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오문-107화 (107/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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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북성(湖北省) 보강(保康)현을 아침부터 떠나 말을 달렸지만 밤이 되도록 의창(宜昌)에 도달하지 못했다. 관도의 옆에 이름 모를 야산을 본 관백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문주님. 오늘은 야숙을 해야 할 듯한데 저기서 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휴우.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아.”

척 보기에도 묘지로 보이는 산을 보며 유세운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곳을 제외하고는 쉴 만한 곳조차 보이지 않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야산에는 묘비조차 없는 무덤들이 이곳저곳에 놓여 있었다. 유세운은 한숨을 내쉬고는 공터를 찾아 말을 몰았다.

나무 들 사이로 반경 일장 정도 되어 보이는 자그마한 공터를 찾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관백은 말에서 내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문주님. 먹을 것을 구해 오겠습니다.”

관백의 말에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군.”

유세운은 말에서 내려서 고삐를 잡고 공터를 둘러싼 나뭇가지에 묶어 놓았다. 관백과 동무벽도 말을 묶어 놓고는 곧장 신형을 움직여 음식을 구하러 갔다. 유세운은 혼자 남아 할일이 없자 주변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들을 모았다.

반각도 되기 전에 하룻밤 새 때워도 될 만큼의 나뭇가지들을 주워 모았다. 유세운은 나뭇가지들을 공터의 중심에 모아놓고 장력을 날려 작은 구덩이를 만들었다. 나뭇가지들을 구덩이에 집어 넣고는 삼매진화(三昧眞火)를 일으켜 불을 붙였다. 작은 나뭇가지들이라 삽시간에 불이 붙었다.

“흐음. 따뜻하군.”

가을도 깊어져 이제는 제법 바람이 쌀쌀했다. 유세운은 한숨을 내쉬며 모닥불 가에 앉았다. 혼자 있으려니 백연혜 생각이 물밀 듯이 들었다.

“빨리 해결하고 돌아가야겠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누군가 공터로 다가오자 유세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무 숲을 해치고 나타난 동무벽이 입가에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하하. 문주. 먹을 것 구해왔소.”

동무벽의 손에는 덩치에 맞지 않게 자그마한 토끼 세 마리가 들려 있었다. 유세운은 동무벽의 덩치와 너무나 안 어울린다는 생각에 웃음을 터트렸다.

“푸훗. 토끼 잡느라 고생했겠네.”

“뭐요? 쳇! 이런 야산에 이정도 잡아온 것 만해도 감지덕지해야 할 거요.”

“그런가?”

유세운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 관백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자네 그게 뭔가? 덩치에 안 맞게.”

요란하게 부스럭대며 공터로 들어오는 관백을 보고 동무벽의 인상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이런! 그런 놈을 어떻게……”

관백의 오른쪽 어깨에는 멧돼지 한 마리가 들쳐 매져 있었다. 관백은 멧돼지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웃음 지었다.

“잠자고 있던 놈을 용케 발견했거든.”

“크윽! 어쩐지!”

유세운은 억울해하는 동무벽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됐으니 일단 요리나 하지.”

유세운의 말에 동무벽은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서 있는 나무를 도로 내리쳤다. 몇 번의 칼질에 기다란 꼬챙이 하나가 순식간에 만들어 졌다.

관백은 토끼에게 맞을 만한 크기의 나뭇가지를 잘라내며 웃음 지었다.

“앉아서 쉬시죠. 저희가 한 이십년 정도 산 생활을 했더니 이런 거에 익숙합니다.”

“좋아.”

유세운은 밝게 웃음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어느새 동무벽은 받침대까지 만들어서는 불가에 꽂아 놓았다. 관백은 멧돼지와 토끼를 들고 근처 개울을 찾아 나갔다. 유세운은 동무벽을 바라보며 물었다.

“혈천문 때문에 피해있던 거야?”

“그 얘긴 하지도 마쇼. 으. 그때 고생한 걸 생각하면……”

“그런데 왜 혈천문이랑 싸운 거야?”

동무벽은 유세운을 쏘아 보며 관백이 잘라놓은 나뭇가지들을 다듬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소.”

“그래?”

유세운은 치밀어 오르는 궁금증을 어떻게 해결할까를 고민했다. 하지만 답은 금세 나왔다. 멧돼지와 토끼의 내장을 씻고 돌아오던 관백이 대답 했다.

“별거 아닙니다. 당시 혈천문주가 결혼한 여인을 무벽이 좋아했거든요.”

“관가야!”

버럭 소리를 지르며 얼굴을 붉히는 동무벽을 보며 유세운은 미소를 지었다.

“그럴 수도 있는 걸 가지고 숨기려고 했단 말야?”

“쳇!”

동무벽은 관백이 가져온 멧돼지와 토끼를 꼬챙이에 꽂으며 딴청을 부렸다. 관백은 물끄러미 동무벽을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그 여자도 알았을 겁니다. 혈천문에 비해서는 우리 천풍쌍기도 빛을 잃는 다는 것을요. 욕심이 조금 많은 여자였거든요.”

“흐음. 하긴 육대세력의 한곳인 혈천문의 문주 아내로 들어간다면……”

꼬챙이를 받침대에 올리던 동무벽이 작게 중얼거렸다.

“본부인도 아닌데 무슨……”

“엥?”

놀라는 유세운을 향해 동무벽은 눈을 부라렸고 관백이 미소 지었다.

“그런 문제로 저희는 혈천문주의 눈 밖에 날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보낸 것이 혈겸천사대였습니다. 그게 그들의 실수였죠.”

“왜?”

“혈마단(血魔團)을 보냈다면 저희는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혈겸천사대에 비해 강한가 보군.”

“그런 편이죠.”

관백은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면서 작은 소도를 꺼냈다. 손잡이는 때에 절어 있었지만 날은 잘 벼려져 있었다. 관백은 동무벽이 꽂아놓은 고기에 칼집을 내면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둘 다 적어도 혈천문에서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만큼의 고수가 되어 돌아오기로 했죠.”

“하긴 선환과 도환의 고수라면 섣불리 건들지는 못하겠지.”

“예. 자신감이 가득 차서 다시 강호로 돌아왔죠. 나름대로 누구 못지않게 강하다고 그리고 둘이면 누구라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유세운은 씁쓸하게 웃었다. 천하에 당할 자가 없을 거라고 좋아하며 내려와 첫 상대에게 당해 하지도 않던 호법 생활을 하려니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닐 것 같았다.

관백은 유세운의 생각을 읽고는 말을 이었다.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그래도 약간은 미안하군.”

“미안하기는 무슨……”

아직도 투덜거리고 있는 동무벽을 보고 유세운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긴 동호법 하는 꼴을 보면 별루 미안하다는 생각도 안 들어.”

“크윽!”

동무벽은 이를 갈며 유세운을 쏘아 보았다. 유세운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반경 일장 밖에 안 되는 공터인지라 보이는 밤하늘도 그만큼 밖에 보이지 않았다.

구수하게 토끼고기가 구워지는 냄새와 멧돼지고기의 털을 그슬리는 냄새가 노릿하게 났다. 자그마하게 보이는 밤하늘을 유성(流星)이 반으로 가르며 지나갔다.

“앗!”

유세운은 유성을 보고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옆에 앉아 있던 관백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방금 별이 지나가는 것 봤어요?”

관백은 유세운의 말에 유성을 말하는 것임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유성을 보신 모양이군요.”

“유성? 음. 하여튼 무지하게 빠르군요.”

“물론입니다. 유성은 사람들이 가장 빠른 것으로 꼽기도 하지요.”

관백의 말에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척 보기에도 무척이나 빨랐다. 나타났다 싶은 순간 사라졌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빠르면서도 어떻게 눈에 보였을까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눈에 보이는 순간부터 유성의 궤적을 알았기 때문에……’

유세운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답은 그것 밖에 없었다. 이미 유성이 움직일 방향을 알았기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유성보다 빠른 것은 마음이었다.

“그래! 그거야!”

토끼가 구워져 고기를 건네주려던 동무벽은 인상을 확 구겼다.

“뭐가 그거라는 거요?”

“유성을 눈으로 볼 수 있었던 이유!”

“아니 지금 장난하는 거요? 눈에 보이니까 있는 줄 아는 거 아니오?”

“응?”

유세운은 동무벽이 아무렇지 않게 던진 말에 멈칫했다. 눈에 보이기에 있는 줄 안다는 말이 뭔가 귀에 거슬렸다. 다시 생각에 잠긴 유세운을 보며 동무벽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

유세운은 손뼉까지 치며 좋아했다. 은태정이 자신에게 섬광마멸지를 전수해 줄 때의 모습이 생각났다. 미약한 지풍도 나오지 않았건만 커다란 바위에 광오곡이라고 새겨지던 모습. 눈에 보이지도 않았건만 일어난 일.

의기상인(意氣傷人).

심검의 진정한 오의라고 했던 말도 같이 떠올랐다. 마음으로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경지. 유성을 보고서야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 유세운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동무벽은 퉁명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뭐가 그리 좋은 거요?”

유세운은 동무벽의 손에 들린 토끼고기를 낚아채며 입을 열었다.

“사부님이 얘기해주던 경지를 직접 알게 됐으니까.”

“무광 노선배님이 무슨 얘기를 해주신 거요?”

항상 투덜거리는 동무벽이었지만 무인은 무인. 전대의 천하제일인이 얘기 한 무리(武理)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세운은 기분 좋게 토끼의 다리를 뜯어먹으며 말했다.

“의기상인.”

“의기상인? 그건 전설에나 가능한 경지 아니오?”

“아니. 심검의 오의라고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관백이 심각한 표정으로 답하자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의기상인을 깨우쳐야만 진정한 심검에 들었다고 볼 수 있지.”

“그렇다면?”

혹시 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동무벽을 향해 유세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줬다. 유세운은 손가락을 들어 공터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의 나무를 가리켰다.

“내가 배운 무공 중 하나인데. 섬광마멸지라고 하지.”

퍼퍼퍽.

유세운은 고기를 뜯으면서 방금 깨달은 섬광마멸지를 발출했다. 유세운을 바라보던 동무벽과 관백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아무리 지켜보아도 지풍이 날아가는 모습이나 소리조차 나지 않았건만 나무에는 계속적으로 구멍이 뚫리고 있었다. 유세운은 입에 물고 있던 고기를 삼키며 대답했다.

“고금제일지법이라고 불릴 만한 무공인데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이 있었거든. 그 오의는 역시 사부님 말대로 의기상인에 있었어.”

유세운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방금 유성이 떨어지는 것을 봤어. 정말 순간이었지.”

관백과 동무벽은 토끼고기를 먹을 생각조차 못하고 유세운을 바라만 보았다. 유세운은 토끼 다리를 찢어 입에 넣으며 말을 이었다.

“우움. 그러니까 말이지. 가장 빠르다고 알려진 유성을 볼 수 있다는 것에 의문이 가더란 말야.”

동무벽과 관백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유세운은 그런 그들의 표정에 아랑곳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 이유가 말야. 쩝. 내 마음은 이미 그것이 움직일 곳을 알고 있었단 말이지. 그렇다면 가장 빠른 것은 마음 아니겠어?”

“헉!”

놀라 숨까지 막히는 지 동무벽은 토끼고기를 땅에 떨어트렸다. 유세운은 동무벽을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그리고 동호법의 말이 맞아. 눈에 보이니까 있는 줄 안다는 것. 하지만 사부님이 보여 주었던 섬광마멸지는 눈으로 볼 수 없었어. 알 수 있는 건 결과뿐이었으니까. 의기상인. 이미 눈으로 볼 수 없는 경지야.”

“흐음.”

관백조차 말을 잊고 유세운의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유세운은 관백과 동무벽을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뭐 개과의 길을 열어준다고 호법으로 삼기는 했지만 미안한 감도 없지 않으니 생각나는 대로 무리를 가르쳐 줄게. 막히던 부분 같은 것은 물어봐.”

“감사합니다.”

“알겠소.”

관백과 동무벽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유세운에게 감사해했다. 유세운은 고개를 들어 조그맣게 보이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만큼 밖에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도 그런 이치를 알 수 있는 걸 보면 영호형님의 말이 맞아. 모든 자연에서는 배울 것이 있다는 말……”

혈천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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