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중추절(仲秋節) [2]
귀주성의 수도인 귀양.
사계절이 봄처럼 온난하다 하여 춘성(春城)이라고 불리었다. 귀양의 서쪽에 위치한 창천궁의 귀주지부.
사방 백장이 넘는 길이의 담과 높이 이장에 달하는 대문이 있는 장원이었다. 장원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전각의
대청에 세 명의 사내가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대청의 상석에 앉아 있는 사내는 이미 초로에 접어든 사내였지만
그의 몸은 건장한 청년의 것에 못지않았다. 우람한 근육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세는 범의 기세와 같았다. 질끈
머리를 동여맨 영웅건의 중앙에 박힌 옥이 등불에 반짝였다. 부리부리한 호목(虎目)에 넓은 코는 호방하게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청음아. 네 생각에는 그들이 언제 올 것 같으냐?”
초로의 사내의 시선은 그의 왼편에 앉아 있는 사내를 향했다. 이마에 척마라고 쓰여 진 두건을 질끈 동여맨 사내는
이미 중년에 접어들어 있었다. 사내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버님. 아무래도 오늘이나 내일이면 그들이 들이 닥칠 것 같습니다.”
초로의 사내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오른편에 앉아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종아. 네 생각도 그러느냐?”
“예.”
초로의 사내 오른편에 앉아 있는 사내는 그 못지않은 덩치에 날카로운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생긴 것도 매우
닮아 있었다. 초로의 사내는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중추절에 무사들을 집에도 못 보내 주었군.”
“예.”
초로의 사내는 청음이라 불린 사내를 향해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문상이 신경 써 주셨군. 네가 나를 도우러 오다니 말이다.”
“예. 아버님. 문상께서 신경을 많이 써 주셨습니다.”
“그 친구. 참 좋은 친구야.”
초로의 사내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등 뒤에 걸려 있는 방천화극을 바라보았다. 길이가 일장에 달하는 방천화극은
등불을 받아 귀기스러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초로의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천화극에게 다가갔다. 방천화극을
슬며시 움켜쥐는 그의 손짓에는 애틋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귀주지부장이 된지도 벌써 십년이 되어가는 구나.”
“예.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습니다.”
“허허허. 세월이란 역시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군.”
초로의 사내는 방천화극을 들어 올렸다. 방천화극을 드는 것만으로 그의 기세가 삼엄하게 피어올랐다. 초로의 사내는
뒤로 돌아 두 명의 중년 사내들을 불렀다.
“원청음. 원종. 이리 오거라.”
“예.”
“예.”
원청음과 원종은 자리에서 일어나 초로의 사내에게 다가갔다. 초로의 사내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오늘 일은 길보다는 흉이 많을 것 같다. 너희 둘 중 한명은 반드시 살아남아 우리 원가의 뒤를 이어야
하느니라.”
“아버님. 어찌 그리 약한 말씀을…”
창천척마대의 대장인 원청음의 말을 초로의 사내는 손을 들어 막았다.
“나 원영극 이미 세상을 살아오면서 후회는 없다. 단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이라면 너희가 너무 무에 심취한 나머지
아직 대를 잇지 못했다는 것뿐이다.”
원영극은 가만히 고개를 돌려 창밖에 가득 월광을 뿌리고 있는 만월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문상이 신경을 써 준덕에 궁에서 창천척마대를 보내 주어서 이렇게 청음이를 보게 된 것은 어쩌면 우리
가문의 대가 끊이지 않길 바라는 조상님들의 뜻일 수도 있느니라.”
“아버님…”
원영극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닮은 원종과 자신의 죽은 아내를 닮은 원청음을 바라보았다. 둘 중 어느 누가 더
소중하겠냐마는 원영극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이미 들었다시피 저쪽에서는 아마 내성의 인물들이 올 것이다. 그들은 내가 막을 테니 그동안 종이는 이곳의
창영검대(蒼影劍隊)를 데리고 홍마철시대를 막도록 하거라. 그리고 청음이는 황마철웅대를 막도록 하고 하지만 내가
만약 당한다면 주저 하지 말고 훗날을 도모 하거라.”
“예. 아버님.”
침중한 표정으로 원청음이 대답을 하자 원종도 같이 고개를 숙였다. 원영극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자신의 두 아들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들려오는 파공음에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슈슈슈슈슉-
원영극은 대뜸 대청의 창문을 부수고 밖으로 나왔다. 하늘을 가득 메우며 날아오는 철시들이 보였다. 원영극은
내력을 담아 소리치며 몸을 날렸다.
“내습이다! 모두 나와 적도들을 막아라!”
원영극의 방천화극이 원을 그리며 철시들을 튕겨냈다.
팅! 팅! 팅! 팅!
원영극의 뒤로 원청음이 따라 나오며 내력을 담아 소리쳤다.
“창천척마대는 모두 나와 척마멸진(斥魔滅陣) 제 일 형을 펼쳐라!”
“예!”
우렁찬 대답과 함께 오백 명으로 구성된 창천척마대인물들이 나와 반월형으로 진을 형성했다. 원청음은 창천척마대의
가장 선두에 서서 장원의 정문을 바라보았다. 원종도 자신의 커다란 방천극을 휘두르며 뛰쳐나왔다.
“창영검대는 나를 따르라!”
원종은 방천극을 휘두르며 장원의 서문으로 달려갔다. 그의 뒤를 따라 삼백의 창영검대가 뒤를 따랐다. 원영극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원영극이 원청음보다 앞으로 나섰을 때 장원의 문이 산산조각이 났다.
콰쾅!
원영극은 먼지사이로 걸어 들어오는 자를 보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흑웅마(黑熊魔) 사적인가?”
“크크크. 이거 나 같은 녀석을 기억해주다니 고맙기 한량없군.”
사적은 자신의 곰같이 거대한 덩치를 거들먹거리며 들어와서는 원영극을 보고 웃음 지었다. 원청음이 검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건방진!”
사적은 원청음을 보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대체 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키기에 저렇게 생각이 없는 건가?”
“허허허. 사가야. 그동안 입심만 늘었나보구나.”
원영극은 흥분하는 원청음을 말리고서는 앞으로 나섰다. 원영극이 천천히 방천화극을 들어 사적을 가리키자 그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거 왜 이러시나? 당신정도 되는 사람이 나랑 놀아나면 격이 맞지 않지.”
“무슨 말이냐?”
사적은 입가에 비릿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자네를 위해 내성에서 직접 몸소 찾아오신 분들이 계시다구.”
“분들?”
“그래. 크크크. 자네도 만족할 것 같은데? 철마십영(鐵魔十影)이 나오셨지.”
“뭣이!”
원영극의 뒤에 서 있던 원청음이 경악을 토해냈다. 사적은 코를 한번 찡그리고는 웃음을 지었다.
“크크크. 그럼 나는 자네 아들놈이랑 놀아나 볼까? 건방진 녀석 버릇은 내가 확실히 고쳐주지.”
원영극은 가만히 사적을 쏘아보다가 원청음에게 전음을 날렸다.
(아까 한말을 잊지 말거라.)
(아버님…)
원청음은 침음성을 삼켰다. 원영극의 예상대로 상황은 최악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철마십영이라면 내성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몇 안 되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강호에서 저지른 살인 방화만도 만만치 않지만 그들이 가장 유명하게 된
것은 국서방(國西房)이라는 방파와의 알력이 생기고 그날 저녁 삼백 명에 달하는 국서방을 멸문시켰던데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벌써 이십 년 전의 일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강해졌을지는 알 수 없었다.
원영극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방천화극으로 땅을 짚었다.
“나오라. 철마십영!”
“크크크. 이거 소문으로만 듣던 마멸극 원영극을 만나보는군.”
음침한 괴소(怪笑)와 함께 열개의 인영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 흑의를 입은 열 명의 노인들이 장내에 나타나자
그들의 존재감만으로도 분위기가 돌변했다. 원청음이 침음성을 삼켰다.
“철마십영…”
노인 중 가장 앞에 서 있던 자가 원청음을 돌아보며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 아이인가 보군. 크크크.”
원영극은 옆으로 한 걸음 옮겨 원청음을 가리며 섰다. 방천화극을 들어 자세를 바로 하자 태산과 같은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후후 벌써 시작하자는 건가?”
“철마십영들중 자네만 유독 말이 많군. 실력도 그 말만큼 출중하길 바라내.”
원영극의 말에 노인의 입가가 씰룩였다.
“크크크 예전부터 마멸극 원영극의 방천화극을 한번 견식해 보고 싶었지.”
“사양하지 않겠다. 덤벼라.”
그들 뒤에서 지켜만 보던 사적이 뺨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곡가 이 녀석은 왜 이리 안 오는 거지?”
“곡가라면… 패력구(覇力毬) 곡칠을 말하는 거냐?”
원청음의 물음에 사적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뭘 먹고 크면 그렇게 말을 잘라 먹게 되는 것이냐?”
원청음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사적은 능글맞게 웃음을 지었다.
“그럼 홍마철시대의 대장이 이곳에 오지 않으면 그들은 누가 통솔한단 말이냐?”
“크윽!”
원청음이 침음성을 삼키는 것을 보고 사적은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이곳에서 살아나갈 자는 아무도 없다.”
“헛소리 하지 마라.”
“그럴까? 황마철웅대는 들어라!”
“예!”
사적의 내력이 담긴 목소리가 울리자 장원의 밖에서 우렁찬 대답소리들이 들려왔다. 사적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황마철웅대 전원에게 명한다. 지금부터 창천궁 귀주지부의 쥐새끼 한 마리도 살려두지 마라!”
“존명!”
높이 이장이 넘는 담벼락 위로 일시에 솟구쳐 오르는 거구의 사내들의 모습은 장관을 이루었다. 원청음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찰나 사적의 일갈이 터져 나왔다.
“쳐라!”
휘리리릭-
커다란 황색장포를 휘날리며 장원으로 달려드는 자들을 보며 원청음의 입에서 일갈이 터져 나왔다.
“척마멸진 이형 산개!”
“존명!”
원청음의 뒤에서 부챗살처럼 척마대원들이 솟구쳐 오르며 황마철웅대를 맞이해 갔다.
콰쾅!
“크악!”
“아악!”
대번에 수명의 사상자가 나며 장원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황마철웅대의 진격이 막혔다. 원청음은 주저 없이 몸을
날리며 검을 뻗었다. 원청음의 검에서 푸른 검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사적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는 천천히
일권을 내뻗었다. 사적의 일권에 담긴 경력은 노도와 같이 원청음의 검기를 짓이기며 밀려왔다. 원청음은 빠르게
삼검을 쳐내고는 뒤로 훌쩍 물러났다.
차차창!
원청음의 침중한 표정을 보고 사적은 비릿하게 웃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단신으로 내게 덤비는지 모르겠다만 그렇다면 이곳에서 네놈의 피가 가장 먼저 땅을 적실
것이다.”
“헛소리!”
원영극은 원청음이 고전을 면치 못하자 안색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철마십영은 어느새 원영극을 원형으로 둘러싼
채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우리의 연수합격을 받는 것을 영광으로 알게나. 크크크.”
“그만 떠들고 덤벼라. 밤은 그리 길지 않다.”
“크크크. 조급해하지 말게. 어차피 이곳에서 살아나갈 자는 없어. 내성에서는 우리만 온 것이 아닐세.”
“뭣이?”
원영극의 눈이 커지자 철마십영들의 얼굴에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아마 자네의 둘째 아들이었나? 밖으로 튀어나가던 녀석의 목이 가장 먼저 떨어질 걸세.”
“갈!”
원영극은 그들의 말을 듣는 순간 신형을 앞으로 쏘아내며 방천화극을 휘둘렀다.
중추절(仲秋節)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