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유세운의 중얼거림을 들은 이충열의 안색이 미미하게 떨렸다.
“지금 뭐라고 한거냐?”
유세운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한심하다고 했는데?”
“한심하다니! 곧 죽을 놈이 말이 많구나?”
유세운은 자리에 앉은 채 두강주의 술병을 들어 한잔을 더 따라 마셨다. 이충열의 안색이 점점 굳어졌다. 유세운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물었다.
“그런데 철마성은 아닌 것 같고 누구냐?”
“크윽! 이런 건방진!”
이를 가는 이충열의 옆에 앉아 있던 적삼의 여인이 태연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희는 어린회(魚鱗會)라고 하지요. 장강에서 주로 활동하는 살수집단이랍니다.”
“그런가?”
유세운은 어깨를 으쓱거리고서는 두강주를 병째 들이마셨다. 이충열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유세운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았다. 유세운은 두강주를 다 마시고는 병을 내려놓으며 웃음 지었다.
“이걸 어떡하지?”
“뭘 말이냐?”
분노한 이충열의 모습을 보던 유세운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무렇지 않은 듯 입을 열었다.
“술은 얻어 마셨는데 보답해줄 길이 없으니 말이지.”
“네놈의 목이면 그 어떤 보상보다 큰 보상이니 걱정하지 말아라.”
유세운은 이충열의 말에 고개를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나도 물론 내주고 싶기는 하지만 아무나 가져갈 수 있는게 아니라서 말이지.”
창!
맑은 검명(劍鳴)과 함께 이충열의 허리에 감겨있던 연검이 풀려나왔다. 유세운은 뺨을 긁적거렸다.
“좋아.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지.”
“물어보세요.”
적삼의 여인이 고분고분 물어오자 유세운은 태연히 물었다.
“심검의 고수를 상대하는 것은 처음인가?”
“호호호. 물론이지요. 사실 이렇게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랍니다. 근 백여 년 동안 심검의 경지에 든 고수가
나타나지 않았으니 말이죠.”
“흐음. 그래서 이런 실수를 한 모양이군.”
유세운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유세운의 말에 이충열의 눈썹이 미미하게 떨렸다.
“무슨 말이냐?”
“이렇게 멍청해서야. 쯧. 자네가 어린회의 회주인가?”
이충열은 유세운에게서 느껴지는 태산과 같은 기도에 당황하며 대답했다.
“그…그렇다.”
“어린회라는 것도 어차피 오늘부로 강호 명부에서 지워지기는 하겠지만 그 전적인 이유는 너한테 있는거니
명심해라.”
“허…헛소리는 집어치워라!”
유세운은 빙글빙글 웃으며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심검의 고수란 말이지……”
이충열은 유세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유세운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일시에 기를 일으켰다.
화악!
유세운의 기세에 밀려 이충열과 적삼의 여인은 선실의 벽면까지 물러났다. 이충열이 당황한 표정으로 더듬거렸다.
“그…그럴 리가 없어.”
적삼의 여인도 정신을 못 차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이것이 심검의 경지?”
유세운은 어깨를 흔들어 보며 말했다.
“심검의 경지에 든 고수는 더 이상 자신의 본신지기에 연연하지 않아. 자연지기를 운용하는 이들에게 이따위 얄팍한
수는 먹히지 않아.”
유세운은 입가에 장난끼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것으로 조금이나마 두강주의 값을 치렀으면 좋겠군.”
이충열은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흥! 이미 배는 장강을 타고 있다. 어린회의 가장 무서운 점은 물에서라는 것을 가르쳐 주마!”
이충열은 곧장 등 뒤의 벽면에 걸린 그림을 잡아 당겼다. 벽면이 돌아가며 생긴 틈으로 몸을 날린 이충열과 적삼의
여인을 바라보던 유세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날 뭐로 보고 저러는 거지?”
유세운은 태연히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콰앙!
문을 박차고 나온 유세운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미 배의 갑판에는 짐을 나르던 인물들이 연노(連弩)를 들고 서
자신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광대뼈가 튀어나온 총관은 판관필을 든 채로 자신을 쏘아 보고 있었다.
유세운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어린회의 전력이 이게 전부인가?”
총관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아까는 잘도 나를 우습게 알았겠다.”
유세운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한심하군. 그런데 이충열은 어디 있냐?”
“갈! 회주님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마라.”
“이런 멍청한 놈들!”
유세운은 버럭 화를 냈다.
“살수라는 놈들이 벌건 대낮에 눈앞에 나타나서는 무슨 살수라는 거냐!”
“시끄럽다! 이거나 먹어랏! 쏴라!”
슈슈슈슉-
짧은 활들이 사방팔방을 가득 메우며 날아오는 것을 본 유세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팅! 팅! 팅! 팅!
은색의 투명한 막이 유세운의 전신을 두르며 나타났다. 투명한 막에 닿은 활들은 여지없이 튕겨나갔다. 총관이 입을
다물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뭐…뭐냐?”
“이거? 호신강기(護身罡氣)라고 하는 것이지.”
팍!
유세운이 말을 하는 사이 가랑이 사이로 검이 날카롭게 찔러 들어왔다. 유세운은 뒤로 한걸음 물러나며 진각을
밟았다.
콰앙!
“크악!”
밑에서 검을 찔러 올린 자는 비명소리와 함께 핏물을 튀어 올리는 것으로 자신의 명을 달리했다. 유세운의 눈에
싸늘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일단 무사히 도망갈 생각은 버려라.”
“무…무슨 헛소리냐?”
유세운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처음으로 시도한 너희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처음에 확실한 경고가 필요할 듯 보여서 말이지.”
유세운의 말에 총관은 이를 갈았다.
“모두 뛰어내려라.”
총관의 명령에 연노를 들고 있던 자들은 모조리 장강으로 뛰어내렸다. 유세운은 가만히 총관을 바라보았다.
“넌 왜 안 뛰어 내리냐?”
“시끄럽다.”
총관은 신형을 날려 유세운을 향해 덮쳐갔다. 유세운의 눈에 이채가 반짝였다.
“의외군.”
“비응직필(飛鷹直筆)!”
한 마리 매처럼 날아오던 총관의 신형이 푹 꺾어져 내렸다. 유세운은 날카롭게 뻗어오는 판관필을 향해 가볍게
섬광마멸지를 날렸다.
퍽!
섬광마멸지에 맞는 순간 판관필이 터져나가며 수많은 세침(細針)이 쏟아져 나왔다.
“흥!”
유세운은 가벼운 콧방귀를 뀌며 내력을 뿜어냈다. 가느다란 세침은 모두 유세운의 기세에 밀려 사방으로 뻗어갔다.
총관의 몸에도 셀 수 없을 만큼의 세침이 꽂혔다.
쿵!
총관은 바닥으로 떨어져 두어 차례 몸을 떨고는 곧 파리한 안색으로 숨을 거두었다. 유세운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보통 독이 아니군.”
유세운은 배의 가운데로 걸어가 소리쳤다.
“이충열! 나와라! 회주라는 자가 어디로 도망간 거냐?”
유세운은 사방으로 도망가고 있는 어린회의 살수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언제 나오나 보도록 하지.”
유세운은 가볍게 난간을 뜯어내서는 나무를 하나하나 조각내기 시작했다. 금세 나무 조각들이 수북이 쌓이자 유세운은
그것을 하나씩 던지기 시작했다.
슈악!
“크억!”
“크악!”
한명의 살수에게 날아간 두개의 조각은 오른쪽 어깨와 왼쪽 무릎 뼈를 관통했다. 배를 중심으로 붉은 핏물이 원을
그리며 나타나기 시작했다. 유세운은 도망가던 살수들을 모두 처리한 다음에야 다시 소리쳤다.
“아직도 나오지 않을 거냐!”
유세운의 외침에도 적막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유세운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봤자 아직 배에 있겠지. 배가 가라앉아도 안나오는지 보마.”
유세운은 내력을 담아 일권을 선수(船首)를 향해 내질렀다.
콰앙!
나무 조각들이 비산하며 선수가 박살이 나자 배의 후미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하하하. 이걸로 네놈도 끝이다.”
이충열은 자신의 콧수염이 흔들리도록 통쾌하게 웃었다. 유세운은 그런 그를 불쌍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물었다.
“드디어 미친 거냐?”
이충열과 적삼의 여인은 발에 나무판자를 묶은 채 물위를 딛고 서 있었다. 등평도수(登萍渡水)만큼은 아니었지만
놀라운 경신 재간이었다. 유세운은 이충열을 향해 물었다.
“대체 그 어리석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냐?”
이충열은 빠르게 배에서 멀어지며 소리쳤다.
“크하하하. 네놈의 코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무슨 냄새가 나지 않느냐?”
“냄새?”
유세운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뭔가가 타들어가는 냄새가 났다. 유세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타는 것 같은데?”
“크크크. 그렇지. 네놈의 생명줄이 타들어가는 냄새다!”
“생명줄?”
이충열은 배에서 십장이 넘게 벗어난 다음에야 멈춰서며 말을 이었다.
“배 위에 올려진 짐은 모두 화약이다. 그리고 배 밑 바닥에서 화약이 곧 터질 것이다.”
“이런!”
유세운은 다급히 자신의 말을 향해 몸을 날렸다. 말을 향해 몸을 날리는 유세운을 향해 이충열과 적삼의 여인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곧 있으면 화약들이 연쇄폭발을 일으키면 흔적도 남지 않을 말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유세운은 말의 배에 손을 대며 있는 힘껏 위로 집어 던졌다.
“차핫!”
워낙에 힘을 주어 던진 관계로 바닥의 나무에 발이 박혔다.
이히힝.
허공으로 오장 높이까지 날아올라간 말이 놀라 울음소리를 터트렸다. 유세운은 말을 따라 허공으로 높이 뛰어
올랐다. 유세운의 행동에 이충열의 웃음소리가 다시 터져 나왔다.
“크하하하! 그 정도로 피할 정도라면 화약을 이렇게 구해놓지도 않았을 거다!”
유세운은 말이 떠 있는 높이까지 올라가자 이충열을 향해 소리쳤다.
“어서 도망가라! 만약 내손에 잡히면 용서는 없다.”
“크크크. 심검의 경지에 든 자가 내손에 죽는 장면을 놓칠수야 없지.”
콰콰콰쾅!
굉음과 함께 배의 밑바닥에서 터져 나온 화염은 갑판위에 있던 다른 화약들까지 터트리며 불기둥이 만들어졌다.
유세운을 덮어버리는 불기둥을 보며 이충열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크하하하! 그럼 그렇지. 이것으로 황금 일만 냥은 내 것이다.”
“회주님. 왠지 불길해요.”
적삼의 여인이 걱정스레 말을 꺼내자 이충열은 걱정말라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비록 총관이랑 많은 살수를 잃었지만 황금 일만 냥이면 어지간한 문파라도 하나 세울 수 있을 거다. 걱정마라.”
“꺄악!”
“뭐냐?”
적삼의 여인이 갑작스레 지르는 비명소리에 이충열이 당황하며 물어봤다. 여인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불기둥을 향해
손을 가리켰다. 이충열의 시선이 그녀의 손을 따라 불기둥으로 향했다.
“저…저런 말도 안 되는!”
불기둥은 올라가던 기세보다 더욱 빠르게 밑으로 가라앉아 갔다. 유세운이 내뻗는 일수에 파도처럼 밀려나오는 은빛
강기가 불기둥을 밑으로 가라 앉혔다.
“차핫!”
유세운의 일갈과 함께 파도처럼 밀려간 강기는 불기둥을 일으키던 배를 단숨에 산산조각 냈다.
콰앙!
산산조각 나 사방으로 비산하는 나무 조각들을 보며 이충열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이럴 수는 없어.”
어린회(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