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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흘러 배는 감리(監利)현을 지났다. 동정호의 초입에 있는 악양(岳陽)까지의 거리는 뱃길로 하루거리다. 유세운은 오랜만에 선실의 침상에 누웠다.
“하루거리라 이거지.”
선상에서의 시간은 정말이지 너무나 지루했다. 그나마 며칠 전에 동무벽의 이야기를 들은 것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하늘과 장강의 끊임없는 물결뿐이었다. 이제 하루만 더 있으면 이 배에서 내릴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마음에 위안을 삼았다.
유세운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팔베개를 하고 발을 까딱이던 유세운은 밀려오는 잠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잠이 슬며시 들려던 유세운은 바깥이 소란스러워짐을 느끼고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갑자기 시끄러워지고.”
애써 눈을 뜨지 않고 잠을 청하려 했지만 배의 움직임이 멈춘 것을 느끼고는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유세운의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선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관백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주님.”
“관호법. 무슨 일이야?”
불쾌한 기분을 여실히 드러내는 유세운의 목소리에 관백은 문밖에서 뺨을 긁적였다.
“아무래도 나와 보심이 좋을 듯싶습니다.”
“왜?”
유세운은 물으면서 자리에 일어났다.
“저희의 앞길을 막는 자들이 있습니다.”
“뭐야?”
유세운은 문을 부술 듯 열어젖히고는 관백을 바라보았다. 관백은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의 등 뒤로 열두 척의 배가 길게 늘어서 앞길을 막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문을 열고 나오자 밖에서 소란스럽게 떠들던 목소리가 확연히 들렸다.
“광오문의 유세운이라는 놈 있으면 나오라고 해! 그전에는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줄 알아.”
유세운은 기가 막혀하며 관백에게 눈짓으로 물었다. 관백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수룡단(水龍團)이라고 장강수로십팔채 중 가장 강성한 곳입니다.”
“그런데?”
“시간을 끌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시간을?”
유세운은 다가오는 동무벽을 바라보았다. 동무벽은 자신의 고슴도치같이 뻗어 있는 수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혈천문 때문인 것 같소.”
“혈천문이라니 무슨 소리야?”
동무벽은 아무 말 없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자가 타고 있는 배를 가리켰다. 유세운은 동무벽의 손가락을 따라 바라보았다. 두 개의 깃발. 푸른 기에 용이 새겨진 깃발과 온통 핏빛의 기에 천(天)자가 새겨진 깃발이었다.
“저게 뭔데?”
“혈천문의 기를 달고 왔다는 것은 저들이 직접 행사하는 게 아니라 혈천문을 등지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관백의 설명에 유세운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래? 그럼 지금 혈천문을 믿고 감히 우리의 앞을 막았다는 말이지?”
“예.”
유세운은 작게 웃으며 배의 선수(船首)로 나가 소리쳤다.
“내가 바로 유세운이다. 지금 떠드는 놈은 누구냐?”
내력을 담아 소리치자 그 목소리가 장강에 멀리멀리 퍼졌다. 유세운의 말에 수룡단의 배는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금세 시끄럽게 떠들던 목소리가 대답을 했다.
“크하하하. 네놈이 유세운이냐? 그 자리에서 조금만 기다려라. 곧 혈천문에서 사람들이 올 것이다.”
내력이 담기지 않고 오십 장의 거리를 격하고 있는 배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상당히 큰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유세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혈천문에서 올 테니 기다리라고?”
“크하하하. 그래. 명년 오늘이 네놈의 제삿날이 될 거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네놈의 제삿날이 되지 않을까?”
유세운의 물음에 상대는 잠시 흠칫하는 듯 하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웃기지도 않는군. 그런 배로 우리의 배를 따라 올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냥 거기서 목이나 내놓고 기다려라.”
유세운은 가볍게 어깨를 돌리고 천천히 근육을 이완시키며 관백과 동무벽에게 말했다.
“나 잠시 다녀 올 테니 여기서 기다려.”
“예?”
“무슨 말이오?”
관백과 동무벽의 물음에 유세운은 대답대신 웃음만을 보여 주었다. 유세운은 선수를 박차고 장강으로 뛰어 들었다. 수룡단의 선박에서 큰소리로 떠들던 자는 유세운이 장강으로 뛰어들자 코웃음을 치며 소리쳤다.
“녀석이 장강으로 뛰어들었다. 쏴라!”
슈슈슈슈슉.
하늘을 온통 검게 물들이며 열두 척의 배에서 유세운을 향해 화살들이 쏟아졌다. 유세운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장강의 물결을 박차고 앞으로 신형을 날렸다. 희뿌연 그림자만을 남기고 앞으로 쏘아져 가는 유세운의 뒤로 하늘을 가득 메우던 화살들이 쏟아져 내렸다.
“뭐하는 거냐? 쏴라! 쏘란 말이다!”
유세운의 등평도수를 본 소리치던 자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미처 다음 화살을 메기기 전에 유세운은 그자의 앞에 내려섰다. 유세운은 입가에 장난끼 어린 미소를 지으며 상대의 목을 움켜쥐었다.
“켁!”
유세운은 혀를 내밀며 바동거리는 자를 보며 물었다.
“네놈이 수룡단주냐?”
“케엑!”
유세운은 잠시 귀를 기울이다가 그자가 미친 듯이 자신의 목을 잡고 있는 손을 가리키자 미소 지어보였다.
“이런! 미안하군.”
유세운은 목을 놓아주며 가볍게 발을 뻗어 양쪽 무릎 뼈를 찼다.
빠악.
“크아아악!”
반대로 꺾여진 자신의 무릎을 보며 사내는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 유세운은 그의 왼쪽 어깨에 슬며시 발을 얹으며 물었다.
“한번만 더 소리 지르면 이 왼팔도 필요 없는 줄 알겠다.”
“크윽!”
눈물까지 글썽이며 비명을 참는 사내를 보며 유세운은 다시 물었다.
“네가 수룡단주냐?”
사내는 미친 듯이 고개를 내저었고 다른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수룡단주요.”
유세운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수룡단주라고 밝힌 자를 바라보았다. 용이 새겨진 푸른 장삼을 입고 나타난 인물은 중후한 인상을 가진 중년인이었다. 등에는 커다란 작살을 메고 있었다. 유세운은 가볍게 발밑에 있던 사내를 한쪽으로 차서 치우며 웃음을 지었다.
“네가 수룡단주라고?”
“그렇소.”
“그럼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될 인물이군.”
수룡단주는 유세운을 쏘아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의 본거지는 혈천문의 영역 안에 있소.”
“그래서?”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소.”
유세운은 하늘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한참을 웃던 유세운은 수룡단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지금 큰 실수를 한거야. 뭐냐 하면 말이지. 지금은 혈천문보다 내가 당신에게 가까이 있다는 것이지.”
“어쩔수 없었소.”
수룡단주는 등에 메고 있던 작살을 꺼내 손에 들었다. 유세운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아아. 그렇게 서두르지 말라고. 자네 하나 손본다고 화가 풀릴 만큼 기분이 좋지는 않으니 말야.”
“그 말은……?”
“어린회라고 들어봤나?”
“알고 있소. 당신에게 와해된 곳이라는 것도.”
유세운은 고개를 돌려 열두 척의 배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게 수룡단의 전부인가?”
“그렇소.”
“그건 그렇고 저놈은 누구야?”
수룡단주는 유세운이 가리키는 자를 바라보았다. 무릎이 기형적으로 꺾여 이제는 기절해 있는 사내를 바라보고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룡단에서 가장 목소리가 큰 자요.”
유세운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바로 옆에 떠 있는 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다 좋은데 그렇다면 정중히 부탁을 했어야지.”
슈팟.
유세운의 손가락에서 뻗어나가는 은빛의 광채를 보며 수룡단주의 낯빛이 굳어졌다.
콰직.
바로 옆에 있던 배의 밑 부분에 장정 한 명이 들락날락할 만한 구멍이 생기며 거침없이 장강의 물이 쏟아져 들어갔다.
“으악!”
“모두 옆 배로 옮겨라.”
유세운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다짜고짜 배를 막고 험한 소리를 하고 있으면 내 기분이 어떻겠어?”
슈팟.
다시 한번 유세운의 양손에서 와선파천지(渦旋破天指)가 뻗어나갔다.
콰직.
이번에는 다른 두 척의 배에 구멍이 뚫리며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모두 배를 강가로 대라!”
“어서 서둘러!”
유세운은 수룡단주의 얼굴이 사색이 되는 것을 보며 십지에서 다시 한번 와선파천지를 뿜어냈다.
뻗어나간 지력은 남은 여덟 척의 배를 천천히 침몰시켰다. 수룡단의 인물들은 미친 듯이 헤엄을 치며 강가를 향했다. 유세운은 수룡단주의 얼굴을 바라보며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수룡단주 뒤에 있던 자가 강가를 보며 소리쳤다.
“단주님!”
수룡단주는 인상을 가득 쓴 채 부하를 바라보다 부하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강가를 가리킨 부하의 손가락을 따라 유세운도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수백 명에 이르는 혈의의 사내들이 강가에 말을 탄 채로 정열 해 있었다. 유세운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나를 직접 노리진 않았으니 이 정도에서 봐주지. 하지만 다시는 수룡단이라는 이름이 내 귀에 안 들렸으면 좋겠군. 다시 들린다면 내가 직접 찾아가지..”
유세운은 다시 몸을 날려 타고 오던 배로 돌아왔다. 관백과 동무벽은 유세운이 다가오자 혈의를 입고 있는 자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혈마단(血魔團)이 온 것 같습니다.”
유세운은 어깨를 으쓱했다.
“혈천문이군.”
“예.”
유세운의 입가에 장난끼 어린 미소가 진하게 피어올랐다.
“혈천문에서 먼저 시비를 걸어주다니 의외인데?”
동무벽은 혈마단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자신의 보도를 쓰다듬었다.
“혈마단이라면 황마철웅대보다 더 강하다고 알려져 있는 혈천문의 정예니 조심하시오.”
유세운은 작게 키득거렸다.
“무슨 소리하는 거야? 혈마단은 자네들 몫이라구.”
“예?”
유세운은 관백의 물음에 손가락을 들어 혈마단의 중심부를 가리켰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나한테 용무가 있는 놈들은 저기 다섯 명의 노인들 같은데?”
유세운이 가리킨 곳을 바라본 관백은 침음성을 삼켰다.
“그런 것 같군요.”
“혈마단은 우리가 맡지.”
유세운은 동무벽과 관백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데 둘이서 감당할 수 있겠어?”
동무벽은 유세운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흥! 우리가 예전의 천풍쌍기인줄 아시오?”
“예전의 천풍쌍기야 내가 알바 아니고. 오백이면 작은 숫자가 아니니까 하는 말이지.”
관백은 동무벽의 어깨를 두들기며 답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유세운은 강가와의 거리를 눈짐작으로 재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등평도수는 다 펼칠 수 있는 거야?”
“못합니다.”
유세운은 딱 잘라 대답하는 관백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그러면 어떻게 저놈들을 상대하겠다는 거야? 강가까지 족히 오십 장은 되 보이는구만.”
동무벽은 자신의 거친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크하하. 그거야 뭐 배를 저리로 대라고 하면 되지 않겠소.”
유세운은 주먹을 불끈 쥐며 동무벽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바보 아냐? 저리 배를 갔다댔다가 배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거야?”
유세운의 말에 관백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금 다른 사람들을 걱정하셔서……”
유세운은 두 눈에 불을 키며 관백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유세운은 주먹을 부르르 떨며 대답했다.
“이렇게 머리가 안돌아가서야. 우리는 이배를 타고 악양까지 가야 한단 말이야.”
“그렇군요.”
관백은 그제야 유세운의 말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유세운은 말없이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오백여 명의 살기어린 눈빛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몸에 힘들 빼.”
“예?”
관백의 질문에 유세운은 말없이 허공섭물을 펼쳤다. 동무벽과 관백의 두 눈이 화등잔만큼 커질 때 유세운은 장강을 향해 몸을 날렸다.
“괜히 움직여서 힘들게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장강의 물결을 밟고 강가를 향해 몸을 날리는 유세운을 보며 관백과 동무벽은 혀를 찼다. 방금 전에 수룡단에게 갈 때 보여준 등평도수도 놀라웠지만 두 사람이나 허공섭물로 든 채로 펼치는 등평도수에는 고개를 내 저었다.
오십 장의 거리를 다섯 걸음 만에 넘어선 유세운은 가볍게 강가에 내려섰다. 동무벽과 관백을 내려준 유세운은 오백 명의 혈마단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그 사이로 걸어오는 다섯 명의 노인과 여자를 바라보았다.
커다라면서도 눈 꼬리가 약간 올라가 사나워 보이는 인상의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나움이 더욱 그녀의 개성을 살려 주었다. 시원하게 생긴 이목구비에 새하얀 피부. 그리고 전신에 꼭 맞는 혈의. 전신 굴곡이 한눈에 들어왔다.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나온 완벽에 가까운 몸매를 자랑하며 앞으로 나서는 여인의 허리춤에는 검은 빛이 감도는 채찍이 감겨 있었다. 유세운은 여인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예쁘군. 연혜 만큼은 아니지만……”
혈라묵편 황혜란(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