혈천일로는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네가 강하다는 얘기는 들었다. 아무리 과장된 소문이라고 해도 흑마육령과 철마십영을 쓰러트렸다더군.”

유세운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과장된 소문? 그건 겪어보면 알겠지.”

“물론 그자들이라 해도 우리에 비하면 하찮은 실력이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연수합격을 이해하게나.”

유세운은 어깨를 휘휘 내저으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말이 너무 많군.”

혈천오로의 분노와 살기가 하늘까지 닿으려는 듯 치솟아 올랐다. 유세운은 장난끼 어린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을 내밀어 까딱거렸다.

“그만 떠들고 덤벼.”

혈천일로의 입가에도 미소가 그려졌다. 흉측한 살소(殺笑)가.

“혈천오행진(血天五行陣)을 펼쳐라!”

관백과 동무벽은 유세운의 다섯 방위를 둘러싸는 혈천오로를 보며 걱정했다.

“도와야 하지 않을까?”

동무벽의 물음에 관백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우리의 도움은 필요 없으실 거야. 우리가 열명이 모인다면 저 정도 진을 파훼 못할까?”

“농담이 나와? 우리 같은 고수 다섯만 있어도 충분한 것을.”

관백은 동무벽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문주는 우리가 열명이 덤벼도 이길 수 있다고 했으니 걱정 하지마.”

“너 지금 그 말을 믿냐?”

“그리고 우리 몫은 따로 있잖아.”

관백의 시선을 따라 동무벽의 시선도 옮겨졌다. 오백의 혈마단. 동무벽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하긴 우리가 얼마나 늘었는지는 여기서 알 수 있겠지?”

“우리 내기할까?”

관백의 말에 동무벽은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좋아! 오늘 누가 더 많이 혈마단을 해치우는지 두고 보자고!”

말을 마침과 동시에 동무벽의 신형이 쏜살처럼 앞으로 달려 나갔다. 마주 달려오는 혈마단원의 말과 함께 두 명을 베어내는 동무벽의 모습에 관백도 부채를 펴들며 앞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런 약은 수로 내기에 이길 수는 없네!”

“크하하하하! 그럴까? 이것으로 다섯!”

“으아악!”

동무벽과 관백의 앞을 막아서는 자들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다섯 방위를 점하고 천천히 옆으로 걸음을 옮기는 혈천오로를 보는 유세운의 입가에는 미소가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 전신을 따끔거릴 만큼 뒤덮은 혈천오로의 살기와 숨이 막힐 듯한 혈천오행진의 진세에도 유세운은 느긋했다.

의기상인의 경지를 깨달은 이후 처음으로 겪는 싸움이라 오히려 흥분이 밀려왔다. 유세운은 천천히 돌고만 있는 혈천오로에게 말을 걸었다.

“돌고만 있는 다고 승부가 나지는 않을 텐데.”

“흥! 그렇다면 받아봐라!”

다섯 방위를 점하며 내뻗어오는 장력을 보며 유세운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일단 몸 풀기라는 건가?”

유세운의 신형에서 풀어져 나오는 팔각연환권의 위력에 혈천오로는 삼장을 더 뻗어내야만 했다.

퍼퍼펑!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섬광마멸지만을 깨달았다고 생각했지만 풀어내는 팔각연환권도 예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유세운은 팔짱을 끼며 입을 열었다.

“이것 밖에 안 되는 건가?”

“갈!”

다시 한번 다섯 방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기들에 유세운은 코웃음을 쳤다.

“아까와 다를 바가 없잖아. 아직 혼이 덜 났나?”

유세운이 다시 한번 풀어내는 팔각연환권에 장강불진의 묘용이 깃들어졌다. 혈천오행진의 강기들을 뚫고 거슬러 올라가는 유세운의 와선형 강기는 혈천오로를 육박해갔다. 혈천오로의 다급성이 터져 나왔다.

“헛! 뭐냐!”

콰쾅!

다급히 장력을 내뻗어 막아내는 혈천오로를 향해 유세운은 한쪽 발을 까딱이며 웃음 지었다.

“어때? 이만하면 제대로 할 맘이 생겼을라나?”

혈천일로의 안색이 침중하게 굳었다.

“역시 이정도로는 무리인가?”

유세운의 입가에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당연하지. 강환을 이룬 고수들이라서 기대했건만 이 정도라면 실망이야.”

“모두 혈천오행환(血天五行環)을 펼치게!”

혈천오로는 자신의 방위를 굳건히 지키며 유세운의 머리 위 정점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혈천오행환!”

다섯 방향에서 형성된 강환이 유세운의 머리 위에 떠올라 하나의 고리를 형성하며 회전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느껴본 것과는 비견할 수 없는 위력이 넘실거렸다. 찢어질 듯 펄럭이는 옷에 유세운의 입가에는 흥분에 겨운 미소가 그려졌다.

“좋아! 이 정도는 돼야지!”

유세운의 양손이 수도로 변하고 은색의 광채가 넘실거렸다. 언제까지나 은광천세만으로 싸울 수는 없는 법. 이번에 깨달은 장강삼검의 위력을 시험해 볼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유세운의 기세가 혈천오행진의 진세를 뒤흔들자 혈천일로의 입에서 일갈이 터져 나왔다.

“지금이다! 혈천오행환!”

강환으로 이루어진 고리는 점점 작아지며 미증유의 거력을 내뿜었다. 유세운은 찢어질 듯 펄럭이는 옷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냥 은광천세로 할 껄 그랬나?”

정신없이 혈마단을 베어내던 동무벽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사내가 보였다. 혈마단주. 이십년 전 자신들보다 고수였던 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동무벽의 입가에 호승심이 깃든 미소가 그려졌다.

“이봐! 관가야!”

“왜 그러나?”

자신을 향해 찔러오는 검을 부채로 흘리며 대답하는 관백에게 동무벽이 물었다.

“혈마단주는 몇 명으로 쳐줄거냐?”

“하하하. 농담하나? 무슨 차이가 있다고 여러 명으로 쳐준다는 말인가? 한명일세.”

“들었지? 오래 끌 수 없겠구만.”

“미친 녀석!”

혈마단주의 안색이 일그러지며 말을 달렸다. 질풍처럼 내달리는 마상에서 휘두르는 검에서 뻗어오는 검풍을 보며 동무벽은 혀를 찼다.

“아직도 검풍인가? 변화가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군.”

동무벽의 도에서 넘실거리는 도강은 도환을 형성했다. 혈마단주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이것이 지금의 나다!”

동무벽의 도가 뿌려지고 도환은 거침없이 검풍을 베어 넘겼다. 달려오던 기세 그대로 혈마단주와 말이 한꺼번에 베어 넘어갔다. 동무벽은 주저없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검들을 쳐내며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한 놈도 남겨두지 않겠다.”

“그렇게 웃을 틈이 없을 걸세. 이미 내가 자네를 앞지르고 있으니 말일세.”

“이익! 치사한!”

황혜란은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면서도 보지 못했다. 추풍낙엽처럼 베어지고 있는 혈마단이라니.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한창 강호를 뒤흔들고 있는 유세운이라는 자를 보기 위해 며칠을 고생하며 달려온 길에 자신들의 피로 강가를 붉게 물들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일도에 혈마단주를 베어 넘긴 짐승처럼 큰 거구의 사내는 위압적인 기세로 도를 휘둘렀고, 나이가 들어 보이기는 했지만 눈이 휘둥그레지는 미남의 부채는 차분히 혈마단원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어느새 황혜란의 말은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아니 자신이 뒷걸음을 치고 싶었는지 모른다.

유세운이라는 작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잡히지 않게 바로 도망가라던 말이. 상당히 매혹적으로 들리는 말임에 틀림없었다. 황혜란은 말고삐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기대를 갖고 혈천오로와 유세운이 싸우는 곳을 바라보았다.

“혈천오행환!”

완성된 혈천오행환은 어른 손바닥만한 크기였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위력은 산이라도 부술 것 만 같았다. 유세운은 양손을 머리위에 교차시키며 자신을 향해 벼락처럼 떨어져 내려오는 혈천오행환을 바라보았다.

“잘 기억해둬라! 이것이 바로 장강양단풍(長江兩斷風)이다!”

하늘로 교차하며 뻗어나가는 은색의 광채는 보는 이의 눈을 아리게 했다. 거침없이 뻗어 올라가는 은색의 광채는 혈천오행환에 닿기 전 맹렬히 회전을 하며 승천했다. 두 가닥의 자연지기를 담은 장강양단풍의 기운은 와선형으로 꼬이며 혈천오행환을 향해 뻗어갔다.

번쩍.

혈천오행환과 장강양단풍의 기운이 부딪치는 순간. 소리는 없고 주위를 밝히는 빛만이 뿌려졌다.

콰콰쾅.

뒤늦게 울리는 굉음. 그 위력에 강가에 쌓여 있던 먼지가 삼장이상 치솟아 올랐고 중심에서 뿜어져 나오는 바람에 말들도 뒷걸음질 쳤다.

“크으윽!”

혈천오로의 비명소리에 황혜란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먼지가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하자 장내의 상황이 한눈에 보였다. 내상을 입었음직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쪽 어깨에서 피를 흘리며 비틀거리는 혈천오로였다. 혈천일로가 입에서 피를 흘리며 물었다.

“이건 뭔가?”

“섬광마멸지라는 거야.”

유세운의 간단한 대답. 하지만 혈천일로의 얼굴은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고금제일지법! 어찌 이런 것이 있으면서도 혈천오행환을 받아냈단 말인가!”

유세운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음 지었다.

“일단은 실험해 보고 싶었으니까.”

유세운은 혈천오로를 바라보며 장난끼 어린 미소를 지어보였다.

“뭐 솔직히 그걸 쓸 필요는 없어 보였지만 혹시 날 방해할지 몰라서 그런거라고.”

“방해라니 무슨 말인가?”

유세운은 황혜란을 바라보았다.

“도망가라고 분명히 말했건만…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무…무슨 말이냐!”

부들부들 떨리는 몸에 억지로 힘을 주며 견디려는 황혜란을 향해 유세운은 어깨를 으쓱였다.

“도망가지 않은 건 나에게 채찍을 휘두른 벌을 달게 받겠다는 것으로 알겠어.”

“뭐?”

유세운은 아무 말 없이 비호처럼 황헤란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총관 양관척(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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