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주변의 모든 풍경이 고요하게 느껴졌다. 싸늘한 밤공기가 전신의 감각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고 있었다. 깊이 들이
마신 기운은 전신으로 퍼지며 정신을 더욱 맑게 했다.
검극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뭐든 일검에 벨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천천히 검을 누이자 검에서 새하얀 검강이 피워
올랐다. 검극이 작게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원을 그리던 검극이 기묘한 원을 그렸다. 검극에서 피어나는
태극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태극이 시야를 가리며 온통 세상을 하나로 아우르는 것만 같았다.
“핫!”
기합성과 함께 검을 떠난 태극은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크크크. 그동안 진전이 꽤 있었구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사부님.”
나무 뒤에서 걸어오는 현요진인은 불진을 가볍게 휘둘러 벌레들을 때려잡았다.
“아직도 이렇게 벌레들이 판을 치는군.”
“중추절이 다 되가는데도 벌레들이 사라지질 않는군요.”
“그러게 말이다. 쯧쯧.”
현요진인은 혀를 차며 동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 펼친 태극혜검은 기존의 태극혜검이 아니었다. 부드러움이
위주가 되어야 할 검에 강력함이 실려 있었다. 그것도 보통의 강력함이 아니었다. 현요진인은 혀를 차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
“예?”
“네놈의 검에 부드러움보다 강함이 더 깃들어 있더구나.”
“그건…”
주저하는 동철을 보며 현요진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동철이 간신히 말을 이었다.
“세운이의 권을 보며 강이라는 것에서 뭔가를 느껴서 그랬습니다.”
“쯧쯧.”
현요진인은 혀를 차고는 불진을 들어 동철을 가리켰다.
“그런 생각을 버리게 해주마. 검을 들어라.”
“예?”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 했다. 멍청한 녀석 유의 끝을 보지도 못한 녀석이 엉뚱한 길로 세려고 하다니 내게
펼쳐보아라.”
동철은 주저하며 검을 들어올렸다. 현요진인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네가 지금 나를 걱정하는 거냐? 멍청한 녀석. 덤벼라.”
동철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검을 들어 올렸다. 검극 너머로 사부의 모습이 결코 자신의 검에 당할 것 같지는
않았다. 동철은 마음을 비웠다.
현요진인은 마음을 다스리며 검에 진기를 싣는 동철을 보며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녀석. 그래도 정말 많이 컸군.’
동철의 검극이 움직이며 원을 그리기 시작하자 현요진인도 안색을 미미하게 굳혔다. 비록 강함이 깃들어 있기는
했지만 동철의 성취도 결코 얕지 않음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자신이었다. 불진에 진기를 불어 넣고는 부드럽고
천천히 태극을 그리기 시작했다.
동철은 사부의 불진이 그리는 태극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태극을 그림에 있어 끊어짐이 없다.’
동철은 자신의 검에 검강이 맺히자 주저 없이 유에 강을 더해갔다. 유세운의 권격을 보면서 느낀 것은 절대의
강이었다. 일권에 담긴 강함을 보고 자신이 익히고 있는 능유제강(能柔制剛)에 대한 심한 회의가 느껴졌다. 그
해결법으로 생각한 것이 유와 강의 혼합이었다. 부드러움에 있어 강호의 일절로 꼽히기에 전혀 손색이 없는
태극혜검에 강함을 실어서 이제 어느 정도의 성과가 보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사부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면
다시는 이것을 수련 못할 터였다.
“차핫!”
기합을 지르며 마음을 다잡고 태극을 이루는 강기를 날렸다.
현요진인은 자신에게 날아오는 태극문양의 강기를 보고는 불진으로 그리는 태극 문양에 느리고 부드러운 기운을
담았다. 빠름에는 느림으로 강함에는 부드러움으로 대응하는 원리를 이용하여 동철의 기운을 받았다. 잠시 부드럽게
받아들이다가 사량발천근(四量撥千劤)의 원리를 이용 하늘로 동철의 강기를 날려 보냈다. 동철의 얼굴에 허탈함이
깃들었다.
“허허. 녀석 제법이구나.”
현요진인은 진심을 담아 동철을 칭찬했다. 솔직히 동철의 기운을 받아 넘기기만도 벅찼다. 현요진인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하지만 동철의 얼굴에는 씁쓸함만이 남아있었다. 현요진인은 가볍게 불진을 내렸다.
팔랑~
불진에서 몇 가닥이 잘려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현요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에 강을 혼합하는 것이 그리 나쁘지는 않구나.”
현요진인의 말에 동철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하지만 현요진인은 고개를 들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예?”
“그 정도의 성취에 벌써 다른 것을 혼합하는 것은 좋지 않다. 되레 너에게 해가 된다.”
“…예.”
고개를 숙이는 동철에게 현요진인이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런 것을 익히기 전에는 내게 먼저 말을 하거라. 잘못하면 주화입마에 빠질 수 있다.”
“예.”
현요진인은 자신의 불진을 들어 벌레를 쫓아내며 말을 이었다.
“유의 끝을 보기에도 벅차다. 나도 아직 멀었거늘 조금 성급한 감이 있었다.”
“예.”
현요진인은 고개를 끄덕이는 동철에게 다가갔다. 현요진인은 동철의 어깨를 두들기며 입을 열었다.
“녀석 시도는 좋았다. 네가 때가 되면 일러주마. 그렇게 알고 태극혜검에 더욱 깊이 빠져 들 거라.”
“예. 알겠습니다.”
“그럼 들어가 쉬거라. 너무 무리해서 좋을 것은 없다.”
“예.”
현요진인은 붉은 얼굴에 웃음을 짓고는 돌아서 들어갔다. 동철은 말없이 멀어지는 현요진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연무장 구석에 위치한 바위에 걸터앉아 검을 들어 올렸다. 월광이 검에 닿아 은은히
빛났다. 동철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너무 성급했나 보군. 세운이를 그렇게 쉽게 따라 잡으려고 하다니…”
유세운을 만나고 오고 나서 현요진인에게 말을 듣고 나서는 광검에 집착을 해서 인지 자신도 모르게 조급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아직 태극혜검의 오의도 완전히 깨우치지 못하고서 뭐하는 것인지…”
말끝을 흐린 동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연무장의 중앙으로 향했다. 검을 들어올려 자세를 잡으려던 동철은 누군가
연무장으로 다가오는 것을 알고는 검을 내렸다. 잠시 후 동철의 눈에 복상의 부스스한 모습이 보였다. 복상은
다가오며 가볍게 투덜거렸다.
“아 이런 밤늦게 뭐하는 거냐?”
“응? 그저 수련을 하고 있었어.”
복상은 피식 웃더니 걸음을 옮겨 방금 전까지 동철이 앉아 있던 바위 위로 다가가 앉아서는 허리춤의 호로병을 꺼내
들었다. 마개를 열고 향을 맡은 복상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런 월광 아래 검이나 휘두르고 있다니…쯧쯧. 이럴 때는 술이나 한잔 해야지 말야.”
“술은 무슨 술.”
고개를 흔들며 다가오는 동철을 향해 복상은 투덜거렸다.
“너는 이런 월광을 보고 내 생각도 안 나든? 참내 이런 녀석을 술이나 한잔 하자고 찾아온 내가 잘못이지.”
동철은 말없이 복상의 옆에 앉았다. 동철은 말없이 복상을 바라보다가 하늘에 떠있는 달을 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어?”
동철의 물음에 복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호로병의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쩝. 안주가 없는 게 아쉽군.”
복상은 가만히 동철의 옆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무슨 일이 있기는 하지.”
“무슨 일인데?”
“철마성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철마성이?”
복상은 동철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그것도 진지하게 나선 것 같아.”
“무슨 말이야? 진지하게라니.”
“네 친구라는 일권무적 유세운 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입은 걸 단숨에 보상하려는 듯 꽤나 핵심적인 녀석들이 기어
나왔어.”
“핵심적인 녀석?”
동철의 물음에 복상은 다시 한 모금 술을 들이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내성의 인물들도 나온 것 같아.”
“뭐?”
놀라 되묻는 동철을 바라보며 복상은 다시 한 모금을 들이켰다.
“흐음. 아마 창천궁에서도 속이 타게 생겼어.”
“그렇게 무모하게 나온단 말야?”
“솔직히 무리수이긴 하지. 하지만 이미 흑마천살대와 철탑백마인이 창천궁에 잡혀 버린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을 거야.”
“하긴 독고극도 창천궁에 포로로 잡혀 있으니 그들도 속이 타긴 하겠군.”
“그래. 어쩔 수 없지. 누가 뭐래도 독고극 정도의 포로라면 몸값이 조금 나갈 테니까.”
동철은 수긍이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철은 부스스한 모습의 복상을 보며 넌지시 물었다.
“그 소식 때문에 자다 일어난 거야?”
“크윽. 그러게 말이다. 바보 같은 현무당 녀석들. 시급을 다투는 사안도 아니거늘 자는 사람을 깨우면서
알려주다니. 언제 한번 버르장머리들을 고쳐 줘야 할 것 같아.”
“하하하. 어쩔 수 없지. 그리고 가벼운 사안도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동철의 말에 웃음지은 복상은 호로병을 내밀었다. 동철은 호로병을 받아 들어 가볍게 흔들어 보았다. 동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곡차라…마신지 꽤나 오래 된 것 같군.”
“쳇. 곡차 타령하기는 마시기나 해.”
“그래.”
동철은 가볍게 한 모금을 마시고는 입가에 흐르는 술을 소매로 닦았다.
“크~ 좋군.”
동철의 손에서 호로병을 낚아채가며 복상은 연무장 바닥에 드러누웠다.
“어떻게 될 것 같냐?”
“뭐가?”
“이번 철마성의 본격적인 발호에 정협련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복상의 물음에 동철은 그의 옆에 같이 드러누우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나선다고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그건 그렇지만 우리의 도움이라도 필요하지 않을까?”
복상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결정은 련주와 윗분들이 알아서들 하시겠지.”
“응.”
누운 채로 고개를 끄덕이는 동철을 바라보던 복상은 호로병을 기울여 한 모금을 들이키고는 말했다.
“모르지. 이렇게 편안하게 얘기하는 것도 마지막일지도. 우리 구파일방에서도 손을 놓고 있지만은 못할 거야. 무림
정세에 영향을 끼칠만한 일이니까.”
“그런가?”
가벼운 마음으로 반문하는 동철의 눈에 하늘에 떠 있는 달이 비춰졌다.
창명백검수蒼明百劍手)를 맡아주게(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