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오문-109화 (109/194)

(109)

혈라묵편(血羅墨鞭) 황혜란

“무슨 개수작이냐!”

버럭 소리를 지르는 암습자를 향해 유세운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왜? 이미 어디 다른 살수집단에 소속 돼있어?”

“내가 보통 자객으로 보이나!”

“하하하. 아니. 검풍의 경지에 달한 고수가 보통 자객일리는 없지.”

“흥!”

콧방귀를 끼는 암습자는 유세운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훗. 왜? 밑으로 가면 목이라도 내줄 텐가? 황금 일만 냥은 아무데서나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유세운은 암습자를 바라보다가 품안을 뒤졌다. 한참을 뒤적이던 유세운은 찾던 것을 꺼내들었다. 마치 고양이의 눈처럼 생긴 묘안석(猫眼石)이었다. 유세운은 묘안석을 암습자에게 슬며시 던졌다.

묘안석을 받아든 암습자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사부님 말씀이 황금 일만 냥의 값어치가 있다고 하더군.”

“무…무슨 뜻이냐?”

“지금까지 뭘 들은 거야? 내 밑에 들어오라고.”

유세운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그렇지만……”

“시시콜콜 따지지 말자고. 간단하게 이야기 하지.”

유세운은 자신의 가슴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난 광오문의 제 이 대 문주인 유세운이라고 해. 물론 알고 왔겠지.”

암습자는 대답조차 않고 손에 들린 묘안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복면 사이로 보이는 눈에는 희망과 갈등의 빛이 아른 거렸다.

유세운은 말을 잠시 끊고 암습자를 바라보았다.

암습자는 시선을 돌려 유세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물론이다.”

“그리고 방금 전에 보았던 그 둘이 동호법과 관호법이야.”

“천풍쌍기인가?”

“응.”

고개를 끄덕이는 유세운을 보고 암습자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어쩐지 혈을 짚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더라니.”

“하하하. 확실히 보통은 넘지.”

유세운은 암습자를 멀뚱히 바라보다가 자신의 머리를 두들겼다.

“이런 아직 자네 이름도 모르는군.”

“훗. 곽부설. 곽부설이라고 한다.”

“좋아! 곽부설. 일단 광오문의 문도라고만 해두지. 뭐 특별히 생각나는 직위가 없으니 말야.”

유세운은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광오문에 들어오게 된 것을 축하해. 일단 가장 급선무인 동생의 일을 해결해. 문주로서 내리는 첫 명령이야.”

곽부설은 유세운의 눈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알겠습니다. 문주님.”

“하하하. 술이라도 한 잔 하고 싶지만 자네는 동생의 일을 해결하고 오면 그때 한 잔 해야겠군.”

유세운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곽부설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마 알아서 쫓아 와야 할 꺼야. 우린 기다려줄 시간이 없으니 말이지.”

“그 정도야……”

“좋아. 그럼 다녀와.”

곽부설은 깊이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바로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유세운은 만족한 듯 웃음을 지었다. 부서진 방문을 쳐다보며 관백과 동무벽이 들어왔다. 유세운이 그들을 보며 밝게 웃었다.

“하하하. 우리 문도로 삼았어.”

동무벽은 유세운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관백에게 물었다.

“그런데 곽부설이라면 어디서 들어 본 이름 같지 않아?”

“나도 아까부터 그걸 생각하고 있었네.”

관백도 동무벽의 말에 동의하며 생각에 잠겼다. 유세운은 어깨를 으쓱하며 중얼거렸다.

“저 정도 실력의 자객이라면 이름을 들어 봤을 수도 있겠지.”

유세운의 말에 관백과 동무벽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관백이 손을 마주쳤다.

“최연소 살수!”

“쾌검의 달인! 일검혈(一劒血) 곽부설!”

유세운은 둘의 이야기에 호기심을 느꼈다.

“아는 이름이야?”

관백은 유세운의 물음에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알지는 못합니다. 저희가 활동하던 시기에 열다섯의 나이에 살수 중에 손에 꼽히는 인물이었지요. 특히나 빠른 쾌검으로 절대 상대에게 두 번 이상의 살수를 안 펼치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래? 하하하. 역시 광오문에 들어올 만한 자질은 있는 남자였군.”

유세운은 일어나서 창밖으로 밝게 떠 있는 달을 바라보았다.

하남성(河南省) 대별산(大別山).

혈천문(血天門)의 초대문주가 자신의 땅이라 외친지 육백년. 혈천문의 본문이 있는 곳으로 모든 무림인들의 금지(禁地)가 된지 오래다. 사파의 하늘이라 불리는 혈천문의 구중심처(九重深處)에 자리 잡고 있는 혈왕각(血王閣).

현 혈천문주 혈령마왕(血靈魔王) 황정회가 지내는 곳이다.

위로 치켜떠진 눈에는 사기가 가득했고 핏빛의 혈의는 위압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전신에서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사기는 보는 이들이 절로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 짧게 자른 턱수염은 그의 문주로서의 위엄을 살려주었다.

황정회는 긴 머리를 뒤로 늘어뜨리고는 눈을 감고 있다. 그의 뒤에는 중년 미부가 앉아 그의 머리를 빗으로 빗겨주고 있었다.

삼십대 초반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중년 미부는 그린 듯한 아미, 새하얀 피부와 대조되는 붉은 입술. 몸에 꽉 끼는 선정적인 혈의가 어우러져 색기가 넘쳤다.

중년 미부는 황정회의 머리를 빗어 넘기다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미인의 한숨에 나라가 기운다고 했던가.

황정회의 감겨있던 눈이 슬며시 떠졌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나?”

황정회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여인은 빗질을 잠시 멈추었다.

“아니요.”

약간은 허스키하면서 가라앉은 목소리의 여인은 다시 천천히 빗질을 시작했다. 황정회는 눈을 감으며 물었다.

“그가 다시 강호로 나와서 그러는 건가?”

황정회의 물음에 여인의 빗질은 다시 멈추었다. 여인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상공.”

“말하라.”

눈을 감은 채 말하는 황정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여인은 다시머리를 빗기기 시작했다.

“그를 다시 볼까 두렵습니다.”

여인의 말에 황정회는 가벼운 미소를 그렸다.

“그를 어찌 다시 본단 말인가?”

“지난 이십년간 단 한번도 편히 잠이 들지 못했습니다. 상공이 곁에 있어주지 않으면 저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황정회는 눈을 뜨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혈왕각의 창문으로 대별산을 바라보며 뒷짐을 졌다.

“알고 있다. 그대의 마음고생이 어떠한지.”

황정회는 대별산 정상 너머로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허허허. 어떻게 이리도 교묘하게 일이 틀어지는지……”

여인은 황정회의 태산과 같은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강한 자이옵니까?”

여인의 물음에 황정회는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현 강호에 천하제일로 거론되고 있는 인물 중 한 명이지.”

“그럼 저는 어찌해야 하옵니까?”

황정회는 고개를 돌려 여인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이십년 전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아니 어찌 보면 더욱 아름다워졌다. 봉오리 져 있던 꽃이 활짝 피었다고 할까?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했던 고생들이 하나도 힘들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더욱이 십년 전 본부인이 죽고 나서는 그녀에게만 빠져 살고 있었다.

황정회는 걸음을 옮겨 여인의 앞에 섰다. 입맛이 썼다. 하필이면 강호에 다시 나온 그가 만난 인물이 가장 경계를 하고 있던 인물일 줄은 몰랐다. 혈겸천사대장의 오른 팔을 벤 자가 그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기뻐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인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의 존재를 지울 수 있는 기회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혈겸천사대장의 보고에 절로 욕설이 튀어 나왔다.

오만함과 자신감으로 뭉쳐있던 자들이 어찌 남의 밑에 들어 갈 생각을 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황정회는 여인을 살며시 껴안았다. 여인은 스러지듯 황정회의 품안으로 들어왔다. 황정회는 그녀의 비단 같은 머릿결을 만지며 다짐했다.

“아무 걱정하지 말거라.”

“아아 상공.”

눈을 감는 여인의 허리를 힘주어 안으며 황정회는 작게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그를 만날 일은 없을 거다.”

황정회의 품에 안긴 여인의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가 그려졌다.

의창에서 곽부설을 보내고 배를 탄지 삼일 만에 유세운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이게 빠른 길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오래 걸리는 거 아냐?”

유세운의 옆에 서서 바람을 맞고 있던 관백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 노력도 안하고 이렇게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지 않습니까?”

“으윽.”

유세운은 관백에게서 시선을 돌려 동무벽을 바라보았다. 한참 추억에 잠긴듯한 모습에 유세운은 그의 옆에 털썩 주저 앉으며 말을 걸었다.

“혈천문의 그 여자 생각하지?”

“으윽!”

동무벽은 대번에 인상을 구기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유세운은 동무벽의 큰 손을 잡고 다시 자리에 앉히며 물었다.

“심심하니까 얘기나 해줘.”

동무벽은 한참을 인상을 쓰면서 유세운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유세운을 보고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서부터 얘기해 달라는 거요?”

“당연히 처음부터지.”

유세운의 말에 동무벽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회상에 잠기는 듯 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이미 강호에서 천풍쌍기라는 이름이 모든 이들의 입에서 회자 될 때였소.”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무벽의 얘기에 집중했다.

“그 당시에도 육룡이 있었소.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저와 관백은 이미 그들의 경지를 뛰어 넘어 있었소.”

“육룡?”

“육대세력의 소문주들로 천하를 오시할 인물들이었소.”

어느새 관백도 다가와 유세운의 옆에 앉았다. 동무벽은 관백을 한번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천하에 무서울 게 없었소. 어차피 나와 관백은 바람처럼 자유롭기를 원했으니까 그들과 부딪칠 일도 없었소.”

“음.”

고개를 끄덕이는 유세운을 보지도 않고 동무벽은 점점 더 회상에 빠져 들었다.

“적어도 그녀를 만나기 전에는 말이오.”

유세운은 이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귀를 쫑긋 세웠다. 하지만 동무벽은 회상에 잠겨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당황하는 유세운이 말릴 새도 없이 동무벽은 선실로 사라져 버렸다.

“엑? 아니 중요한 이야기는 안 해주는 이유가 뭐야!”

화를 내는 유세운을 향해 관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문주님. 그에게 그녀의 얘기는 묻지 마십시오.”

“왜?”

“아직 그녀의 배신을 잊지 못했을 겁니다.”

“뭐? 배신?”

유세운이 다그쳐 묻자 관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실 무벽이 혈천문주보다 먼저 그녀를 만났지요. 그녀는 이미 강북무림에서 유명한 미인이었습니다.”

“흐음. 꽤나 이뻤나 보군.”

“당시의 육룡이 애타게 바라보던 여인이 둘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한명이지요.”

유세운은 관백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육대세력의 인물들이 모두 관심을 가질 정도라면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대충 짐작이 갔다. 관백은 말을 이었다.

“그녀는 무벽에게 마음이 있는 듯 했습니다. 그래서 약속까지 했지요.”

“어떤 약속?”

관백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가문은 학자 집안이었습니다. 당연히 강호를 떠도는 저희 둘을 곱게 보지 않았죠. 도망가기로 했었습니다.”

“하? 정말?”

유세운은 선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동무벽을 상상하며 웃음 지었다. 사랑의 도피라니 상상이 가지 않았다. 관백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희 모르게 이미 그 집안과 혈천문의 얘기가 끝나있었습니다. 뭐 솔직히 정사중간인 저희야 하고 싶은 데로 모든 일을 했으니 그녀가 무벽을 사랑한 척 했을지도 모를 일이죠.”

“그런가?”

“예. 그래서 혈천문을 끌어들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긴 그녀의 집안이 혈천문의 세력권 안에 있었으니 가족을 위한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긴 육대세력 중 하나인 혈천문의 위협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예. 어쨌든 그녀와의 약속 장소에 나온 게 혈겸천사대였습니다. 그때부터 피 말리는 탈출이었습니다.”

“흐음. 그래?”

유세운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갑자기 궁금해졌어.”

“무슨 말씀이신지?”

“과연 그녀가 동호법을 사랑했는지…… 아니면 그런 척만 한건지.”

“하지만……”

유세운은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중에 혈천문을 찾아가자. 지금은 철마성의 일이 중요하니 어쩔 수 없지만. 시간이 날거야.”

“하지만 무벽은……”

“아니야. 분명히 그녀를 보고 싶을 거야. 적어도 그 정도 소원은 들어 줄 수 있는 문주이고 싶군. 하하하.”

관백은 웃음을 지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유세운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문주라면. 문주라면 충분히 무벽의 소원을 들어 줄 수 있을 것 같군.’

선실 문을 닫고 서 있던 동무벽은 두 눈을 소매로 닦았다.

“제길……”

혈라묵편 황혜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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