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다가닥. 다가닥.
유세운은 기분이 좋아졌다. 오랜만에 타보는 말도 그렇고 그리고 옆에서 같이 말을 몰고 있는 백연혜의 모습만 봐도
그랬다. 그래도 궁에서 벗어난다고 예전처럼 백의 면사를 쓰고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더욱 흥취를 돋우었다. 요란한
폭죽소리가 들리고 온통 들떠 있는 분위기였다. 내궁을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에 도착한 유세운은 주변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백연혜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기로 가요.”
“응? 응.”
유세운은 고개를 돌려 백연혜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창천루라고 이름이 적힌 사 층짜리 주루가 눈에 들어왔다.
유세운은 천천히 말을 몰아 창천루로 향했다. 창천루 앞에 깔끔하게 차려입은 점소이가 빠르게 달려와 말고삐를
받았다. 유세운이 말에서 내리자 점소이는 백연혜의 백마를 같이 데리고 갔다. 백연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간
유세운은 헛기침을 해댔다.
“흠. 흠. 이거 장난 아닌 곳인데?”
“창천궁내의 고위급 간부들이 주로 오는 곳이에요.”
“그래서 그런가?”
유세운은 눈에 보이는 것 어느 것 하나 일반 주루에서 볼 수 없는 최고급으로 만들어진 주루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백연혜가 앞장서서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자 유세운도 아무 말 없이 따라 걸음을 옮겼다. 사층의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자 비단 옷을 차려입은 중년의 사내가 다가왔다.
“아니 공녀님이 이곳엔 웬일이십니까?”
“궁안에만 있자니 심심해서 나왔어요.”
“허허허. 그러셨군요. 뭐로 드시겠습니까? 오늘은 소인이 계산할 테니 마음껏 드십시오.”
“고마워요. 루주님. 그럼 일단 간단한 요깃거리와 국화주(國花酒) 한 병만 주세요.”
“그렇게 하지요.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중년의 사내는 고개를 숙이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유세운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누구지? 본신의 실력도 보통이 아닌 듯한데?”
“이곳 창천루의 루주세요. 실은 아버지의 사제 뻘 되시는 분이신데 창천루를 차리신 체 이곳에서 그림을 벗하며
살고 계세요.”
“흠. 그래서 그랬나? 적어도 여기서 난동을 부릴 만한 자들은 없겠군.”
“호호. 그렇죠.”
백연혜는 유세운의 말에 웃음을 지었다. 유세운은 창밖으로 보이는 만월(滿月)을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데?”
“어떤게요?”
“이 마을. 들어올 때는 보지 못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이곳은 우리가 들어 올 때의 입구와 반대쪽인 걸요. 내궁으로 바로 들어가려고
우리는 남문으로 왔으니까요. 이쪽은 창천궁의 북문 쪽이라고 보면 될 거예요.”
“흠. 그래서 그랬나 보군.”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세운은 창밖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큰 걸? 없는 게 없어 보여.”
“후훗. 그럼요. 이곳에서 없는 건 다른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거예요.”
“정말? 그럼 밥 먹고 나서 둘러봐야 겠군.”
“그래요.”
백연혜가 고개를 끄덕일 때 점소이가 국화주와 회과육(回鍋肉)을 내왔다. 유세운은 백연혜의 잔에 국화주를 따라 준
다음 자신의 잔에 가득 채우고서는 잔을 들었다.
“연혜의 건강을 기원하며.”
“운오라버니도 건강하세요.”
유세운과 백연혜는 국화주를 마시고는 회과육을 한점씩 먹었다. 유세운은 다시 잔을 채우며 웃음 지었다.
“향이 좋은데.”
“호호. 창천루의 국화주라고 하면 유명해요.”
“그런가? 어쩐지…”
유세운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눈에 띄는 상점을 발견하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혜. 가보고 싶은 곳이 생겼어.”
“예? 하지만 이제 막…”
“이따 다시 오고 일단 가자.”
백연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세운은 백연혜와 함께 내려가다가 계단을 올라오는 창천루주를
만났다. 창천루주가 의아해 하며 물었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십니까?”
유세운은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아니요. 국화주와 회과육 모두 일품이더군요. 잠시 다녀올 데가 있어서 일어났습니다.”
“그러시군요.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계단에서 물러나는 창천루주에게 가볍게 고개 숙여 보인 유세운은 그를 지나쳐 밖으로 나왔다. 백연혜가 따라 나오며
물었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시려는 거예요?”
“저기에 가자.”
유세운이 가리킨 곳에는 여인들의 장신구를 파는 첨화상(沾花商)이 보였다. 백연혜가 바라보자 유세운은 헛기침을
했다.
“흠. 흠. 어서 가보자.”
“예? 오라버니가 장신구를요?”
“응? 아 저기 선물할 데가 있어서…”
“그래요? 흠…누굴까? 오라버니에게 선물을 받을 사람은?”
귀엽게 흘겨보는 백연혜에게 유세운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유세운은 먼저 걸음을 옮겨 첨화상으로 다가갔다.
첨화상 안으로 들어가려던 유세운은 안에서 옥신각신하는 소리를 들었다.
“오빠! 나 이거 사줘~응?”
“안돼. 우리가 무슨 돈이 있다고 이렇게 비싼 걸 산단 말이냐.”
“체! 왜 없어? 문에서 나올 때 사부님이 주신 돈이 있잖아!”
“그건 우리 경비야.”
“창천궁에 다 왔는데 경비가 무슨 필요해?”
“우리는 돌아가지 않고 여기 눌러 살거냐?”
“그…그건.”
유세운은 왠지 귀에 익은 목소리다 싶어 안으로 들어가서 말다툼을 하고 있는 남녀를 바라보았다. 청의를 입은 두
남녀는 한참 다투다가 유세운이 들어오자 약간 비키며 무심코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청의를 입은 여인의 두 눈이
커지며 유세운에게 물었다.
“어? 세운 오빠야?”
“응? 누구…?”
유세운은 갑작스레 자신을 아는 척 하는 여인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와! 맞구나! 오빠 나 청이야. 위지청!”
그녀의 말에 유세운은 자세히 바라보았다. 예전과 같이 커다란 눈을 가진 이제 숙녀의 티를 물씬 풍기는 얼굴에서
위지청임을 알아보고 웃으며 인사했다.
“하핫. 정말이네? 평형님도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하하. 그래. 그런데 자네는 천룡문으로 수련을 하러 간다더니 이곳엔 웬일인가?”
“아. 그게 말이죠. 어쩌다 이렇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곳에 머물고 있죠.”
“흠. 그런가? 하여튼 반갑군.”
“아! 잠시만요.”
유세운은 백연혜를 불러 소개시켰다.
“연혜. 이리와 봐. 처음 무림에 나왔을 때 만난 분들이야. 청의쌍검이라고…”
“예. 알고 있어요. 오랜만이네요.”
백연혜가 인사하자 위지평이 놀란 눈으로 서둘러 포권을 취했다.
“아니 백소저 아니시오? 이런 곳에는 어쩐 일이시오?”
“중추절인지라 구경 나왔어요.”
“흠. 우리 이럴게 아니라 어디 가서 술이라도 하면서 얘기하지.”
위지평의 말에 유세운은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형님이 연혜랑 같이 창천루에 가 계세요. 전 여기서 청아랑 뭣 좀 산 다음에 가겠습니다.”
“그러겠나? 알았네.”
“그러세요.”
백연혜는 이상한 눈초리로 유세운과 위지청을 바라보더니 위지평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유세운은 그들이 나가자
위지청에게 말을 꺼냈다.
“저기 있잖아…”
“왜요?”
“흠. 여자한테 선물을 하고 싶은데…”
유세운의 말에 위지청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아하! 백소저에게 선물을 하려고 그러는 군요?”
“응? 헉! 아니 그것을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위지청의 말에 유세운은 기겁을 했다. 위지청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호호. 다 아는 수가 있죠.”
“그럼 도와주는 거지?”
“호호. 그런데 어쩌죠? 이곳 물건들은 세공(細工)이 뛰어나고 아름다운 것이 많지만 가격이 상당히 비싸요.”
“음. 돈이라면 조금 있어.”
“정말요? 흠. 그럼 제것도 하나 사주실 수 있어요?”
“응. 아마…”
유세운의 대답에 위지청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와! 잘됐다. 알았어요. 어디보자~”
위지청은 기뻐하며 장신구들을 예리한 눈으로 살피기 시작했다. 유세운도 그 옆에서 장신구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잠시 후 위지청은 옥으로 된 비녀를 하나 들어 올렸다. 봉황이 아름답게 세공된 옥비녀를 유세운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이거 어때요?”
“오~예쁜데. 좋아. 이걸로 해야겠다. 주인장~”
유세운의 부름에 뚱뚱한 덩치의 주인이 달려왔다. 주인장은 유세운의 손에 들린 봉황비를 보고서는 눈을 빛냈다.
유세운은 주인의 눈빛에 의아함을 느끼고 물었다.
“이거 얼마요?”
“예. 손님 그것은 얼마 전에 들어 온 건데 가격은 황금 다섯냥입니다.”
“엑! 말도 안돼! 오빠 그거 사지 말아요! 그렇게 비싼게 어딨어!”
위지청이 버럭 화를 내자 주인장은 비단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아가씨. 이건 저희도 비싸게 들어온 건지라…”
“안돼요! 그래도 이게 무슨 황금 다섯 냥이나 한단 말이에요?”
주인은 땀을 닦다가 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저…그럼 네냥에…”
“안돼요! 두 냥!”
“아이구 아가씨 그럼 저희 가게는 망합니다. 황금 세 냥에 해주십시오.”
유세운은 가격흥정을 하는 위지청의 모습을 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네가 갖고 싶은 것도 골라야지?”
“아! 난 이걸루~ 헤헷.”
위지청은 금으로 세밀하게 세공된 아름다운 팔찌를 골랐다. 유세운은 주인을 바라보았다. 주인은 유세운의 눈빛을
받고는 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예. 저건 황금 네 냥 짜리로…”
“뭐라고욧!”
버럭 화를 내는 위지청에게 찔끔한 주인은 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아닙니다. 두개 합쳐서 여섯 냥만 주십시오.”
“안돼요! 네 냥으로 해요!”
“아가씨 그러면 저희는 정말로 망합니다. 두개 합쳐서 다섯 냥 이하는 안 됩니다.”
유세운은 그래도 비싸다고 깎으려고 하는 위지청을 말리고 품에서 금표를 꺼내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위지청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오빠~ 천룡문 가서 무공은 수련안하고 사업했어? 웬 돈이 그리도 많아?”
“응? 하하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위지청은 가만히 유세운을 흘겨보다가 자신의 팔찌를 보고는 웃음 지었다.
“후훗. 하여튼 고마워.”
유세운은 위지청을 바라보며 마주 웃음 지었다.
“어서가자. 늦겠다.”
“응. 그래.”
유세운과 위지청은 서둘러 창천루로 향했다.
중추절(仲秋節)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