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오문-93화 (93/194)

(93)

창천궁주가 기거하고 있는 구층 전각으로 된 창주궁.

창주궁 칠층의 대청에는 백선후와 초평, 그리고 하후패가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백선후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유문주가 시녀를 통해 나를 보자고 했다더군.”

“무슨 일인 것 같습니까?”

하후패의 물음에 초평이 대신 답했다.

“아마 철마성에서 유문주에게 현상금을 건 일에 대해 결정을 내린 것 같습니다.”

백선후는 가만히 대청의 입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결정했을 것 같나?”

초평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대답했다.

“아마도 담판을 지으러 갈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백선후의 수긍에 하후패가 다급히 물었다.

“담판이라니! 그게 가당키나 한 말입니까?”

하후패의 물음에 백선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네. 철마성의 내성에 있는 고수들 중 태반이상이나 남아 있으니 말일세.”

“그런 곳으로 담판을 지으러 간다는 것은 죽으러 가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하후패의 말에 백선후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백선후의 입가에 훈훈한 미소가 그려졌다.

“꽤나 그를 걱정하는군.”

하후패는 백선후의 말에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정말 뛰어난 무인입니다.”

“알고 있네. 현 무림에 은거한 고수들을 제외하고는 최고수인 것도 말일세.”

“그런 그를 사지로 몰아넣을 수는 없습니다.”

초평이 둘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희도 그를 혼자 보낼 생각은 없습니다.”

하후패는 초평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아직 다 낫지 않은 몸으로 회의에 참석하느라

식은땀이 등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백선후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일단 유문주와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세.”

유세운은 역시나 투덜거리며 창주궁의 칠층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앞에서 걸어가던 무인이 옆으로 물러나며

고개를 숙였다. 유세운은 태연히 창주궁의 대청으로 들어섰다. 대청에는 이미 백선후와 초평 하후패가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유세운이 들어서는 것을 본 백선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유문주. 어서 오시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유세운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백선후의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이장(二丈)에 달하는 탁자를 마주 보고 앉은

유세운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유세운은 백선후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만나자고 한 이유는 아실 겁니다.”

“짐작은 하고 있소.”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철마성에 다녀올 생각입니다.”

백선후는 유세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라 생각했소.”

유세운은 백선후의 말에 웃음 지었다. 초평은 유세운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언제쯤 떠나실 생각입니까?”

“아마 내일쯤이 될 것 같군요.”

유세운은 별 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백선후는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알겠소. 하지만 철마성은 그리 쉽게 볼 문파가 아니오.”

“상관없습니다. 철마성이 어떤 문파든……”

백선후는 고개를 내저었다.

“강호에서 손에 꼽히는 세력이오. 혼자서는 힘 들 것이오.”

유세운은 백선후의 걱정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백선후는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내성 고수 중 절반을 내주겠소. 그래도 안심할 순 없지만 말이오.”

유세운은 말없이 백선후의 제안을 듣고서는 바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유세운의 웃음에 초평은 눈살을 찌푸렸고 하후패도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유세운은 그 뒤로도 한참을

웃다가 손사래를 쳤다.

“하하하. 궁주님. 요 근래 들어 본 것 중 가장 재미있는 얘기였습니다.”

“농담하는게 아니오.”

유세운은 진지한 눈빛의 백선후를 보고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대답했다.

“농담으로 듣겠습니다.”

백선후는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지만 감히 범접하기 힘든 기도를 물씬 풍기는 유세운을 보고 안색을 미미하게

굳혔다. 소문으로 듣고 보고를 받았었지만 심검의 경지를 직접 만나보니 역시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후패가 다급히 나섰다.

“유문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오.”

유세운은 하후패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이건 수십 아니 수백 번을 생각해도 같은 얘기입니다. 광오문과 철마성의 일에 다른 문파의 도움을

받으라니 있을 수 없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미련을 못 버리는 하후패를 향해 유세운은 웃음만 지어 보였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유세운은 하후패의 말을 막고서는 백선후를 바라보았다.

“제 얘기는 이것으로 끝입니다. 하실 말이 있으면 지금 하시죠.”

“아니 내 얘기도 끝났소.”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몸조심 하시오.”

유세운은 백선후의 말에 미소로 답한 채 전각을 벗어났다.

타는 듯한 가을 저녁노을이 마지막으로 붉게 하늘을 물들이는 것을 보는 유세운의 얼굴 또한 붉게 물들었다.

유세운은 창밖으로 보이는 붉은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영호형님은 저런 것을 보며 느끼는 느낌을 무공에 담아냈었는데 왜 그런지 알겠군.”

장강의 물결을 보고 장강삼검을 창안해내던 영호천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하지만 유세운의 생각은 다급하게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끊어졌다.

유세운은 창가를 등지고 문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잠시 후 문이 벌컥 열리며 백연혜가 들어섰다.

방안으로 다급히 들어오던 백연혜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서 있는 유세운을 보고 흠칫하며 멈춰 섰다. 유세운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백연혜의 머리에 꼽혀 있는 봉황비를 바라보았다. 약속대로 항시 머리에 꼽고 다니는 모습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백연혜는 유세운이 웃자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그리 우습죠?”

“아니. 봉황비가 잘 어울려서.”

유세운의 말에 백연혜는 슬며시 머리에 꼽은 봉황비를 매만졌다. 하지만 곧 정색을 하고 소리치듯 말했다.

“철마성에는 왜 가는 거예요!”

유세운은 화를 내듯 소리치고는 자기가 놀라 주춤거리는 백연혜를 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감히 내 목에 현상금을 거는데 가만있을 수야 없잖아.”

“하지만 이 곳에 있으면 누구도 운오라버니를 노릴 수 없어요.”

백연혜의 말에 유세운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백연혜는 유세운의 표정을 보고 놀랐지만 말을 멈추진 않았다.

“이 곳에 있으면 되잖아요!”

“다시 말하지만 난 광오문의 문주야. 누구 앞에서도 피하지 않아.”

백연혜는 유세운의 말에 담긴 뜻을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하지만……”

“알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백연혜는 고개를 들어 유세운을 바라보았다.

“내성의 고수들과 함께라도 가줘요.”

유세운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도 안돼. 이건 내 일이야. 내 일을 남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어.”

단호한 유세운의 말에 백연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세운은 해가 지기 직전의 마지막으로 타오르는 저녁노을에 비춰진 백연혜의 얼굴을 보며 미소 지었다. 유세운은

조심스레 백연혜를 향해 한걸음 다가갔다.

백연혜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유세운을 바라보았다.

유세운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음 지었다.

“하하하. 아무 걱정 하지마.”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백연혜는 말을 하면서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유세운은 조심스레 그녀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백연혜는 말없이

유세운의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녀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흘러 유세운의 손에 떨어졌다.

“바보같이 왜 우는 거야?”

“꼭 가야만 하는 거죠?”

“응.”

유세운의 대답에 백연혜는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냥 제 곁에 있어주면 안될까요?”

유세운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번 일은 해결해야만 해.”

백연혜는 유세운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시 한 방울 그녀의 눈물이 유세운의 손 등에 떨어졌다.

유세운은 그녀의 눈에 흐른 눈물을 닦아주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촉촉한 감촉에 백연혜도 살며시 눈을

감았다.

짧지만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흐르고 유세운은 고개를 들며 어색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아무 걱정 하지마. 금방 돌아올게.”

백연혜는 얼굴을 창 밖에서 타오르는 저녁노을처럼 붉게 물들인 채 유세운을 바라보았다.

유세운은 양팔을 벌려 은빛의 강환을 다섯 개를 단숨에 만들어냈다. 백연혜는 유세운의 주변에 나타난 강환들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거 설마 전부 강환인가요?”

“물론이지.”

유세운은 자신의 주위를 가볍게 휘감아 도는 강환을 이리저리 가지고 장난치며 물었다.

“위력을 시험해 보고 싶어?”

백연혜는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가볍게 고개를 내 저었다.

“아니요. 아버지나 무상의 강환을 봤는데 그거는 아무데서나 위력을 시험해 볼 수 없더라고요.”

유세운도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만든 강환을 바라보았다,

“그건 그래. 아직 만들기는 했는데 위력시험은 해보지 못했군. 한번쯤 시험을 해봐야 하긴 하겠는데.”

유세운의 말에 백연혜는 고개를 내저었다.

“안돼요. 여기 있는 것은 전부 창천궁의 물건이란 말이에요.”

유세운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훗. 아무려면 방안에서 위력을 시험해 보겠어?”

“그건 그렇네요.”

살포시 미소를 짓는 백연혜의 얼굴을 보고 유세운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유세운은 가볍게 강환을 허공으로

흩어버리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백연혜는 갑자기 등을 보이며 창밖을 보는 유세운을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유세운은 백연혜를 등진 채 편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돌아오는 길에 선물이라도 하나 사올께.”

백연혜는 유세운의 말에 가만히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런 거는 필요 없어요. 무사히 다녀오기나 해요.’

“알았어요.”

유세운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백연혜를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서서히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등진 유세운은

장난끼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약속할게. 무사히 다녀온다고.”

백연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유세운에게 다가갔다. 백연혜는 말없이 유세운의 품에 가볍게 안겼다. 유세운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다짐하듯 속삭였다.

“약속할게.”

백연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세운은 자신의 가슴 앞에서 느껴지는 백연혜의 고개 짓에 편안하게 웃음

지었다.

백연혜는 유세운의 품에서 천천히 멀어지며 입을 열었다.

“내일 나가보지 않을 거예요.”

“응.”

백연혜는 재빨리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다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는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약속은 꼭 지켜야 되요.”

백연혜는 유세운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문을 열고는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유세운은 그녀의 발걸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중얼 거렸다.

“아무 걱정 하지마. 무슨 일이 있어도 무사히 돌아올게.”

유세운은 다시 고개를 돌려 점점 어두워져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나둘 뜨기 시작하는 별들을 바라보며 유세운은

기지개를 켰다.

“철마성! 너희는 다시는 해선 안 될 실수를 했다는 것을 확실히 알려주마.”

어린회(魚鱗會)(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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