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백연문은 장내가 정리되자 하후패에게 다가갔다.
하후패는 허리의 상처에 금창약을 바르고는 옷자락을 찢어 싸매고 있다가 다가오는 백연문을 보고 입을 열었다.
“소궁주. 궁에서 내궁의 고수와 외궁의 무사들을 더 충원해야 될 것 같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백연문은 하후패의 상처를 바라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허허. 걱정하실 만큼은 아니오.”
하후패는 상처를 질끈 동여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은 바로 귀주지부를 되찾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이오.”
“지금 저희가 입은 피해보다 적들의 피해가 더 극심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철마성에서 나온 전력이 이것 뿐 일리 없소. 이정도면 하루아침에 귀주지부가 무너질 리 없소.”
“그렇군요.”
백연문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후패는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 십리만 가면 대방(大方)현이 있습니다. 대방현 외곽에 인연이 닿아 있는 창운산장(蒼雲山莊)으로 가서
몸을 피하는게 좋겠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차도 준비하도록 하죠.”
하후패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고맙소.”
하후패는 씁쓸한 표정으로 장내를 돌아보았다. 자신과 함께 진에 갇혔던 명천십이검은 진세를 깨고 나올 때 여덟
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또한 살아남은 네 명도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어 조식에 들어가 있었다. 하후패는 이가
갈렸다.
‘비열한 놈들! 이따위 암습이나 하다니!’
하후패는 절로 치미는 욕지기를 속으로 삼켰다. 자신이 방심하지만 않았다면 이렇게 쉽게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과 명천십이검이면 충분히 멸천이십사검을 큰 피해 없이 당해 낼 수 있었다. 자신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대가가 이렇게 큰 피해를 입게 했다. 지금은 자신도 운기가 불편할 정도 였다.
하후패는 장내를 다시 한번 돌아보다가 백연혜가 간호하고 있는 유세운을 바라보았다. 하후패는 더욱 입맛이 썼다.
솔직히 이번 결전은 만약 유세운이 오지 않았다면 되려 당할뻔 했다. 흑마육령을 감당할 수 있는 고수가 창천궁에서
온 무사 중에는 없었다. 그런 그들을 단신으로 해치워 준 유세운이 상처 입은 것 또한 자신의 실수인 것만
같았다.
“허허허. 큰일이군.”
하후패는 백연혜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떻소?”
하후패의 물음에 백연혜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아! 하후숙부님. 아직 깨어날 기미가 안보여요. 어떻게 하죠?”
걱정스레 말하는 백연혜를 보며 하후패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
“흠. 하긴 흑마육령 같은 고수를 단신으로 무찔렀으니 그럴만도 하겠지. 일단 창운산장에 가서 치료해야 되겠네.”
“예.”
백연혜는 안쓰럽게 유세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저 때문에…”
백연혜는 창백한 표정의 유세운을 바라보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대방현 외곽의 창운산장은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창천궁의 무사들로 발 디딜 곳도 없었다.
창운산장의 가주 유성장(流星掌) 문정선은 부드러운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유성십팔장(流星十八掌)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처럼 빠른 장공이다. 문정선은 갑자기 늘어난 사람들 덕에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환자들을 위해서 대방현의 의원들을 급히 모셔왔고 먹을 음식을 준비시켰다.
문정선은 차를 든 시녀를 대동하고 별채로 향했다. 별채 앞에 선 문정선은 가벼운 인기척을 내며 입을 열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허허허. 그 무슨 말인가? 들어오게.”
문정선은 가벼운 웃음을 지은 채 문을 열고 별채로 들어갔다. 하후패는 웃옷을 벗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붕대로
칭칭 감은 몸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균형 잡힌 몸매가 보였다. 문정선은 웃음지었다.
“하후형님 몸은 점점 더 젊어지시는 것 같습니다.”
“허허허. 그런 말 말게.”
문정선은 시녀가 따라주는 찻잔을 받아들고는 말을 이었다.
“한잔 드셔보시지요. 힘들게 구한 철관음(鐵觀音)입니다. 복건성의 안계(安溪)에서 난 진품이지요.”
하후패는 미소 지으며 찻잔을 들어올렸다.
“아직도 차를 즐기는군.”
“하하하. 제가 버리지 못하는 것 중 하나지요.”
하후패는 차를 한모금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이런 거라면 나보다는 문상이 더 좋아하겠군.”
“그럼 돌아가시는 길에 제가 싸드리겠습니다.”
하후패는 창밖으로 떠 있는 달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게 됐네.”
문정선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차를 한모금 마셨다.
“하후형님 그렇게 말씀하시니 섭섭합니다. 예전에 제 생명을 구해주신 적도 있으시면서 그러시면 제가 섭섭합니다.”
하후패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 그때가 그립군. 자네나 나나 혈기 넘치는 때였지.”
“하하하. 형님. 그동안 많이 늙으신 것 같습니다. 몸은 젊은이들도 혀를 내두를 만큼 젊으시면서.”
“허허. 그런가?”
하후패는 철관음을 한모금 더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아! 유공자는 어떤가?”
“그 젊은이 말입니까?”
“흠. 그래 어떻게 됐나?”
“일단은 내상약(內傷藥)을 먹였지만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큰일이군.”
문정선은 흥미가 당기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물었다.
“그런데 그 젊은이는 누굽니까? 백소저가 계속 간호하고 있던데.”
“유공자 말인가? 아직 소식을 못들었나? 일권무적 유세운이라고 광오문의 이대 문주 일세.”
“에? 그 왜 철탑백마인을 단신으로 제압했다는 말도 안돼는 소문의 주인공이란 말입니까?”
“말도 안돼는 소문?”
“하하하. 무슨 창천궁주님도 아니고 어떻게 그들을 단신으로 제압한단 말입니까?”
하후패는 입가에 고소를 머금었다.
“그는 후기지수(後起之秀)… 아니지 전 무림을 통틀어도 손에 꼽힐 고수일세.”
“예? 형님도 무슨 그런 농담을…”
문정선의 말에 하후패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닐세. 궁주님도 자신보다 더 강할 것 같다고 말하신 적이 있네.”
“예? 창천궁주님이 그런 말을 하셨다고요?”
“흠. 그렇다네.”
“그렇게까지 안보였었는데…”
하후패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철마성의 흑마육령을 막아주지 않았다면 우형은 자네를 만나보지도 못했을 걸세.”
“흑마육령이요?”
문정선은 아무렇지 않게 되묻다가 입을 쩍 벌렸다.
“그가 흑마육령을 단신으로 막아냈다고요? 흑마육령이라면 철마성 내성의 고수 아닙니까?”
하후패는 의외라는 눈으로 문정선을 바라보았다.
“허허. 자네 의외로 정보에 밝구만.”
“하하하. 감사합니다. 아니 그게 아니고… 흑마육령을 막아냈다고요?”
“아! 미안하군. 내가 말실수 했네. 그가 단신으로 그들을 사로잡아 주었지.”
“예?”
문정선은 고개를 흔들며 하후패의 말을 부정했다.
“하지만 그들의 육합천마진은 전대 철마성주도 겨우겨우 무너뜨렸다고 들었는데요?”
“흐음. 그러고보니 나도 육합천마진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보질 못했군. 육합천마진이라면 흑마육령의 내력이 하나가
되어 그것을 깨드릴 방법이 거의 없는 것으로 아는데?”
“아니 그럼 정말로 육합천마진을 단신으로 무너뜨렸단 말입니까?”
“그렇다네. 어디 그뿐인 줄 아는가? 황마철웅대의 대장 사적도 사로잡았다네.”
“하!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그렇게 젊은 나이에 어떻게?”
하후패는 그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무광 어르신의 제자라고 하더군.”
그 말에 여태껏 놀랐던 것은 장난이었다는 듯 입을 쩍 벌린 문정선이 간신히 물음을 던졌다.
“백년 전의 천하제일고수인 무광 은태정 선배님 말씀하시는 겁니까?”
하후패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살아계시다는군.”
“허허. 어떻게 아직 살아 계실 수 있단 말인지…”
유세운은 창백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방안에 누워 있는 유세운의 곁에는 백연혜가 의자를
갔다 놓고 앉아 있었다.
백연혜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유세운의 손을 잡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운오라버니. 어서 일어나요. 오라버니…”
아무 말 없이 창백한 표정으로 누워 있는 유세운을 바라보던 백연혜는 진심으로 하늘에 그가 무사하길 빌고 또
빌었다.
“끄응~”
자다 일어난 듯 머리를 감싸 안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던 유세운은 침대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어 있는 백연혜를
보고는 흠칫 놀랐다.
“헛! 깜짝이야.”
유세운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 보는 방안이었다.
“가만 분명히 내가 쓰러진 것 같기는 한데…”
유세운은 주변을 돌아보다가 고개를 흔들고는 백연혜를 다시 바라보았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백연혜는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유세운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슴푸레 밝아오는 새벽하늘을 바라본 유세운은 다시 백연혜를 내려다 보았다.
“훗. 이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유세운은 가볍게 진기를 일으켜 창문을 닫았다. 아니 닫으려했다.
“크윽!”
전신을 돌고 있어야할 내력이 단전에서 올라오다가 무엇엔가 막힌 듯 자신의 의지를 따르지 않고 고통만을 주었다.
유세운은 인상을 찌푸리고는 이불을 슬쩍 옮겨 백연혜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창백했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제기랄! 당해도 톡톡히 당했구만…”
유세운은 잠들어 있는 백연혜를 바라보고는 밝게 웃음 지었다.
“웃차!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유세운은 정좌(正坐)하고 운기조식(運氣調息)에 들어갔다. 사부에게 맞을 때도 이런 적은 없었다. 가벼운
내상정도는 항상 당해왔던 터라 그리 걱정되지 않지만 이정도면 간단한 상처가 아니다.
유세운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자연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심정으로 받아들인 숨은 단전까지 들어왔지만 다시
뻗어나가려고 하니 이곳저곳 막힌 곳들이 느껴졌다.
유세운은 조급하게 마음먹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게 운기조식을 해야 한다는 것은 몸으로 체득했다.
유세운은 막힌 곳을 천천히 하나씩 뚫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운기조식을 하던 유세운은 경혈이 막힌 곳 중 절반을 뚫고 나자 천천히 눈을 떴다.
‘이정도로 일단은 만족해야 겠군.’
눈을 뜬 유세운은 대략 반시진 정도 지난 것을 느꼈다. 그때까지도 백연혜는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유세운은 가만히 백연혜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누워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뜬눈으로
지새웠는지 눈 밑이 검어보였다. 유세운은 자기도 모르게 백연혜의 귀밑머리를 한올한올 넘겨주었다.
“에구. 그렇게 무리하고서는 편히 자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유세운은 고맙다는 표정을 지었다.
잠결에 느껴지는 손길에 백연혜는 어렴풋이 잠을 깨며 고개를 들었다.
“우~음…”
유세운은 깨어나는 백연혜를 보며 웃음 지었다.
“일어나지 말고 더자.”
유세운의 목소리를 들은 백연혜는 고개를 몇 번 흔들어 잠을 깨려고 했다. 눈을 비비며 유세운을 바라보던 백연혜는
얼굴색이 점점 환해졌다.
“운오라버니 언제 깼어요?”
“음? 조금 전에…”
“몸은 어때요?”
“뭐 이정도면 며칠 안에 완쾌할 수 있을 것 같아.”
“오라버니~”
백연혜는 불쑥 유세운의 목을 껴안으며 울먹였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제가 고집부리지만 않았어도…흑.”
유세운은 백연혜의 행동에 당황하여 얼굴이 빨개져서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유세운은 천천히 손을 올려
백연혜의 등을 토닥여줬다.
“아냐. 아냐. 연혜가 무사했으니 됐어. 그리고 나도 금방 나을텐데 뭘…”
“그래도…그래도…흑흑.”
“하하하. 울지마…”
유세운의 토닥임에 마음을 가라앉힌 백연혜는 당황했다.
‘어머!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한거지?’
백연혜는 빠르게 유세운의 품에서 빠져나오더니 옷매무새를 단정히 했다.
“흠흠. 다행이네요. 그럼 저는 이만 나가 볼게요.”
“응. 그만 가서 쉬어.”
유세운은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표정을 고치고 말했다. 백연혜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다가 문 앞에
서서는 조용히 말했다.
“고마워요. 무사해줘서…”
말을 마치고 나가는 백연혜를 보며 유세운의 입은 귀밑까지 찢어졌다. 유세운은 창밖으로 보이는 아침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사부! 이것도 다 사부가 이렇게 잘 길러준 덕인가 봐요. 하하핫!”
창운산장(蒼雲山莊)으로…(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