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말이 끝남과 동시에 뻗어오는 도세는 대번에 유세운의 목 앞까지 들이 닥쳤다. 유세운은 훌쩍 뒤로 일장을 물러나며
중얼거렸다.
“아버님 말씀이 악인이라도 개과의 길을 열어주라 하셨는데……”
거구의 사내는 눈에 이채를 띄었다.
“어린놈이 경신 재간이 조금 있다고 그걸 믿고 그렇게 건방진 거였구나.”
유세운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훗. 이정도 칼질이야 못 피하면 망신이지.”
거구의 사내는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이 정도의 칼질에 당하면 그런 건방진 자세를 용납할 수 없지. 아주 기본적이 베기였으니 말야.”
유세운은 부채를 든 사내와 거구의 사내를 번갈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어쩌나? 훈계만 한다고 들을 놈들도 아닌 것 같고… 이것 참 문제군.”
유세운의 중얼거림을 들은 거구의 사내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어린놈이 하늘 높은 줄을 모르는구나!”
“하늘?”
유세운은 하늘을 바라보고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하늘 높은 줄이야 알지. 덩치만 컸지. 머리는 멍청한 놈이었군.”
“갈!”
거구의 사내의 도에서 도기(刀氣)가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종횡으로 뻗어오는 도기를 보며 유세운은 가볍게 몸을
움직여 하나하나 피해냈다.
유세운은 거구의 사내와 부채를 든 사내를 보다가 손뼉을 쳤다.
“그래! 바로 그거야!”
“쥐새끼 마냥 얼마나 도망 다니나 보자!”
거구의 사내가 다시 한번 도를 휘두르려는 찰나 유세운의 입이 열렸다.
“너희 둘. 광오문의 호법이 되라.”
유세운의 말에 거구의 사내는 쳐내던 도를 멈추며 입을 쩍 벌렸다. 부채의 사내도 미안(美顔)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둘의 입이 동시에 열렸다.
“뭐라고?”
“지금 뭐라고 하셨소?”
유세운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이가 몇인데 귀도 안 들리나? 광오문의 호법이 되라고 했는데?”
거구의 사내와 부채를 든 사내가 서로를 쳐다보며 아연실색하자 유세운은 자신의 가슴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광오문의 문주거든. 내 밑으로 들어와라.”
유세운의 말에 거구의 사내가 광소를 터트렸다.
“파하하하핫! 이거 우리 천풍쌍기(天風雙奇) 살아생전에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거구의 사내가 하는 말을 들은 유세운은 웃음 지었다.
“천풍쌍기? 그게 너희 별호냐?”
부채를 든 자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십 년 전에 천하가 좁다고 하며 강호를 주유하던 우리이거늘…… 그 기간이 이리도 길었단 말인가?”
유세운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차피 너희에게 개과의 길을 열어주더라도 옆에서 확인해 봐야 하니 그렇게 해.”
강압적으로 말하는 유세운을 보며 부채를 든 사내는 팔짱을 끼며 입을 열었다.
“이십 년 전에도 강호에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었소. 그리고 지금은 천하에 아무리 많이 적수를 꼽아도 열을 넘지
않을텐데…… 무례하다!”
부채를 든 자의 일갈에 유세운은 장난끼 어린 미소를 지었다.
“감히 내 앞에서 무례하다라는 말을 하다니…… 일단 벌은 받고 내 밑으로 들어오겠다는 말로 알지.”
“하하하하. 너의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는 구나.”
부채를 든 자가 분노하자 거구의 사내는 킥킥거리며 도를 들어 올렸다.
“참아라. 내가 단숨에 두 쪽을 낼테니 말야.”
유세운은 거구의 사내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벌주는 너희가 택한 거니 마음대로 하도록. 기다리기 귀찮은데 어지간하면 공격해봐.”
거구의 사내는 고슴도치 같은 수염을 흔들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이제 목숨을 구걸해도 늦었다. 네 돈은 우리가 잘 쓰도록 하마.”
유세운은 둘의 넝마와 같은 옷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선심 쓰지. 내 밑에 들어오면 밥도 안 굶기고 잠도 편히 자게 해주마.”
“네놈이 단단히 미쳤구나!”
거구의 사내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휘두른 도에서는 도강(刀罡)이 뻗어 나왔다. 푸른 도강이 사방을
덮쳐오는데도 유세운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제자리에 선 채로 신형을 움직여 가볍게 피해내며 중얼거렸다.
“가만. 이 정도 밖에 안 되면 호법으로는 무리겠는데?”
거구의 사내는 유세운의 신법을 보더니 표정을 싸늘하게 굳히며 멈춰 섰다.
“인정하마. 쥐새끼처럼 경신술의 재간이 남을 오시할 만 하구나. 내 도법을 이정도 까지 피해 내다니. 강호에
손에 꼽힐 만한 경신재간이다.”
유세운은 입가에 장난끼 어린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좀더 노력해봐. 이정도로는 호법에 미달이야.”
거구의 사내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린 나이에 그 정도의 경신재간을 익힌 보람도 없이 나를 만난 것을 후회해라.”
거구의 사내는 천천히 도를 들어 유세운을 가리켰다.
기이잉.
거구의 사내가 뻗은 도극에 푸른 강기가 뭉치며 서서히 하나의 도환(刀環)을 만들어갔다. 유세운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감정사가 물건을 감정하듯 거구의 사내를 바라보는 유세운의 눈빛은 진지했다.
“좋아. 그 정도라면 호법으로의 값어치는 있겠어.”
거구의 사내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이건 아까처럼 피할 수 없을 거다. 죽을 각오로 피해라.”
유세운은 실소했다.
“훗. 농담 하지마. 내가 죽을 각오를 해야 할 사람은 천하에 한 명 뿐이야.”
“후회해도 늦었다! 풍마참공도(風魔斬空刀)!”
츄아악!
공기를 가르며 날아오는 도환의 풍압에 유세운의 옷이 찢어질 듯 펄럭였다. 유세운은 도환을 바라보며 손을
들어올렸다.
콰콰콱!
유세운의 장심에서 뻗어 나오는 기운에 얽매인 도환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선회했다. 유세운은
가볍게 손을 휘둘러 도환을 하늘로 튕겨냈다.
유세운을 바라보는 거구의 사내의 입이 더 이상 벌어질 수 없을 만큼 벌어졌다. 유세운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벌레 들어가겠다.”
유세운은 부채를 든 자를 바라보았다. 부채를 든 자도 유세운이 도환을 막아낸 것에 경악하고 있었다.
“어때? 이제는 내 호법이 될 마음이 생겼어?”
유세운의 물음에 거구의 사내가 버럭 화를 내려하자 부채를 든 자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이거 정말 엄청난 고수시군요.”
“그럼.”
유세운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거구의 사내가 어이없어 했다. 부채를 든 자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평생을 주인 없이 살아온 몸. 우리 중 한명 보다 나은 정도로는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없소.”
“하하하. 무슨 소리하는 거야?”
유세운은 입가에 장난끼 어린 미소를 더욱 진하게 만들었다.
“너희 중 한명이라니. 너희 정도라면 열명이라도 상대해 줄 수 있어.”
유세운의 말에 부채를 든 사내와 거구의 사내는 말을 잊었다. 거구의 사내가 버럭 화를 냈다.
“내 살다 살다 이렇게 광오한 놈은 처음이군.”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내가 광오문의 문주이니까.”
부채를 든 사내는 거구의 사내에게 전음을 보냈다.
(전력을 다해 풍천팔단(風天八斷)을 펼쳐라. 나는 선풍참(旋風斬)을 펼칠테니……)
(그 정도까지나 해야 할까?)
(응. 여태껏 만나본 중 최고수일수도 있어.)
부채를 든 사내의 말에 거구의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양손으로 도를 거머쥐었다. 유세운은 둘의 안색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이제야 진심으로 해볼 생각인가 보군.”
부채를 든 사내는 부채를 활짝 피며 입을 열었다.
“이번 공격까지 막는 다면 우리로서는 소협을 당해낼 재간이 없음을 인정하오. 하지만!”
“하지만?”
“최선을 다해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소.”
유세운은 입가에 장난끼 어린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유세운은 천풍쌍기를 바라보며 편한 자세를 잡았다.
“개과의 길을 열어 주지.”
“웃기지 마라!”
거구의 사내가 들고 있는 도에 다시 도환이 만들어졌다. 부채를 든 사내의 부채에도 선환(扇環)이 만들어졌다.
거구의 사내가 앞으로 짓쳐들며 도를 팔방으로 베었다.
“풍천팔단!”
팔방으로 베어 들어오는 기세 어느 것 하나 모자람이 없이 맹렬하게 짓쳐들어왔다. 거구의 사내에 가려 부채를 든
사내가 보이지 않자 유세운은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아! 얼마나 대단한지 보자고!”
유세운이 오른 손을 앞으로 내밀자 세 개의 강환이 생겨나 삼각을 그렸다. 맹렬히 회전을 시작하자 강환으로
이루어진 고리가 만들어졌다.
거구의 사내의 입이 벌어지며 풍천팔단의 도환이 유세운이 만든 고리에 부딪쳤다.
콰콰쾅!
굉음과 함께 날아가는 거구의 사내 신형 뒤로 빠르게 몸을 회전하며 빈틈을 노리던 부채를 든 사내가 일갈했다.
“선풍참!”
선환과 하나가 되어 날아오는 부채를 바라보던 유세운은 피하기는 쉽지 않음을 깨달았다.
“좋군!”
채 일장도 안 되는 거리에서 회전력을 극대화한 부채를 향해 유세운은 새로 깨달음을 얻은 장강붕파를 시전 했다.
쿵!
오른발의 진각에 뒤를 이은 유세운의 오른손 수도에서 뻗어나가는 장강붕파의 해일 같은 강기의 위력에 회전을 하던
부채의 위력이 점점 약해졌다. 서서히 멈춰가는 부채를 유세운은 가볍게 손으로 잡아냈다.
유세운은 부채를 펴서 천천히 부치며 천풍쌍기를 바라보았다. 부채를 든 사내가 두 눈 가득 의혹의 빛을 담은 채
물었다.
“설마 방금 쓴 것은 자연지기 입니까?”
“식견이 뛰어나군.”
유세운의 대답에 거구의 사내가 가슴을 움켜쥔 채 물었다.
“설마 그렇다면 심검에 들었단 말이오?”
“흐음. 당연하지.”
유세운의 대답에 거구의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노선배님. 죄송합니다.”
“나? 올해로 스물다섯인데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유세운의 말에 천풍쌍기는 더욱 눈이 커졌다.
“스물다섯에 심검에 들었단 말이오?”
“응.”
부채를 들었던 자는 거구의 사내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것도 운명인가 보다. 이십년 만에 강호로 돌아 왔지만 그 첫 상대가 심검에 든 고수였다니 말야.”
“크하하하하. 그러게 말이다.”
부채를 들었던 자는 유세운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손속에 사정을 두셨군요.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천풍쌍기중 단풍선주(斷風扇主) 관백입니다.”
거구의 사내도 포권을 취해보였다.
“주군으로 모시겠소. 천풍쌍기중 참풍마도(斬風魔刀) 동무벽이라 하오.”
유세운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그려졌다.
“하하하. 좋아요. 나는 광오문의 이대 문주인 유세운이라하오.”
유세운은 관백에게 부채를 돌려주며 말을 이었다.
“관백이 좌호법을 동무벽이 우호법을 해주시구료.”
“예.”
“예.”
유세운은 둘의 모습을 바라보더니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하하. 일단 다음 마을에 가서 요기나 하고 그 넝마나 갈아입도록 하죠.”
유세운의 말에 관백과 동무벽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가뜩이나 넝마였던 옷이 유세운과의 결전에서 경력에 찢겨져
어지간한 거지들도 고개를 내저을만한 옷이 돼 버린 것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크하하하하. 이거 정말 개방 거지들도 고개를 내젓겠는걸.”
유세운도 그들과 함께 웃음을 지었다.
천풍쌍기(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