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조예림은 갑작스레 안색이 나빠진 헌원옥을 보고 의아해 했다.
“왜 그러세요?”
헌원옥은 시녀가 차를 가져오는 것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향원정의 난간으로 걸음을 옮긴 그녀는 시녀가 차를 놓고 가서야 조예림을 바라보며 물었다.
“현영검 유청운을 말하는 거야?”
조예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헌원옥은 난간에 뛰어올라 앉았다. 가볍게 다리를 휘저으며 헌원옥은 조예림을 바라보았다.
“보니까 어떤 거 같아?”
“예?”
조예림이 당황해서 되묻자 헌원옥은 귀찮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유청운이라는 사람 말야.”
“아!”
조예림은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를 머금었다.
“뛰어난 분이시더군요.”
조예림의 말에 헌원옥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런 상투적인 표현은 필요없다구.”
“아니요. 실력만 놓고 본다면 삼룡삼봉 못지않을 것 같던데요.”
“뭐야?”
버럭 소리를 지르는 헌원옥을 보며 조예림은 가뜩이나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떴다. 헌원옥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더니 코웃음을 쳤다.
“웃기지 말라구. 예전에 한번 겨루었던 적도 있는걸.”
조예림은 헌원옥의 말을 듣고는 찻잔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지금 그의 성취는 놀라울 정도에요.”
헌원옥은 양볼을 부풀리며 다리를 더 빠르게 흔들었다.
“왜 다들 그의 이야기지?”
헌원옥의 말에 조예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가 또 그의 이야기를 하던가요?”
헌원옥은 사뿐 난간에서 내려오며 투덜거렸다.
“됐어.”
조예림은 헌원옥의 표정을 보고 누가 그의 이야기를 했는지 어렴풋이 알아채고는 미소 지었다. 헌원옥은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중얼거렸다.
“한번 만나봐야겠어.”
해가 서서히 저물어 가는 시간. 연무장은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유청운은 어제 옷을 벗어 던진 채 수련을 하다가 낭패를 당한 것을 생각하고는 간편한 청색 무복을 입은 채 수련을 시작했다.
검을 들고서 호흡을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던 유주란은 투덜거리며 연무장을 나갔다.
유청운은 천천히 현류십삼검을 펼쳐보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뻗어나가는 검로를 보며 어느 정도 유세운이 말한 경지에 다가간 것 같았다. 하지만 미처 현류십삼검을 펼쳐보기도 전에 연무장에 들어서는 인기척을 느끼고 검을 거두었다. 고개를 돌려 연무장 입구를 바라보던 유청운은 흠칫 놀랐다.
붉게 물든 연무장을 가로지르는 여인. 두 개의 단창을 등 뒤로 교차해 매고, 용이 그려져 있는 갈색 무복을 입은 여인이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유청운은 순간 자신이 요즘 들어 너무 수련을 열심히 했나 싶었다. 승천단창 헌원옥이 이런 별궁의 연무장에 마치 자신에게 용무가 있다는 듯이 다가오고 있으니 말이다.
헌원옥은 검을 들고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유청운을 바라보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대체 저자가 뭐라고 백오라버니는 그런 부탁을 한거지?’
유세운이 없다는 것을 알고 짜증이 치밀어 오를 때 은근한 목소리로 부탁한 것이 고작 유청운과 한번 비무를 해보라는 말이었으니 오죽이나 속이 상했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기억 속의 유청운은 검의 의지를 깨닫지도 못한 이류무사 정도 밖에 되지는 않았었다. 처음 대결은 호기심이었지만 그것은 곧 실망으로 이어졌었다.
헌원옥은 유청운의 앞 삼장 거리까지 다가가 걸음을 멈추었다.
“오랜만이군요.”
유청운은 헌원옥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지금 석양 속을 걸어오는 여인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유청운은 황급히 포권을 취했다.
“오랜 만에 뵙는군요.”
황급히 포권을 취하는 유청운의 모습에 헌원옥은 속으로 혀를 찼다. 대체 이런 남자의 어디가 자신이 겨루어 볼 만하다는 것인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헌원옥은 모든 게 귀찮게 느껴졌다. 단숨에 유청운을 꺾어 백연문과 조예림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헌원옥은 말없이 단창을 하나 뽑아 들었다.
유청운은 첫마디를 나누자마자 단창을 뽑아드는 헌원옥을 당혹스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헌원옥은 단창으로 유청운의 가슴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동안 얼마나 늘었는지 볼 수 있을까요?”
헌원옥의 말에 유청운은 처음 자신을 만난 날의 그녀를 떠올렸다. 다짜고짜 비무를 신청하던 그 모습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 했다. 석양의 붉은 빛은 그녀의 얼굴에서 더욱 아름다운 빛을 내는 것 같았다. 유청운도 천천히 검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잠깐만요.”
연무장의 입구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헌원옥과 유청운은 의외라는 듯 소리친 여인을 바라보았다.
청색의 면사와 시원한 이마에 커다란 눈에 눈웃음을 머금고 걸어오고 있는 여인은 청수성의 조예림이었다.
헌원옥은 살며시 미간을 좁혔다.
“여긴 무슨 일이니?”
조예림은 여전히 눈웃음을 지은 채 헌원옥과 유청운의 사이에 멈춰 섰다.
“비무라면 공증인이 있어야 하잖아요.”
헌원옥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무슨 생각인거야?)
조예림은 헌원옥의 전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그냥 유공자의 검을 직접 보고 싶다고 해두죠.)
(흥. 어디 펼칠 수나 있을 것 같아?)
(글쎄요.)
조예림은 눈웃음을 지으며 유청운을 바라보았다.
“제가 공증인을 서도 되겠지요?”
조예림의 말에 유청운은 당황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헌원옥은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젓고는 유청운을 향해 말했다.
“신경 꺼도 될 거에요.”
“괜찮습니다.”
헌원옥은 유청운이 다시 검을 들고 호흡을 가다듬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습게 알고 있었지만 호흡을 가다듬고 자신 앞에서 기세를 가다듬는 모습을 보자 예전 보다는 확실히 실력이 는 것 같았다.
유청운은 헌원옥을 보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선수(先手)를 양보하겠습니다.”
헌원옥은 유청운의 말에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자신이 먼저 공격을 한다면 과연 검을 펼칠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주저하지 않고 삼장의 거리를 짓쳐 들어갔다.
삼초로 승부를 결할 마음을 먹고 처음부터 강공으로 나갔다.
“천룡오연격!”
쌍창이 아닌 하나로 펼치는 거라 위력이 반감되기는 했지만 이것만으로도 수많은 고수들이 무릎을 꿇었었다.
유청운은 헌원옥이 펼치는 천룡오연격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 헌원옥에게 패했던 초식이었다. 미처 다섯 방위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무릎을 꿇었던 것이 기억이 났다. 하지만 지금은 천룡오연격의 방위가 모두 한눈에 들어왔다.
‘고맙소. 영호대협.’
영호천과의 수련과 유세운과의 수련, 패력구 곡칠과의 결전에서 익힌 경험이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것 같았다.
유청운의 검이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이 흐르는 듯 움직이며 헌원옥의 단창의 궤도를 모두 밖으로 밀어냈다.
차차차차창.
유청운은 헌원옥의 눈이 커다랗게 떠지는 것을 보며 한걸음 앞으로 달려들었다.
헌원옥은 자신의 천룡오연격이 이렇게 쉽게 막힐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비무를 청하는 버릇 때문이지만 그동안의 실전경험에 따라 주저 없이 뒤로 몸을 빼며 나머지 단창을 뽑아들었다.
유청운의 검이 느리지만 부드럽게 뻗어 오는 것이 보였다.
‘이게 진정한 현류십삼검?’
헌원옥은 천룡문의 비룡보(飛龍步)를 펼쳐 좌측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청운은 마치 헌원옥이 사라지듯 빠른 움직임을 보이며 자신의 우측에 나타나자 검의 흐름을 틀었다.
헌원옥은 자신을 뒤쫓아 오는 검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도 모르게 피어오른 미소였다. 일초는 유청운을 경시하는 마음에 손해를 보았지만 아직 자신은 본신의 능력을 다 보이지 않았다.
“천룡풍원강(天龍風圓罡)!”
헌원옥의 쌍창이 원을 그리며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 갈색의 강기가 형성되자 조예림은 당황했다.
‘비무에서 강기를 펼치면 위험 할 텐데……’
유청운이 첫수를 가볍게 제압하는 것을 보고 어쩌면 이길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헌원옥이 바로 최선을 다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그가 다치기 않기나 바라야 할 것 같았다. 헌원옥이 유청운과 비무를 하려는 것을 알고서는 그녀의 실력이 궁금해서 와보기는 했지만 누가 다치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유청운은 헌원옥이 최선을 다하자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는 헌원옥의 본신 실력을 볼 수 있을 위치까지 왔다는 생각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유청운은 뻗어가던 검을 거두며 하늘 높이 검을 치켜들었다.
현류십삼검에는 부드러움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후반 사 초식에는 강맹한 기운이 깃들어 있다. 유청운은 갈색의 강기를 보며 자신을 향해 다짐을 하듯 말했다.
‘곡칠의 패력구에 비하면 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현류직하(玄流直下)!”
유청운의 검에서 검은 기운에 감싸인 검강이 치솟아 올랐다. 헌원옥과 조예림의 입에서 경탄이 세어 나왔다.
“검강?”
헌원옥은 낙뢰가 떨어지듯 하늘을 가르며 내려오는 유청운의 검을 보고 천룡풍원강의 내력을 배가 시켰다.
콰쾅!
연무장이 흔들리는 것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굉음과 함께 둘의 신형은 뒤로 튕겨 나갔다.
헌원옥은 기가 막혔다. 방금 한 수는 동수를 이루었다. 뒤로 물러난 거리나 태연한 기색으로 서 있는 유청운을 보니 저도 모르게 화가 치솟았다.
헌원옥은 유청운을 향해 비룡보를 펼쳤다. 근거리에서는 천하의 모든 보법 중 수위를 다투는 보법이다.
유청운은 헌원옥의 신형이 흔들리며 자신을 향해 쏘아져 오자 저도 모르게 삼검을 찔렀다.
“현요삼검(玄妖三劍)!”
세 방향을 점하고 뻗어가는 검기에 헌원옥은 부득불 쌍창을 내뻗었다. 좌우에서 뻗어가는 헌원옥의 쌍창에서 천룡오연격이 뿜어져 나왔다.
차차창!
현요삼검을 가볍게 쳐내고도 뻗어가는 단창을 유청운은 검으로 걷어내고 한걸음 다가갔다. 헌원옥도 한걸음 더 앞으로 나오며 아래에서 위로 창을 내뻗었다. 유청운의 검도 밑에서 위로 치켜 올라갔다.
“천룡승천강(天龍昇天罡)!”
“현룡승천(玄龍昇天)!”
코앞에서 펼쳐진 두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듯한 무공은 석양이 지는 하늘로 뻗어 올라갔다.
헌원옥은 전혀 득을 보지 못했음을 알고 왼손의 단창으로 유청운을 찔러갔다. 하지만 하늘로 치켜 올라갔던 검이 호선을 그으며 내려와 단창을 막아냈다.
창!
헌원옥의 입가에는 저도 모르게 미소가 그려졌다. 유세운이라는 자를 만나도 이렇게 마음껏 기량을 펼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스치듯 들었다. 백연문을 애타게 만나고 싶어 했던 것도 검으로 얘기하는 것을 무엇보다 좋아하는 자신의 성격 때문이었다.
헌원옥의 쌍창이 강기를 머금지 않고 근거리에서 빠르게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차차차창!
유청운은 흔들림 없이 현류십삼검의 검로를 따라 검을 뻗어가며 현란한 헌원옥의 공격을 막아냈다.
헌원옥은 상대의 호흡이 느껴질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서 쌍창을 내뻗으며 유청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자신의 쌍창을 막아내는 그를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미소를 그렸다. 하지만 승부는 승부.
“하앗!”
천룡오연격이 뻗어 나갔다.
차차차차창.
워낙 근거리에서 펼쳐진 천룡오연격이라 유청운도 반격의 기회는 잡지 못하고 막아내기만 했다.
비룡보를 펼치며 뒤로 삼장 가까이 물러난 헌원옥은 자세를 낮추었다. 아직껏 비무에서는 단 한번도 펼쳐보지 않은 무공이었다. 천룡문 문주에게만 전해 내려오는 비기를 처음으로 써보고 싶었다. 과한 기대인지 모르지만 왜인지 그라면 받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 칠성(七成)밖에 이루지 못했지만 자신의 어떤 무공보다 강하다고 자부했다.
왼발이 앞으로 나가고 왼손에 들린 단창이 살며시 땅에 닿았다. 오른 손에 들린 단창은 유청운을 향해 석양의 붉은 빛을 반사했다.
유청운은 헌원옥의 자세만을 보고도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는 공격이 펼쳐질 것을 예감했다. 유청운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검을 다시 검집에 꽂아 넣었다.
헌원옥의 두 눈에 의혹이 깃들었다. 비무 중에 검을 거두다니.
하지만 유청운이 오른 발을 앞으로 내밀며 자세를 낮추는 것을 보고 비무를 포기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헌원옥의 입가에 미소가 어리며 전신의 내력을 끌어올리려는 찰나 유청운을 가리며 시야를 막는 인영이 보였다.
“뭐야!”
버럭 화를 내는 헌원옥을 향해 조예림은 소매에 가리고 있던 손을 내보이며 웃음 지었다.
“두 분 다 그만하세요. 지금 펼치려는 초식은 결코 비무 수준에서 나올 무공이 아니에요.”
헌원옥은 조예림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왜인지 무척이나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더욱이 조예림이 소매에 가리고 있던 손을 보니 힘이 쭉 빠졌다. 청수혼원장을 팔성(八成)이상 익혀야만 나타나는 증상인 푸른 손이 보였다.
‘역시 의술만 파고 있는 건 아니었군.’
헌원옥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일어섰다. 쌍창을 다시 등에 매고는 유청운을 향해 웃음 지었다.
“호호호. 정말 재미있는 비무였어요.”
“손속에 사정을 두셔서 감사합니다.”
포권을 취하는 유청운을 향해 헌원옥은 마주 포권을 취하며 대답했다.
“아니요. 하지만 못다한 비무는 다음에 마저 하도록 하죠.”
“예.”
헌원옥은 스러져가는 저녁 해를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돌려 연무장을 벗어났다. 유청운은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조예림은 그런 유청운을 향해 눈웃음 지었다.
“정말 대단한 실력이시네요. 창천궁에 와보길 잘 한 것 같아요.”
“과찬의 말입니다.”
당황하며 대답하는 유청운을 바라보다가 조예림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헌원옥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유청운은 두 여인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남색의 기운과 함께 밤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휴~ 영호대협 덕분이오.”
혈천문(血天門)(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