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혈천문(血天門)
곧게 뻗어있는 관도를 달리는 세 마리의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다. 가장 선두를 달리는 갈색 말을 타고 있던 유세운은 동무벽의 부름에 말의 속도를 늦췄다.
“문주!”
유세운은 천천히 말의 속도를 늦추며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동무벽은 자신의 말을 멈추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요?”
유세운은 뭘 물어보냐는 투로 동무벽을 바라보았다.
“어디로 가긴 어디로 가. 철마성으로 가는 길이지.”
며칠 전부터 편하게 말을 놓기로 한 유세운은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동무벽은 자신의 고슴도치 같이 뻗어 나온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철마성으로 가려면 아까 갈림길에서 우측 길로 가야 했는데……”
동무벽의 말에 유세운은 잠시 멈칫했다. 갈림길이 나왔을 때 잠시 주저했지만 그냥 직진하다 길을 잘못 든 것 같았다. 유세운은 동무벽의 얼굴에 설마 하는 표정이 그려지는 것을 보고는 황급히 변명했다.
“아…악양(岳陽)에 좀 들렸다 가려고 그러는 거야.”
“악양에 말입니까?”
관백의 질문에 유세운은 자기가 생각해도 참 말을 잘 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응. 악양에 친구가 있어. 가는 길에 만나보려고.”
동무벽은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않은 채 유세운을 바라보았다.
“악양으로 간다면 이 길이 맞기는 하지만……”
“흠. 당연하지.”
관백은 동무벽과 유세운을 번갈아 보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관백의 백마가 앞으로 걸어 나갔다.
“문주님. 그럼 저희가 앞장서겠습니다.”
“응? 그…그래.”
유세운이 길을 비켜주자 동무벽은 의심의 눈초리를 계속 보내며 그의 옆을 지나갔다. 유세운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동무벽의 뒤통수를 쏘아보았다.
‘그것 참 길 한번 잘못 들었다고 쏘아보기는… 그냥 콱!’
동무벽은 천천히 말의 걸음을 옮기면서 뒤통수를 긁적였다. 왜인지 오싹한 기운이 느껴졌다.
“잠깐!”
유세운은 동무벽과 관백의 말을 멈추게 했다. 동무벽은 귀찮다는 투로, 관백은 의아한 눈빛으로 유세운을 돌아보았다. 유세운은 자신의 말을 앞으로 몰아가며 작은 목소리로 주의를 줬다.
“뭔가 이상해.”
“무슨 말씀이신지?”
관백은 유세운의 말에 주변을 돌아보았다. 쭉 뻗은 관도와 의심이 가는 부분이라면 주변의 숲 뿐. 하지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유세운은 입가에 가는 미소를 지었다.
“우리보다 먼저 이곳을 지나간 자들이 있는데?”
“뭔 말하는 거요?”
동무벽은 앞으로 나서다가 유세운이 가리키는 곳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말의 발목 높이에 쳐져 있는 천잠사(天蠶絲). 대낮이라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았다. 동무벽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어떤 놈이냐! 비겁하게 굴지 말고 나와!”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동무벽을 향해 유세운은 손을 흔들었다. 동무벽은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계속해서 소리를 내질렀다.
“안 나와? 다 부셔버리기 전에 나와!”
유세운은 한숨을 내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막 주먹을 휘둘러 시끄러운 동무벽을 잠재우려는 순간 관백이 침착하게 말을 걸었다.
“지금 달려오는 무리일까요?”
유세운은 호흡을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앞쪽에서도 그리고 뒤쪽에서도 달려오고 있는데 숫자가 제법 되는 것 같아.”
유세운의 말에 동무벽도 조용히 앞과 뒤를 바라보았다. 쭉 뻗어 있는 관도의 앞뒤로 구름먼지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동무벽은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음 지었다.
“어떤 놈들인지 모르지만 잘못 건드렸다는 것을 알게 해주지.”
유세운은 고개를 흔들고는 지풍을 날려 가로막고 있는 천잠사들을 잘랐다.
팅. 팅.
관백은 천잠사를 가볍게 지풍만으로 자르는 것을 보고 유세운을 다시 봤다. 물론 심검에 든 고수를 처음 보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의 능력은 자신들이 아는 것보다 한참 위에 있는 것만 같았다.
유세운은 천잠사를 다 자르고는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무리들을 기다렸다.
반각이 지나기 전에 붉은 핏빛의 혈겸을 등에 매고 전신을 핏빛의 혈의로 가린 무리들이 그들 앞에서 말을 멈춰 세웠다. 뒤에서 오던 무리도 같은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유세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왜 왔는지 짐작이 갔다.
대략 삼백여 명의 혈겸을 맨 사내들에게 둘러싸이자 관도에는 피할 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혈겸의 사내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등 뒤로 커다란 두개의 혈겸을 교차해서 매고 있는 자가 앞으로 나섰다. 한쪽 눈가에 길게 찢어진 흉터가 있어 그의 얼굴을 더욱 위협적으로 보이게 했다. 그자는 동무벽을 보며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네놈이냐? 감히 혈겸천사대에게 칼질을 한 놈이?”
동무벽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를 바라보다가 파안대소했다.
“푸하하하하. 이게 누구냐?”
동무벽의 웃음에 흉터의 사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냐? 단순히 미친놈인 거냐?”
“갈!”
동무벽의 일갈에 혈겸의 사내들이 타고 있던 말들이 한걸음씩 뒷걸음질을 쳤다. 동무벽은 기세를 피워 올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쌍혈단악(雙血斷岳) 편호익! 네놈이 정녕 내가 누군지 모른단 말이냐?”
동무벽의 말에 편호익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청삼에 고슴도치 같은 수염. 그리고 구척에 달하는 덩치에 한눈에 알아볼만한 보도……설마?”
편호익은 생각하기 싫은 이름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참풍마도 동무벽?”
“푸하하하. 아직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구나!”
동무벽의 웃음소리에 편호익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이십 년 만이군.”
동무벽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로 편호익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은 네가 혈겸천사대장인가 보지?”
동무벽의 물음에 편호익은 등 뒤에 매고 있는 쌍겸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그럼 저자는 관백인가?”
“당연한 말을 묻는군.”
편호익은 쌍겸을 양손에 쥐고서는 이를 갈았다.
“이십 년 전에 잘도 도망갔겠다!”
유세운은 편호익의 말에 관백에게 물었다.
“지금 무슨 말들을 하고 있는 거야?”
관백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십 년 전에 한번 크게 혈천문과 싸움이 벌어진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전대 혈겸천사대장을 무벽이 베었었지요.”
관백의 말에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꽤나 힘든 싸움이었나 봐.”
“예. 당시 혈겸천사대원 중 이백여 명의 추격에서 간신히 빠져 나왔었습니다.”
“흠.”
동무벽은 편호익의 쌍겸을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만 물러가라.”
“흐흐흐. 웃기는 소리하고 있군. 그 때에도 도망가기 급급했던 자가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동무벽은 편호익을 보며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네놈 실력으로는 열명이 와도 부족하니 물러가라.”
“흐흐흐. 이십년 간 내가 놀고 있었는지 아는가 보지? 전대 혈겸천사대장의 실력은 예전에 넘어섰다.”
동무벽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도를 움켜쥐고 유세운을 돌아봤다.
“문주. 처리해도 되겠소?”
유세운은 동무벽의 물음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죽이지만 마시오.”
“죽일 필요도 없는 것 같소.”
동무벽은 천천히 도를 뽑아 들었다. 편호익은 오른 손을 들어 혈겸으로 유세운을 가리키며 물었다.
“문주? 무슨 말이냐? 천풍쌍기가 누구 밑에 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동무벽은 씁쓸히 웃으며 답했다.
“그래. 그런 말은 나도 들어보지 못했었다.”
동무벽의 말이 앞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동무벽은 도를 들어 편호익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지금이라도 오른 팔을 자르고 간다면 용서해주마.”
“크크크. 이거 완전히 미친놈이군. 예전에도 느낀 거지만 너희 천풍쌍기는 제정신이 아니었어.”
동무벽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항상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은 너의 그 어리석은 세치 혀라는 것을 명심해라.”
“웃기는 소리 하고 있군.”
동무벽은 주저 없이 말 등을 박차고 오장 거리를 날았다. 벼락처럼 짓쳐드는 동무벽의 기세에 편호익은 자신의 쌍겸을 휘둘렀다.
장병(長兵)의 이점을 이용한 공격이 펼쳐졌다. 사방을 에워싸며 혈광을 번뜩이는 혈겸을 보고 동무벽은 코웃음을 쳤다.
“늘었다는게 고작 이 정도냐?”
동무벽의 도가 네 번 허공을 베었다. 편호익의 혈검이 뻗어가는 맥을 대번에 자르며 동무벽은 자신의 거리로 들어섰다. 편호익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동무벽은 편호익의 말 머리 위에 내려서서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게 지금 너와 나의 차이다. 영원히 따라 잡을 수 없는 차이지.”
서걱.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편호익의 오른 팔이 떨어져 나갔다.
“크아아악!”
비명을 내지르며 편호익의 왼손에 들린 혈겸이 동무벽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동무벽은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아직도 모르겠나?”
동무벽은 도를 내저어 편호익의 혈겸을 밖으로 쳐내며 코웃음을 쳤다. 혈겸을 처낸 도는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편호익의 목을 겨눴다. 편호익의 목에 겨누어진 동무벽의 도에서는 피가 방울져 떨어져 내렸다. 편호익은 우측어깨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 때문인지 안색이 창백해졌다. 왼손의 혈겸을 내려놓고 지혈을 하는 편호익을 보며 동무벽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만 길을 비켜라.”
“크크크. 웃기는 소리마라. 고작 내 목숨을 잡았다고 너희를 놔 줄 것 같으냐? 너희는 이미 이십년 전부터 혈천문의 살생부에 이름이 올라가 있다.”
“그래? 하지만 지금의 네 목숨을 바치면서 까지 지켜야 할까?”
“물론이다! 쳐라!”
편호익의 일갈에 혈겸천사대 삼백의 인물이 일제히 말 등을 박차고 날아오르려고 했다.
“갈!”
유세운의 일갈에 담긴 내력에 혈겸천사대 삼백의 인물이 멈춰섰다. 유세운은 천천히 앞으로 말을 몰아나가며 내력을 담아 소리쳤다.
“감히 누구에게 칼을 뽑는 것이냐?”
유세운의 말에 편호익은 창백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코웃음을 쳤다.
“크크크. 건방지게 나서는 네놈은 누구냐?”
유세운은 편호익을 한번 바라보고는 혀를 찼다.
“쯧쯧. 꼭 자신의 위치를 파악 못하는 멍청한 녀석들이 대장을 맡으면 밑에 부하들이 고생이지.”
“뭐야!?”
편호익이 소리치는 것을 본 동무벽은 귀찮다는 듯이 칼등으로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
빠악!
“크아악!”
대번에 이가 다섯 개 정도 부서져 나가며 편호익의 입에서도 피가 튀었다. 혈겸천사대 인물들의 두 눈에서 살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유세운은 태연히 말을 몰아 편호익의 옆으로 다가가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삼백여 명의 살기어린 눈빛을 받으며 유세운은 소리쳤다.
“난 광오문의 문주인 유세운이다.”
유세운의 말에 혈겸천사대 인물들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유세운?”
“일권무적 유세운?”
“광오문의 문주라고 하던데……설마 그 유세운?”
유세운은 편호익의 얼굴을 바라보며 마저 말을 이었다.
“지금 혈천문에서 광오문에 시비를 거는 것인가?”
유세운의 내력과 말 한마디마다 내비치는 자신감에 혈겸천사대원들은 말을 조금씩 뒤로 물리기 시작했다. 단신으로 철탑백마인을 해치웠다는 소문은 이미 전 강호에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다. 철탑백마인 전원이라면 혈겸천사대 오백으로도 막기 힘든 전력이다. 그들이 뒤로 물러나자 편호익의 얼굴에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다시 한번 묻지. 지금 혈천문에서 광오문에 시비를 거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쩔 거냐?”
유세운은 턱을 쓰다듬으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네가 결정할 위치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철마성과의 일이 끝나는 대로 혈천문을 찾아가야지. 시비에 대한 대가는 작지 않을걸?”
유세운의 여유 있는 말투에 편호익의 인상은 더욱 찌푸려졌다. 자신도 알고 있었다. 유세운의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님을. 그리고 자신이 그걸 결정할 위치에 있지도 않음을. 편호익은 이를 갈았다.
“두고 봐라. 혈천문에서는 결코 이번 일을 잊지 않을 거다.”
유세운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적으로 돌아서겠다면 그렇게 해라. 단!”
유세운은 혈겸천사대 인물들을 훑어보며 천천히 말을 뱉었다.
“이 시간 이후로 내 눈에 띄는 모든 혈천문의 인물들은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유세운의 말과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에 혈겸천사대원들의 말들이 미친 듯이 뒷걸음질 쳤다.
히히힝.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는 혈겸천사대원들을 바라보던 유세운은 동무벽을 향해 명령했다.
“동호법. 그를 놓아주시오.”
동무벽은 편호익의 말 머리에서 뛰어내려 자신의 말로 걸음을 옮겼다. 동무벽이 말에 오르는 것을 본 유세운은 편호익을 한 번 바라보고는 말의 걸음을 옮겼다.
유세운의 말이 앞으로 걸어 나오자 혈겸천사대원들이 양쪽으로 길을 내주었다. 유세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천천히 혈겸천사대원들이 만든 길을 지나갔다. 동무벽과 관백이 따라 그들을 지나칠 때에도 그들은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혈천문(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