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자그마한 연못과 그에 어울리는 단아한 정자(亭子).
정자 뒤편으로 푸른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서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정자에는 한 명의 노도인이 있었다. 노도인의 얼굴은 대추처럼 붉었고 하얀 수염이 그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의 한손에는 불진이 들려 있었고 다른 한손에는 술병이 들려 있었다. 노도인은 술병을 들어 한 모금을 들이키고는 미소를 지었다.
“크~ 역시 술은 이렇게 자연을 구경하며 마시는 것이 좋군. 죽림에서 불어오는 바람만큼 시원한 것도 없지.”
노도인은 뒤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슬며시 고개를 돌려 보았다.
“사부님. 곡차를 드시는 중이 십니까?”
“오~ 이게 누구냐? 돌아왔느냐?”
“예. 지금 막 돌아왔습니다.”
“그래 어디까지 데려다 주고 왔느냐?”
“남창에서 배를 타는 것 까지 보았습니다.”
“흐음. 그런데 내가 이상한 말을 들었다만?”
노도인의 물음에 반개한 눈을 조금 더 뜨며 동철이 되물었다.
“어떤 말을 들으셨습니까?”
“유세운이라는 녀석 말이다. 이번에 만났다고 하더구나.”
“예.”
“그 녀석이 이미 일권무적이라는 별호를 얻었고 강환에 이른 고수라고 하던데 맞느냐?”
“일권무적이라는 별호 말입니까?”
“그래.”
“충분히 가능한 말이군요. 아니 그가 아니면 그만한 별호가 어울릴 만한 사람이 없을 겁니다.”
“허허. 녀석아 그렇게 광오한 별호를 자신이 직접 짓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지어 줬다는 것은 그만한 능력이 될 때나 가능한 거다.”
“예. 물론 가능합니다. 그는 이미 신룡이 되어 있습니다.”
노도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동철을 쏘아 보았다.
“무슨 말이냐?”
“강환도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도저히 제가 추측할 수 있을 정도의 고수가 아니었습니다.”
“크흠.”
노도인은 침중히 고개를 숙였다. 주저하고 있는 그를 향해 동철이 천천히 물었다.
“사부님. 제자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래 물어 보거라.”
“대체 강환의 위의 경지로는 무엇이 있는 것입니까?”
“그건 왜 묻는 것이냐?”
동철은 반개한 눈을 들어 노도인을 바라보았다.
“제가 가고자 하는 목표를 정하기 위함입니다.”
“흐음. 목표라. 좋다 그렇다면 일단 간단하게 설명해주마.”
“예.”
“일단 보통의 무림인들 중 이류 이상이 되면 검기를 일으키게 되지. 하지만 그들이 일으키는 것은 검기라고 부르기도 조금 민망하구나. 하지만 일류 고수쯤 되면 확실한 검기를 익히고 있지. 그들 중 특출난 자들은 검강도 익힐 수 있다. 그리고 절정의 고수들은 검풍의 경지에 달해 있지. 검에서 일으키는 바람만으로 상대를 벨 수 있는 경지다. 그리고 초절정 고수라고 불리는 자들이 검환을 일으킬 수 있지. 아마 지금은 검환을 일으킬 수 있는 자들이라고 해봐야 전 무림을 통틀어 삼십도 나오기 힘들 거다.”
“그렇다면 검환이 무의 끝이라는 말입니까?”
“아니지. 검환 위의 경지로는 심검이라는 경지가 있다. 뭐 이정도의 고수는 한번 무림에 나왔다 하면 모든 이 들의 시선이 집중되지. 무림의 역사는 그들이 썼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 저희 문 내에서도 심검에 든 분이 계십니까?”
“흐음. 우리 무당에서는 개파조사님이 아마 심검을 훌쩍 넘으셨을 것 같구나.”
“그렇다면 심검 위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노도인은 자신의 백염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개파조사님이 도달할 뻔 했다고 전해지는 광검이 있지.”
“광검이라면…”
“그런데 광검에 도달하시지는 못한 듯 하더구나. 다른 깨달음을 얻으셔서 우화등선(羽化登仙)하신 거 같으니 말이다.”
“광검…광검. 그것이 무의 끝입니까?”
“아직까지 알려진 바는 그렇다.”
“그렇군요.”
동철은 잠시 생각하더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그렇다면 고금을 통틀어 광검의 경지에 도달한 자가 있었습니까?”
“음. 있긴 있었다.”
“그들이 누굽니까?”
노도인은 자신의 수염을 다시 한번 쓸어내리고는 천천히 입을 떼었다.
“고금 제일 무공이라 알려진 무공이 두 개가 있느니라.”
“어찌 고금 제일 무공이 두 개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헐헐. 둘이 동시대에 태어나지 못한 까닭이지.”
“…그렇군요.”
“뭐 거의 전설로만 전해지는 거라서 확신은 못하겠구나. 천마광휘라는 무공과 천륜광검이라는 무공이 있다고 들었다.”
“천마광휘와 천륜광검…”
“그래 천마광휘는 초대 수라마교주가 익혔던 무공이니라. 그가 그 무공을 익히고 왔을 때 무림에 그의 적수는 없었다. 무림의 암흑기라 할 수 있는 시기였지. 구파일방은 봉문을 하고 그의 말이 법이었던 시절이니라.”
“천마광휘…”
“그에 비해 천륜광검은 그렇게 노골적으로 들어난 것은 아닌데 남해의 검마도(劍魔島)라는 곳의 검사였다. 그의 일 검을 막아 낼 자가 무림에 없었지. 하지만 그것도 이미 오백년 전의 이야기구나.”
“그는 그 정도로 강한데도 강호에 군림하지 않았나요?”
“그는 순순히 자신의 무위만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의 검과 겨루어 본 자는 모두 죽었지. 하지만 그가 죽은 후에 일단의 무리들이 검마도를 습격했다고 들었다.”
“예?”
“천륜광검이 탐이 낫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천륜광검은 찾지 못했다고 들었다.”
“그들은 누구였을까요?”
동철의 질문에 노도인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고는 술병을 들어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건 나도 모르겠구나. 천년 전의 이야기로 전설로만 전해지는 이야기라 말이다.”
“천륜광검…”
노도인은 불진을 한번 휘둘러보고는 물었다.
“목표를 정하는 데 도움이 되었느냐?”
“예.”
“그래 목표는 어디로 정했느냐?”
“사부님. 제자 광검을 목표로 하겠습니다.”
“휴~그럴 줄 알았다.”
노도인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내가 너를 그곳까지 끌어 줄 수는 없다. 나도 아직 검환조차 겪어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이번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노도인은 눈을 빛냈다.
“그래 무엇을 배우고 왔느냐?”
“강호에 산재한 가장 기본적인 초식에서 산을 뒤엎을만한 위력을 느꼈습니다.”
“무슨 말이냐?”
동철은 차분히 숨을 고른 다음에 대답을 했다.
“일권무적이라 불리 우는 유세운과 겨룬 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세운이의 밑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일검 일검은 단순했지만 그 결과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검환의 경지로 보이는 자가 한 명이 더 있다고?”
“그의 단순한 찌르기나 태산압정 초식은 이미 강호의 그 어떤 검식보다도 강해 보였습니다.”
“태산압정?”
“단순한 태산압정의 초식에 옆에서 지켜보던 저도 숨이 멈추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붕검의 고수인가?”
“붕검의 고수라면…”
노도인은 불진을 가만히 휘저으며 물었다.
“가만 그런데 찌르기라니?”
“일체의 변식도 없는 찌르기였는데 세운이의 섬광마멸지에 필적했습니다.”
“단순한 찌르기가…어떻게 섬광마멸지에 필적 할 수가…가만 뭐라고? 섬광마멸지?”
“예. 세운이가 펼친 지법입니다.”
“고금 제일 지법에 필적하는 찌르기라니? 극쾌의 검을 익힌 자란 말인가?”
“하지만 그의 마지막 초식은 팔방풍우였습니다.”
“팔방풍우?”
동철은 당시의 상황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의 팔방풍우를 당하자 세운이는 처음에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만검(晩劍)인가? 대체 그자의 정체가 뭐냐?”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그 검세들은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허허허. 크게 개안했을 만한 일이구나. 그런 가벼운 초식으로 그 심오한 뜻을 담아낼 정도의 고수를 보다니 말이다.”
“예.”
동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이번에 겪은 일로 크게 개안했음을 알 수 있었다. 강호는 넓고 기인이사는 모래알처럼 많다는 말이 다시 한번 와 닿았다. 노도인은 불진을 들어 동철의 어깨에 얹으며 말했다.
“목표를 정했으면 쉬지 않고 달려가야 할 것이다.”
“예.”
노도인은 동철의 눈에서 빛나는 투지를 읽고서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항상 이 못난 사부가 있어주마.”
“예. 물론입니다.”
“그래. 우리 개파조사님의 원을 풀어 드리자꾸나.”
“예.”
동철은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유세운의 능력은 비록 친구이지만 가공할 정도였다. 자신이 쳐다도 볼 수 없는 경지. 친구라는 존재는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코 그에게 뒤지지 않으리라는 각오를 했다. 동철은 뒤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뒤쪽에서 정자를 향해 다가오는 자가 있었다.
“현요진인님. 부탁하신 거 가져왔습니다. 어? 너 언제 왔냐?”
까치집 머리를 하고 다가오는 복상을 보고 동철은 미소를 지었다.
“방금 전에 도착했어.”
“그래? 아! 잠깐만… 현요진인님이 부탁하신 겁니다.”
노도인 현요진인은 복상에게서 술병을 하나 더 받아들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역시 네 녀석은 확실하게 일을 처리하는 구나.”
“물론이죠. 동철과 비교하시면 곤란합니다.”
“후후. 그럼 네가 내 제자가 되어 보겠느냐?”
“에구 농담하지 마십쇼. 동철이 어떤 꼴을 당하는지 제가 두 귀로 다 들었습니다.”
“하하하.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나. 홍노괴에게 네놈이나 괴롭히라고 부탁하는 수밖에…”
“쩝. 뭐 다른 거 부탁하실 거 없으십니까?”
“흐흐흐 역시 네놈이 최고란 말이다. 나중에 생기면 부탁하마.”
현요진인은 대추처럼 붉은 얼굴을 더욱 붉히며 웃음을 터트렸다. 복상은 태연히 어깨를 들썩이고는 동철을 바라보았다.
“잘 다녀왔냐?”
“그래. 네 덕에 많은 경험을 했다.”
“하하하. 뭘 내 덕이냐? 다 네가 얻을 복이 있어 그런 거니 내 탓하지 마라.”
“그런가?”
“그래. 그럼 난 이만 가보마. 현요진인님 저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거라.”
“예.”
복상은 동철의 어깨를 한번 두들겨주고는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동철은 복상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앞에서 떳떳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반드시 광검에 들도록 할께. 기다려 다오.’
일주일간의 약속(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