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별궁의 대청.
유태청은 차향을 음미하며 마시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유주란과 유청운이 앉아 차분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유독
유세운만 아직 차를 즐기지 못해서 그렇지 다른 아이들은 벌써 차의 향을 음미하며 먹는 것을 보고는 기분이
흐뭇해졌다. 다시 한 모금을 마시려던 유태청은 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중추절이라고 밖에 나갔다
온다던 유세운이 돌아 온 것 같았다.
“아버지. 저 다녀왔습니다.”
“그래. 금룡비무는 볼만 하더냐?”
“예, 정말 멋있더라고요.”
유세운은 손에 들고 있던 기름종이를 유주란에게 던졌다. 유주란은 가볍게 기름종이를 받아내더니 의아한 시선으로
유세운을 바라보았다. 유세운은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월병이야.”
“흠. 누나를 혼자 버려두고 밖에 나갔다오더니 양심은 있구나?”
“하하하. 당연하지. 누나 생각해서 사왔어.”
유주란은 아까부터 계속 실실거리는 유세운을 보며 아미를 찌푸렸다.
‘저 녀석이 갑자기 왜 저러지?’
유세운은 옆으로 비켜서며 자신의 뒤에 따라오던 위지남매를 소개했다.
“예전에 말씀드린 제 목숨을 구해주신 청의쌍검 위지남매에요.”
유세운의 소개에 유태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기는 들었었소. 내 자식의 목숨을 구해 준 점 진심으로 감사하오.”
유태청의 말에 위지평은 포권을 취하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때 아드님이 아니었으면 저희가 죽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격장지계로 마방을 격분시켜 우리가
살 수 있었죠.”
“허허허. 아무튼 고맙네. 차좀 들겠나?”
“예. 감사합니다.”
위지남매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위지청은 유주란의 옆에 앉아서는 웃으며 말을 건넸다.
“정말 소문 대로시군요. 독고극이 반할만 하네요.”
“응? 정말? 호호호. 고마워. 동생도 예쁜 걸.”
“호호호. 에이 언니 두 참.”
유세운은 유주란의 모습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위지평은 유청운의 옆에 앉아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위명만 들어오다가 지금이야 뵙는군요.”
“아닙니다. 청의쌍검의 협명(俠名)이야 제가 강호에 나가기 전부터 알려져 있었잖습니까.”
“그거야 저희가 너무 어려서 나가서 그런 것이죠. 하하하.”
위지평은 차분한 시선으로 유청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소문이 너무 잘 못 나있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삼룡삼봉을 뛰어넘을 만한 인재이신 것을 왜 사람들이 몰랐을지 의문입니다.”
진심어린 위지평의 말에 유청운은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과찬이십니다.”
“하하하. 너무 겸손하시군요.”
위지평의 시원한 웃음소리에 분위기는 금세 좋아졌다. 곧 시비들이 차를 내왔고 유세운은 유태청에게 말을 건넸다.
“위지남매가 무상을 뵈러 왔다는데 별궁에서 며칠만 묵었으면 합니다.”
“그래? 잘 되었구나. 그렇게 하자.”
유세운은 입가에 미소를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 저 조금 피곤해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그래. 들어가서 쉬거라.”
“예.”
유세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갔다. 방문을 닫아 건 유세운의 입가에는 어느새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유세운은 자신의 입술을 만져보았다. 아직도 그 꿈만 같던 순간이 믿어지지 않았다. 유세운은 몸을 날려 침대로
뛰어들었다. 이불에 얼굴을 파묻은 유세운의 입에서는 계속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큭큭큭.”
푸드드득.
날개를 접고 있는 비둘기를 보는 복상의 시선이 미묘하게 보였다. 검은색의 비둘기였다. 이것은 특별히 키워지고
있는 전서구로 개방에서도 장로급 이상만이 시급을 다투는 일에만 이용하는 흑연구(黑燕鳩)였다. 복상은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고 턱을 만져주고는 발목에 메어져 있는 전서를 꺼내 보았다. 전서를 읽는 복상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져
갔다.
덜컹-
“무슨 일이냐?”
문을 부술 듯 열고 들어오는 홍소를 보고 복상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부님. 문제가 조금 커진 것 같습니다.”
“무슨 문제냐? 흑연구로 날아올 정도의 시급한 문제더냐?”
“예.”
복상은 흑연구의 턱을 다시 만져주고는 자리에 앉았다. 홍소는 뜸을 들이는 제자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말했다.
“방에 무슨 일이 있는 거냐?”
“하하하. 사부님도 저희 방에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지금 방주님을 제일 잘 아시면서.”
“그건 그렇지. 그래 대체 무슨 일이냐?”
“철마성에 관한 일입니다.”
“철마성? 이번에 나온 녀석들 말이냐?”
“예.”
“그 녀석들이 뭐가 문제냐? 귀주지부장으로 있는 마멸극 원영극이라면 어지간한 내성의 고수라도 충분할 텐데?”
“예.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라는 것이냐?”
복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홍소에게 다가가 손에 들고 있는 전서를 넘겨주었다. 홍소는 복상이 넘겨준 전서를
받아들고는 표정이 일변했다.
“이게 사실이냐?”
“예.”
“원영극이 죽었다고?”
“예. 더군다나 귀주지부는 궤멸입니다. 지금 일부의 인물들이 탈주를 시작했다지만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
“내성에서 나온 자들은 누구인지 밝혀지지도 않았군.”
“그거라도 밝혀졌으면 좋았을 것을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복상은 홍소를 바라보았다. 홍소의 안색은 이미 더 이상 심각할 수 없을 만큼 굳어있었다. 복상이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말이냐?”
“저희가 창천궁을 도와야 하는 걸까요?”
“우리가?”
“아마 저희가 발 빠르게 움직이면 창천궁보다 먼저 탈주를 하고 있는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건 그렇겠지.”
홍소는 자신의 허리춤에 차고 있던 술병을 꺼내들었다. 홍소는 술병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일단 련주를 비롯해서 부련주와 각 당의 당주들을 모아 오거라.”
“예.”
복호산장의 대청에 모두 여섯 명의 사내가 앉아있었다. 가장 상석에 앉아있는 호강현은 침울한 표정을 짓고는 동철을
바라보았다.
“동부련주의 생각에 오늘 회의는 무슨 내용일 것 같소?”
동철은 반개한 눈을 들어 호강현을 바라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저도 들은 바가 없군요.”
“그렇소? 이것 참 이렇게 급하게 회의를 소집하시다니 무슨 일이시지?”
호강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청으로 들어서는 삼인이 있었다. 복상과 홍소, 그리고 현요진인이었다. 복상은
들어서더니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호강현이 자리에 일어나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현요진인이 자신의 불진을 한번 휘두르고는 입을 열었다.
“일단 사안이 너무 시급해서 모이게만 하게한 점 미안하게 생각하오.”
“아닙니다.”
호강현이 현요진인의 사과를 받아들이자 홍소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철마성에서 내성의 인물들까지 나서서 창천궁의 귀주지부로 향한 것을 알고 있을 것이오.”
“예. 알고 있습니다.”
홍소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예상외로 철마성에서 많은 전력을 투자한 듯 하오.”
“예상외라 하시면?”
“창천궁의 귀주지부가 궤멸되었소.”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좌중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지금껏 창천궁과 철마성이 이렇게 격렬하게 싸워 본적이
없었던바 그 결과는 좌중의 상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홍소는 손을 내저으며 말을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창천궁의 귀주지부 생존자들이 얼마나 되는 지는 모르겠지만 탈주를 시작했다는 것이오.”
“탈주를 말입니까?”
홍소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지금 그들을 구해주러 가는 것이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물으러 왔소.”
“그들을 저희가 말입니까?”
호강현의 물음에 현요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움직인다면 창천궁보다 먼저 그들을 도울 수 있소.”
“하지만 우리만으로 그들을 도와줄 수 있을까요?”
호강현의 물음에 현요진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자신할 수 없겠군. 하지만 우리가 목숨이 아까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돕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오.”
현요진인의 말에 호강현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결코 가벼운 사안이 아니었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몇 명, 아니
몇십 명이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호강현은 혜오와 동철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아직도 난 멀었단 말인가? 이들의 눈빛에는 전혀 주저함이 없지 않은가?’
호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일단 백호, 청룡, 주작, 현무당에서는 지금 바로 움직일 수 있는 고수 이십 명씩을
뽑아주시오. 그리고 나와 부련주 모두 이번에 나가도록 합시다.”
호강현의 호쾌한 명령에 당주들이 모두 고개를 숙였다.
“예.”
동철은 현요진인을 바라보았다. 현요진인의 눈에는 자신을 걱정하는 염려의 빛이 가득했다. 하지만 동철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제 태극혜검의 오의를 더욱 깊이 깨달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과연 실전에서도 가능한지를
알아야했다. 적이 강하면 강할수록 좋은 것이었다. 동철은 창밖으로 보이는 파란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세운. 파란 가을 하늘이 너를 생각나게 하는구나.’
출 전(出戰)(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