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떠나는 영호천.”
온통 어둠만이 가득한 세상에 옥빛의 기운이 슬며시 들어와 천천히 주변을 떠돌기 시작했다. 어둠을 조금씩 불사르며 움직이던 옥빛의 기운은 사지백해를 떠돌기 시작했다. 모든 신경은 그 옥빛의 기운에게 집중되었다. 여태껏 느끼지도 못했던 많은 기혈(氣穴)들을 깨닫게 되었다. 옥빛의 기운은 천천히 전신을 돌고는 기해혈로 다가갔다. 이미 기해혈에 자리 잡고 있던 칠흑 같은 기운에게 옥빛의 기운은 슬며시 다가갔다.
칠흑 같은 기운은 거세게 반발했다. 칠흑 같은 기운이 반발하자 전신의 기혈들이 아우성을 쳤다. 하지만 옥빛의 기운은 아주 가늘게 변하더니 칠흑 같은 기운을 감싸 안기 시작했다. 칠흑 같은 기운도 옥빛의 기운이 감싸 안자 약간의 반발을 하고는 조용해졌다. 옥빛의 기운은 얇은 막처럼 칠흑 같은 기운을 둘러싸더니 천천히 융합되어 갔다. 얼마의 시간이 걸린 것인지 모르겠지만 옥빛의 기운은 칠흑 같은 기운에 모두 융합 되었다.
칠흑 같은 기운은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해져서는 기해혈을 가득 채웠다. 칠흑 같은 기운이 천천히 기해혈을 빠져나와 전신의 경맥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와 위력으로 경맥을 돌고 돌아온 칠흑의 기운은 다시 기해혈에 웅크리며 자리를 잡았다.
“휴우~”
전신의 탁한 기운이 한꺼번에 뿜어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유청운은 천천히 눈을 떴다. 검의 의지를 따라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른 기억밖에 나지 않았다. 대체 언제 정신을 잃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바닥에 드러누운 체로 고개를 돌려 주변을 보았다. 의외로 선실에는 아무런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유청운은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이제 일어난 거요?”
유청운은 선실의 반대쪽에서 들린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그의 반대쪽에 벽에 기대 앉아 있는 죽립의 사내. 영호천이 보였다.
“얼마나 쓰러져 있던 겁니까?”
“하루 정도 지난 거 같군요.”
“…하루라”
영호천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술병을 유청운을 향해 던졌다. 천천히 날아오던 술병은 유청운의 앞에 와서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유청운은 술병을 받아 한 모금을 들이마셨다.
“크으~”
“후후후.”
영호천의 웃음에 유청운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뭣 때문에 그렇게 웃는 거요?”
“유소제보다 술이 약하신 것 같소이다.”
“하하하. 그거야 녀석이 그렇게 술을 잘 마시게 되서 돌아올 줄은 몰랐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니겠소.”
영호천은 자신의 옆에 놓여 있던 술병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유청운도 영호천을 따라 선실 벽에 등을 기대었다. 유청운은 술병을 들어 한 모금을 더 마셨다.
“크으~ 그럼 대체 우리가 여기 있던 시간이 얼마나 된 거요?”
“오늘로써 정확히 일주일이 지났군요.”
“일주일이라…약속한 시간이 지났군요.”
“그렇소.”
유청운은 고개를 들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결과는 어떻소?”
“후후후 그건 유공자가 더 잘 아시지 않소?”
유청운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정확히 모르겠소. 지금 몸 안에서 용솟음치는 기운도 실감이 나질 않소.”
“흐음. 아마 이제는 약 일갑자 정도의 내력을 가졌을 거요.”
“일갑자라고 하셨소?”
“그렇소.”
유청운은 어이가 없는 눈빛으로 영호천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확신하시오?”
“유공자가 주화입마에 걸릴까봐 내가 먹인 옥양환(玉陽丸)이라면 충분히 그 정도의 내력이 되고도 남을 거요.”
“그런 것을 왜 나에게 먹인 것이오?”
유청운의 물음에 영호천은 묵묵히 술만 들이켰다. 유청운은 말없이 영호천을 바라만 보았다. 술병을 바닥에 내려놓고도 묵묵히 있던 영호천은 천천히 자조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냥 유소제 때문이라고만 생각해 주시오.”
“그 정도로는 납득할 수 없소.”
영호천은 말없이 유청운을 바라보았다. 유청운은 흥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빚을 지고 살 수는 없소.”
영호천은 결국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오? 이미 줘버렸는데 말이오?”
유청운은 영호천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진중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납득할 수 없는 도움을 받았다면 돌려주는 것이 마땅하오. 뜻하지 않게 받은 내력은 돌려주겠소.”
말을 마침과 동시에 내력을 역행하려 하자 영호천은 허탈하게 입을 열었다.
“됐소. 누가 유가장 사람이 아니랄까봐 그렇게 까지 하겠다는 거요.”
“…대체 이유가 뭐요?”
영호천은 가만히 등을 선실의 벽에 기대었다. 장강의 출렁임이 몸으로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영호천은 생각하기 싫은 과거를 떠올렸다.
“한 형제가 있었소.”
유청운은 영호천이 말을 꺼내자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영호천은 다시 한 모금 술을 들이켰다.
“형제는 우애가 아주 깊었다오.”
영호천은 자신의 옆에 끌러 놓았던 고검을 품에 안으며 말을 이었다.
“형은 무에 관심이 있었고 병약한 동생은 문에 관심이 있었소.”
영호천은 천천히 고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영호천은 고검을 바라보며 입가에 비릿한 조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형제의 아버지는 평생을 무에만 바치신 분이었소.”
영호천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슈앙-
잔광을 남기며 지나가는 검의 모습을 보며 유청운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형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려 노력했고 동생의 몫까지 더욱 열심히 땀을 흘리며 무공에 정진했소.”
영호천의 검은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검이 느려짐에 따라 주변의 시간마저 느려지는 느낌에 유청운은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 될 줄은 형도 아우도 몰랐소.”
영호천의 검극이 점점 흩어지기 시작하더니 그의 신형을 감추어갔다. 유청운은 영호천이 펼치는 검세에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의 아버지는 결국 자신 밑에 무를 익히지 못하는 병약한 아들은 둘 수 없다고 말하며 녀석을 내쳤소.”
영호천의 격양된 감정이 검에 실리자 그의 검은 모든 것을 부술 것만 같은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병약한 동생에게 호위 한명 없이 바다로 일엽편주(一葉片舟)에 실어 떠나보냈소.”
몸을 선회하며 내뻗는 삼검의 오묘한 방위는 결코 피하기 쉬울 것 같지 않았다. 더욱이 검극이 미세하게 떨리며 언제 어떻게 변초가 들어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은 더욱 난감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머무는 곳에는 항상 죽음의 소용돌이가 있지. 아마 녀석도 거기에 휘말렸을 거요…”
영호천의 손에 들린 검이 빠르게 원을 그렸다. 마치 소용돌이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녀석은 그렇게 떠나면서도 내 손을 잡고 미소만 지어주고 떠났다오.”
영호천의 검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며 허공을 수놓았다.
“그것이 마지막이었소. 녀석은 그렇게 마지막까지 미소만을 보여주고 떠났소. 강호에 나온 지 이 년! 미친 듯이 녀석의 소식을 찾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듣지 못했소.”
영호천은 검을 거두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게 마지막이었소… 아마 평생토록 다시 녀석을 볼 수 없을 지도 모르겠소.”
유청운은 영호천의 말에 차마 끼어들지 못하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만 보았다. 영호천은 다시 벽에 등을 기대고는 바닥에 미끄러져 앉았다.
“이제 다시 못 볼지도 모르오. 다시는…”
“아니오. 반드시 어딘가에 살아남아 있을 거요.”
유청운의 단호한 말에 영호천은 입가에 가는 미소를 그렸다.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유청운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영호천에게 다가갔다. 유청운은 천천히 그의 옆에 주저앉아서는 술병을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영호천은 고개를 뒤로 젖혀 선실 벽에 기대고는 말을 이었다.
“유소제를 봤을 때 처음에 느낀 것은 호적수라는 생각이었소. 지금껏 내가 만나본 중 최강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소.”
유청운은 말없이 영호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영호천도 신경 쓰지 않고 혼잣말처럼 말을 이었다.
“하지만 유소제도 나도 아직 전력으로 겨루기에는 무리가 있었소. 뭐라고 할까…아직 서로 더욱 갈고 닦을 길이 남아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하면 맞겠군…”
영호천도 자신의 옆에 놓인 술병을 들어 목을 축였다.
“그런데 유소제의 미소 띤 얼굴이 동생의 얼굴과 겹쳐 보였소.”
영호천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유소제의 부탁은 거절할 수가 없었소. 뭐 솔직히 유공자의 재능에 놀라 더욱 혹독하게 가르친 것도 있겠지만 말이오.”
“하하하.”
유청운은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는 영호천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영호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 때 느꼈던 감정을 잊지 마시오.”
“그 때 라면…?”
“아마 기억을 못하는 것 같지만 유공자는 무아지경에 빠져서 검강의 경지까지 올랐었소.”
“검강?”
당황하는 유청운을 바라보며 영호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내기에 내가 이겼다는 말이오. 이미 한번 올라본 경지는 다시 쉽게 오를 수 있소. 노력만 한다면 말이오.”
“검강이라…”
유청운은 스스로도 믿을 수 없어 고개를 흔들었다. 영호천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검강의 경지에 올랐을 때 무리하게 내력을 끌어올리는 바람에 주화입마에 빠질 뻔 했지만 이제는 아마 그런 일은 없을 거요.”
영호천의 말에 유청운은 가볍게 고개만을 끄덕였다. 유청운은 말없이 술병을 들어 한 모금을 들이켰다. 유청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비록 세운이 때문이라고 하지만 도움 준 것 고맙소.”
“하하하. 그럴 것 없소. 우린 어디까지나 내기를 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동생분에 대해서 알려 준다면 돕겠소.”
영호천은 그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훗. 혹시라도 영호현이라는 녀석을 만나면 소식을 전해주시오.”
“영호현이라…알겠소.”
영호천과 유청운은 시끄럽게 들려오는 발자국소리에 선실 문을 바라보았다.
쾅쾅!
“아직도 멀었어요? 일주일 지났다고요!”
선실 문 밖에서 소리치는 유세운의 목소리를 듣고 유청운과 영호천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유세운은 아무 대답 없자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걱정과 달리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서있는 유청운과 바닥에 앉아있는 영호천을 보고는 유세운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끝난거에요?”
“그래.”
영호천이 자리에 일어나며 대답을 하자 유세운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웬 술 냄새? 취검(醉劍)을 가르친 거예요?”
유청운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유세운에게 다가가 머리를 헝클어 트렷다.
“그래 무슨 일이냐?”
유청운의 물음에 유세운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 도착했어. 이젠 배에서 내릴 거야.”
“그래? 벌써 그렇게 됐구나.”
유청운은 유세운의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영호천을 돌아보며 말했다.
“영호대협. 같이 나가시죠.”
영호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유소제도 같이 나가지.”
“하하하. 당연하죠. 어서 나가자고요.”
떠나는 영호천(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