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아아~따분하다!”
강바람에 검은 머리를 휘날리던 유주란은 한숨을 내쉬며 투정을 부렸다. 유주란은 가만히 고개를 돌려 옆에서 같이 장강의 물결을 바라보고 있는 유세운을 불렀다.
“세운아~.”
“윽! 왜 그런 식으로 부르는 거야?”
유세운은 몸서리치며 뒤로 물러났다. 유주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너! 오라버니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해서까지 무공을 가르쳐 주면서 왜 이 누님한테는 아무 것도 없니?”
“그…그거야.”
주저하며 대답을 못하는 유세운을 보며 유주란은 한걸음 다가갔다.
“사실대로 말해도 돼. 나도 이유라도 알아야 하지 않겠니?”
“사…사실 누나에게 안 가르쳐 주려는 건 아니고 일단 형이 급해서…”
“흐음. 그건 인정할 만하군.”
고개를 끄덕이며 한걸음 더 다가온 유주란을 보며 유세운은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솔직히 누나는 산검(散劍)을 익혔잖아. 난 그쪽은 전혀 모르거든…”
“그래? 그럼 권법이라도 가르쳐 줄래?”
“응? 무슨 소리야? 지금껏 배운 검은 어쩌고 이제부터 권법을 배우겠다는 거야?”
“지금 이 실력 가지고서는 강호에 나가봤자 금방 죽기 밖에 더하겠니?”
“응? 죽긴 누가 죽어?”
“이 누님이 죽지! 누가 죽겠냐!”
이미 한걸음 앞까지 다가온 상황에서 버럭 소리를 지르는 유주란을 피해 유세운은 귀를 막으며 뒤로 한걸음 크게 물러났다. 유세운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무슨 소리야? 누가 감히 누나를 건드려? 내가 있는데…”
“쳇! 네가 언제까지나 내 곁에 있어줄 것도 아니잖아.”
유세운은 유주란의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걱정 마. 누가 누나 같은 여자를 데려가겠어. 시집도 못 갈 테니 아마 평생 내 곁에 있게 될 걸?”
차앙-
날카로운 검명과 함께 유주란은 등에 매고 있던 검을 뽑으며 매서운 기세로 찔러 들어왔다. 유세운은 고개를 흔들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유주란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어렸다.
“어쭈? 피해?”
“아니 그럼 이 어린 동생이 검에 찔려 피라도 흘려야 속이 시원하겠어?”
“흥. 웃기는 소리 하지마! 어디 또 한번 피해봐라!”
유주란의 검극이 미미하게 흔들리며 세 방향을 찔러 들어왔다. 유세운은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이 동생이 피를 흘려야 속이 시원하려나 본데…그렇게는 안 되지!”
유세운은 고개를 내 저으며 앞으로 달려들었다. 유주란이 놀라 검을 멈추려는 찰나 이미 유세운의 신형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유주란의 검은 허무하게 허공을 가르고 그녀의 뒤에서 유세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많은 검이 찔러 와도 피하면 그만이지.”
“이…이게! 그럼 산검은 배울 가치도 없단 말이냐?”
“아니 그런 건 아닌데…누나는 대체 몇 개의 검까지 만들 수 있는 거야?”
“음. 지금 능력으로는 고작 삼십이 개 정도?”
“흐음. 작은 숫자는 아니네…아마 산검을 극성으로 펼친다면 아마 하나의 벽처럼 느껴지겠지?”
“아직 우리 사부님도 그 정도까진 못하셔.”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산검 하나만을 파지 말고 다른 류도 섞어 보는 게 어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이를테면 쇄검(鎖劍)을 같이 익혀 두 개를 같이 펼치면 어떨까? 쇄검의 운용 법을 익혀서 그 검으로 산검을 펼치는 거야.”
“뭐?”
유세운은 자신의 말에 당황하는 유주란을 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유명한 쇄검을 찾아 익혀봐. 뭐 그런 게 쉽게 구해지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그래서 쇄검을 따로 익히고 둘이 같이 펼쳐보기 전에 꼭 나한테 말해.”
“그런 걸 어디서 구해!”
“그건 누나 재량이구…아니면 변검(變劍)도 괜찮겠군. 일단 두개를 합칠 때 주화입마에 걸릴 수도 있으니 필히 나한테 말해줘.”
“넌 그런 검의를 아무나 막 가르쳐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유세운은 악을 쓰는 유주란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흐음. 아쉽군. 사부님이 계셨으면 쉽게 배울 수 있었을 텐데…”
“사부님?”
“응. 무광이라고 불렸던 거 보면 분명히 검에 대해서도 많이 알 텐데 말야.”
“어디 계신데?”
유주란이 두 눈을 빛내며 묻자 유세운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농담 하지마. 만나주기나 할 거 같아? 어디 다른데 알아봐야지.”
“윽! 다른데 어디서 그런 걸 가르쳐 준다는 거야!”
“쩝 영호형님만 계셨어도 간단할 텐데…”
“뭐? 선실에 계시잖아.”
유세운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일주일간 나오지도 않겠다고 하고 들어가서 말야. 부탁할 처지가 못돼.”
유세운의 말에 유주란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검을 검집에 꽂아 넣었다.
“휴~ 내 팔자에 무슨…”
유세운은 한숨짓는 유주란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걱정 하지마. 부탁은 해 볼께.”
“하긴 일주일안에 오라버니를 강하게 만들어준다고 호언장담(好言壯談)하는 걸 보면 충분히 가능할 지도 모르지…”
“헉! 헉!”
몇 일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죽을 고비도 몇 번이나 넘겼는지 기억도 안 났다. 자신이 아는 모든 검술을 써보고 응용도 해보았지만 철옹성처럼 단 한번도 공격을 성공하지 못했다. 달랑 두 자루의 나무 막대기를 구해 마치 쌍창처럼 휘두르고 있건만 도저히 뚫을 방도가 없었다. 지쳐 쓰러져 잠들 때까지 오로지 대련만을 해온 유청운은 입에서 단내가 나는 것을 느꼈다.
영호천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조용히 말했다.
“고작 이정도로 그녀를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겁니까?”
“헉! 헉! 차핫!”
유청운은 가장 익숙한 검인 현류십삽검을 자연스레 펼치고 있었다. 현류십삼검의 오초인 현룡출검(玄龍出劍)이 벼락처럼 뻗어 나갔지만 하나의 나무 막대기로 검기를 흘리고 다른 막대기로 찔러 들어오는 것을 미처 제대로 피하지 못했다.
퍼억!
“컥!”
유청운은 마치 검에 찔린 듯한 통증을 느끼며 선실의 구석까지 날아가 처박혔다. 유청운은 천천히 자리에서 다시 일어섰다. 영호천은 그런 유청운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안 되는 것을 계속 고집하는 겁니까? 지금 자신이 가진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기에 아직 부족하단 말입니까?”
영호천의 목소리가 유청운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솔직히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펼쳐 보였다. 변초(變招)도 한계에 부딪쳤다. 확실히 자신은 비교도 안 되는 고수라는 것만 확인한 꼴이었다.
유청운이 힘겹게 바라보고 있자 영호천은 고개를 흔들며 나무 막대기에 내력을 불어넣었다. 나무 막대기를 따라 푸른빛의 기운이 뻗어 나오다가 점점 유형을 갖췄다. 하나의 커다란 강기를 보고는 유청운은 숨을 들이마셨다. 적어도 검강을 뻗어 내기 전에는 절대로 그를 꺾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영호천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검강도 검풍도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아십니까?”
“헉! 헉! 무엇이 헉! 중요하단 말입니까?”
영호천은 고개를 들어 죽립 밑으로 유청운을 내려보며 말했다.
“의지! 모든 것은 의지로 만들어 지는 것이오! 검에 서려 있는 무엇이라도 베겠다는 의지에 자신의 의념을 실으시오! 검과 하나가 되지 않고서는 검풍은 물론 검강도 얻을 수 없소. 그리고 당신은 이류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지.”
“의지? 의념?”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유청운을 바라보며 영호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의 의지에 당신의 의념을 실으시오! 그것이 검강을 깨닫는 가장 빠른 길이오!”
“검의 의지? 검의 의지… 의지…”
유청운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자세를 잡고는 눈을 감았다. 자신이 처음 검을 잡던 때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허공을 베는 검의 느낌이 너무나 좋았던 시절이 떠올랐다. 검이란 무엇을 베기 위해 만들어진 것 그 스스로 베겠다는 의지로 가득한 것. 유청운은 검을 잡은 손을 통해 검의 의지를 느끼고 싶었다. 검을 통해 무엇이라도 베겠다는 의지를 느끼기 시작했다. 천천히 자신도 검의 의지를 따라 무엇이라도 베겠다는 의념을 가졌다.
영호천은 검을 움켜쥔 채 눈을 감은 유청운의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미 주위의 사물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자신과 검에 심취해간 모습이 보였다. 지금이 고비였다. 지금 이런 순간은 그의 평생을 통틀어도 몇 번 찾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영호천은 서서히 피어오르는 푸른 아지랑이를 보며 나무 막대기를 내려놓았다. 유청운은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미 그는 검강의 경지로 들어서고 있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영호천은 자신의 고검을 뽑아 들었다. 유청운의 검에 푸른 검강이 어리기 시작했다. 유청운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의지를 느끼며 영호천의 죽립 밑으로 보이는 가는 입술에 미소가 진해졌다.
유청운은 검과 하나 되는 일치감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도저히 일검을 베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청운은 검의 의지인지 자신의 의념인지 구분이 서지 않는 상황에서 일검을 베었다.
슈앙-
영호천은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푸른 검강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고검을 휘둘렀다. 유청운의 검에서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는 기세의 맥을 하나씩 풀어내는 영호천의 입가에는 미소가 진해졌다. 검강을 익힌 자들도 강호를 떠돌아다니면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이미 문파에 다 속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중에 유세운을 만난 건 정말 가뭄의 단비를 맞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의 형 역시 자신의 기대를 져 버리지 않았다.
영호천은 유청운의 검강을 풀어 헤치다가 안색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눈을 감은 채로 검의 의지를 따라 휘두르던 유청운이 자신의 의지를 담아 검을 펼치기 시작했다.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현류십삼검이 뿜어져 나왔다. 영호천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예상대로군.”
영호천의 고검이 좀더 바삐 움직이며 그의 검로를 막아갔다. 유청운의 검강이 아무 제지 없이 뻗어 나가다간 이 선박이 언제 침몰할지 몰랐다. 영호천은 유심히 유청운을 바라보았다. 이미 유청운은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 있었다.
“이건 예상외인데?”
쉬악!
유청운의 검을 따라 푸르스름한 검강이 허공을 가르며 베어오기 시작했다. 영호천은 고검을 힘차게 한차례 뿌렸다. 영호천의 검을 따라 옥빛의 검강이 촘촘히 막을 만들었다. 영호천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핫. 이 짧은 기간에 검강이라…강호에 또 하나의 신성이 태어나는 건가?”
파파파팍-
선실을 거의 뒤 덮은 옥빛의 검막 안에서 유청운의 검무는 이어졌다. 가만히 지켜보던 영호천의 안색이 굳어졌다. 자신의 내력을 한계 이상으로 끌어 올린 듯 유청운의 입가에 한줄기 핏물이 베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을 봤기 때문이었다. 영호천은 자신의 검막을 거두며 벼락처럼 쏘아져 나갔다. 유청운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영호천을 향해 일검을 베었다. 영호천은 피하지 않고 진력을 담아 검을 마주 베어갔다.
콰앙-
“커헉!”
선혈을 내뿜으며 선실의 구석으로 날아가는 유청운을 보고 영호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다행이군. 늦진 않은 것 같아.”
극심한 피로와 무리한 내력 운용에 지칠 대로 지친 유청운은 기절해 있었다. 영호천은 품속에서 하나의 옥병을 꺼내 들어 뚜껑을 열고 옥빛의 환약을 하나 꺼내 들었다.
“이건 다 유소제 때문이니 부담 갖지 마시오.”
영호천은 환약을 유청운의 입안에 털어 넣었다. 환약은 물에 녹듯 그의 입안으로 사라졌다. 영호천은 기절한 유청운의 옆에 주저앉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부럽소.”
떠나는 영호천(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