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오문-97화 (97/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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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풍쌍기(天風雙奇)

중년인의 이야기는 아직 끝이 나지 않은 듯 입을 축이며 말을 이었다.

“천검 영호천이 더욱 유명하게 된 것은 소림사를 찾아가 비무를 신청했을 때였다.”

“소림사에 비무를요?”

어린 소년의 물음에 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소림의 백팔나한진(百八羅漢陣)과의 결전을 요구했지.”

“예?”

놀라는 어린 소년과 표정을 숨기려고 노력하는 판관필의 사내를 보며 유세운도 구미가 당겨 그들을 바라보았다.

중년인은 두 사제들의 반응을 보며 즐거운 듯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아무한테나 백팔나한진을 보여 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냐?”

“물론이죠. 구파일방의 마지막 자존심중 하나이잖아요.”

“그렇지. 구파일방에서 가장 자랑할 만한 것 중 하나지.”

판관필의 사내마저 수긍하자 중년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낭인천을 하나로 통합한 낭인천주의 이름 값 또한 결코 가볍지 않았다. 소림의 장문인께서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지.”

“그럴만 해요.”

어린 소년의 대답에 중년인은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을 이었다.

“결국에는 비무를 허락했다.”

“흐음. 낭인천에서는 몇 명이나 나왔나요?”

중년인은 어린 소년의 머리를 다시 한번 쓰다듬어주며 대답했다.

“영호천. 단신으로 나왔단다.”

“에?”

어린 소년과 판관필의 사내가 놀라는 표정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중년인은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백팔나한진의 신화는 다시 한번 깨졌다.”

“어떻게 그런 일이……”

당황하는 표정의 판관필 사내를 바라보던 어린 소년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 예전에 한 번 더 깨진 적이 있나요?”

소년의 물음에 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년도 더 전의 이야기지만 그 당시 천하제일인이었던 무광(武狂)이라는 분에게 깨졌었다.”

“풉!”

유세운은 다시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세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빠르게 탁자위의 술을 치웠다. 유세운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역시 사부님이군. 크크크.’

어린 소년은 중년인의 이야기가 궁금한지 금세 유세운에게 향해졌던 관심을 돌렸다.

“그럼 또 한 명은 누구에요?”

유세운은 태연하게 다시 술잔을 채우고 귀를 기울이며 잔을 들어올렸다. 강호의 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중년인도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어린 소년의 모습도 왠지 모르게 따뜻하게 느껴졌다.

‘동문의 정이라는 건가?’

중년인도 유세운에 대한 관심을 끊고 소년에게 웃음 지어 보였다.

“다른 한명은 너도 들어봤을 거다.”

“정말요?”

소년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이 들어본 이름들을 생각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소년은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어요.”

“그래? 들어 봤을 텐데? 요즘 강호를 뒤흔드는 소문만 내고 있는 사람이다.”

“설마?”

소년의 물음에 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권무적 유세운. 철마성의 주적이자 철마성에서 황금 일만 냥이라는 거금을 내걸 정도의 인물이지.”

“켁!”

유세운은 갑작스레 코로 뿜어져 나오는 죽엽청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제길! 코로 나오니까 눈물이 절로 나네.’

유세운은 자신을 향해 의심의 눈초리를 띈 채 다가오는 판관필의 사내를 흘끔 바라보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공자는 누구시길래 저희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리 놀라시는 지요?”

유세운은 한눈에 판관필의 사내의 무공경지를 알아보고는 웃음 지었다. 호강현이라는 자보다도 한참 아래로 보였다.

“아닙니다. 갑자기 사래가 들려서요.”

하지만 판관필 사내의 의심의 눈초리는 거둬지지 않았다.

‘이게 기분 나쁘게 쳐다보네. 확 그냥!’

심각한 고민에 빠진 유세운을 보고 중년인이 다가와 판관필 사내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이리와 술이나 하게. 정사제 뭘 그리 흥분하나?”

“예.”

판관필의 사내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쏘아보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유세운은 속으로 치미는 화를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품에서 은자 한 냥을 꺼내 자리에 내려놓고는 점소이를 불렀다.

“이보게. 내 말 좀 내오게.”

점소이는 황급히 다가오며 고개를 숙여보였다.

“날도 늦었는데 묵고 가시지요.”

유세운은 가볍게 고개를 내 저었다.

“아니 괜찮네. 어서 말이나 내오게.”

“예.”

유세운은 밖으로 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쩝. 오늘도 야숙하게 생겼군.”

태연하게 걸음을 옮기는 유세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중년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게 낯이 익어 보이는군.”

“저도 그 점이 이상했습니다.”

판관필의 사내가 대답하자 중년인도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잔을 들어올렸다.

“아무려면 어떤가? 우리는 술이나 한잔 하세.”

유세운은 점소이가 내온 말에 올라타며 물었다.

“광동성(廣東省)의 광주(廣州)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하나?”

점소이는 손을 들어 성문을 가리키며 미소 지었다.

“저기 보이는 남문을 나가셔서 관도를 따라가시면 두 갈래로 갈라집니다. 좌측의 관도를 따라가시면 될 겁니다.”

“고맙네.”

유세운은 품에서 은자 한 냥을 꺼내 점소이에게 던져주고서는 말을 달렸다.

두 갈래의 관도에서 좌측을 택하고 한창 말을 몰던 유세운은 저물어가는 해를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손을 들어 자신의 입술을 만지던 유세운은 관도의 중앙으로 걸어 나오는 두 명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의 속도를

줄였다.

거구의 사내와 훤칠한 키의 사내가 나란히 서서 길을 막았다.

거구의 사내는 거칠게 묶어 올린 머리에 고슴도치처럼 사방으로 뻗어있는 수염이 인상을 험악하게 만들었다. 거의

구척에 달하는 장신이 커보이지 않을 만큼의 근육질의 사내였다. 그리고 그에게 무척이나 어울릴 만한 커다란 도가

허리춤에 매여 있었다.

‘철탑백마인들보다도 크겠는데?’

유세운은 거구의 사내 옆에 서 있는 훤칠한 키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피부는 백옥처럼 곱고 날카롭게 뻗어 올라간

검미에 우수에 찬 눈빛. 젊었을 때 수많은 여자가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훤칠한 키의 사내는 부채를 선선히 부치고 있었다. 어딜 봐도 일행처럼 보이지 않는 두 명의 사내를 동행으로

보이게 만든 것은 넝마와 같은 옷이었다.

유세운은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냐?”

가볍게 던진 유세운의 질문에 거구의 사내의 송충이 같은 눈썹이 역팔자로 치솟았다. 훤칠한 키의 사내도 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 유세운은 그들이 입을 열기 전에 먼저 물었다.

“살수냐?”

거구의 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우리를 살수 따위와 비교하는 거냐?”

유세운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살수가 아니라면 내 앞을 막은 이유가 뭐냐?”

“갈! 어린놈의 자식이 말이 왜 그 따위냐?”

거구의 사내가 소리치자 주변의 나뭇잎이 우수수 흔들렸다. 유세운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별로 좋은 용건이 있어서 내 앞에 나타난 것 같지도 않은데 내가 왜 잘 대해 줘야 하지?”

유세운의 말에 훤칠한 키의 사내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유세운은 그의 웃음을 보며 속으로 궁금증이 치밀었다.

‘얼마나 많은 여자가 저 웃음에 넘어갔을까?’

훤칠한 키의 사내는 부채를 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일리는 있군.”

유세운은 그윽한 사내의 목소리에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좋아. 그럼 내 앞에 나타난 용건을 말해 봐.”

거구의 사내는 훤칠한 키의 사내 앞으로 나서며 커다란 도를 뽑아 들었다. 석양의 붉은 빛을 받아 번뜩이는 도를

보며 유세운은 절로 탄성을 내질렀다.

“오! 보통 도가 아닌가 본데?”

척 보기에도 보도(寶刀)로 보였다. 넓은 도신에 섬뜩한 석양의 붉은 빛이 반사 되었다. 유세운의 말에 거구의

사내는 도를 아련하게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보통 도가 아니지.”

흐뭇한 표정을 보며 유세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

유세운의 말에 거구의 사내는 눈을 질끈 감으며 억눌린 목소리로 답했다.

“간단하게 말하마.”

유세운은 거구의 사내가 화를 내는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거구의 사내가 눈을 부릅뜨며 도를 들어

유세운을 가리켰다.

“가진 걸 다 내놓아라!”

“엑?”

유세운은 거구의 사내가 한 말에 기가 막혀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너희 강도냐?”

유세운의 질문에 두 사내의 표정에 부끄러운 기색이 깃들었다.

‘뭐야? 두 명다 웃기는 놈들이잖아?’

유세운의 생각에는 상관없이 거구의 사내가 악을 썼다.

“웃기지 마라! 감히 누굴 강도 따위와 비교하는 거냐?”

유세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을 들어 거구의 사내가 휘두르고 있는 도를 가리켰다.

“그런 무식한 도를 들고 나타나 가진 걸 다 내놓으라고 하면서 강도가 아니라고?”

“크윽!”

거구의 사내는 한숨을 내쉬며 도를 땅에 짚으며 말을 이었다.

“가진 걸 다 내놓으면 털끝하나 건드리지 않으마.”

유세운은 어이가 없었다. 보통 강도는 아닌 듯 그의 말에는 진심이 어려 있었다.

“강호에 나온 이후 이렇게 어이없기는 처음이군.”

부채를 든 사내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세운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저 한숨에도 수많은 여자가 넘어갔겠군.’

부채를 든 사내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거구의 사내 옆에 서며 입을 열었다.

“이거 미안하게 됐소. 소협. 우리가 워낙 급해서 그러는 것이니……”

“그러는 것이니……?”

유세운의 반문에 부채를 든 사내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있는 것만 다 주면 해하지 않겠소.”

유세운은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어이없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유세운은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눈에 띄는 명마와 고급 비단으로 만들어진 청삼. 강도들의 표적이 되기 딱 좋은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저 덩치가 한말이랑 다른 점이 뭐야?”

유세운의 물음에 사내는 부채를 접어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며 난처한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하하. 말이 그렇게 되는군. 정말 미안하오. 하지만 어쩔 수 없구료.”

유세운은 한숨을 내쉬며 말에서 내려섰다. 말을 관도 옆의 나무에 묶어 놓은 유세운은 다시 관도의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유세운을 바라보고 있던 거한의 사내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좋은 생각이군.”

유세운은 고개를 들어 거한의 사내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말인즉슨 돈을 안 내놓으면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이지?”

“흐흐흐. 그렇게 생각이 없어 보이지는 않는다만 그럴 수도 있지.”

“그런 일은 없기 바랄 뿐이오.”

두 사내의 대답을 들은 유세운은 팔짱을 끼며 물었다.

“평상시에도 이러나? 돈이 없으면 길가는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돈을 빼앗나?”

촤악!

부채를 활짝 펴며 사내는 고개를 흔들었다.

“소협. 오해는 하지 마시오. 우리를 도적질이나 하는 버러지들과 비교하면 곤란하오.”

유세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다른거지?”

거구의 사내가 부채를 든 사내의 어깨를 잡으며 소리쳤다.

“비켜봐. 이런 놈은 그냥 예전에 하던 대로……”

“예전에 하던 대로?”

유세운의 물음에 거구의 사내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이렇게 말이다!”

천풍쌍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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