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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아-
은은한 달빛이 장강의 물결에 부딪쳐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잔잔한 강바람은 새하얀 면사를 살며시 들었다 놓았다. 백연혜는 물끄러미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가득 별이 수 놓여 져 있었다.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던 백연혜는 가벼운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자신의 옆에는 백연문이 웃으며 서 있었다. 백연문은 고개를 돌려 백연혜의 뒤에 서 있던 여운을 향해 말했다.
“그만 들어가서 쉬게. 내가 옆에 있어 줄테니…”
“예.”
여운은 백연문의 말에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선실로 들어갔다. 백연문은 백연혜의 옆에서 같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무슨 고민 있느냐?”
“아니에요…고민은 무슨…”
“흠. 그래?”
백연문은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면사가 갑갑하지 않느냐?”
“조금 그렇긴 하지만…이제 많이 익숙해졌어요.”
“나랑 있을 때는 벗어도 좋다. 난 내 동생의 예쁜 얼굴이 이렇게 가려지는 것이 별로 탐탁치 않구나. 삼봉의 누구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미색인 것을…”
“오…오라버니. 무슨 그런 말씀을…”
“흐음. 내 비록 혈천문의 혈라묵편 황혜란을 보지는 못했지만 다른 두 명에 비해 너의 미색이 절대로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넌 나의 하나뿐인 동생이지 않느냐.”
“피- 알았어요.”
백연혜는 빙긋 웃고는 면사를 살며시 벗어들었다. 은은하게 세상을 비추던 월광은 그녀의 얼굴을 더욱 하얗게 비추어 주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며 백연문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런 갑갑한 면사는 나랑 있을 때는 벗도록 해라. 궁에서처럼 말이다.”
“예.”
백연혜는 얼굴에 와 닿는 강바람을 느끼며 눈을 감고 미소를 지었다. 백연문은 그런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유공자 때문이냐?”
“…예?”
백연혜는 갑작스런 백연문의 질문에 깜짝 놀라 엉겁결에 되물었다. 백연문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밝게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마 지금 신진고수 중 최강일 것은 확실하다. 신분도 확실하고 말이지.”
“무…무슨 소리에요?”
백연문은 고개를 돌려 백연혜를 바라보았다. 백연문의 입가에 훈훈한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아마 그의 능력은 본궁의 무상(武上)이나 아니지…아마 아버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그런 것 같아요.”
“그런 남자라면 나는 찬성이다.”
“예?”
백연문은 가만히 손을 들어 백연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가 좋다면 말이다.”
“…”
백연문의 말에 백연혜는 아무 말 없이 얼굴만을 붉혔다. 백연문은 웃음 짓고는 물었다.
“밤바람은 차가워서 감기 들지도 모른다. 들어가자꾸나.”
“조금만 더 있다 들어갈게요.”
백연혜의 대답에 백연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걸음을 옮겨 선실로 들어갔다. 백연혜는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을 은은하게 밝히고 있는 달을 바라보는 백연혜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처음 만난 날의 그 거만했던 모습이 슬며시 떠올랐다. 처음 만난 날은 온통 먼지를 뒤집어 쓴 체 창천백검수 두 명의 앞에서도 너무도 당당한 모습이었다. 사실 지금 보면 당당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말이다.
다음에 그가 보여준 것은 흑마천살대와의 결전 때였다. 자기만 믿으라는 듯한 장난끼 어린 미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미소를 지어 보였을 때는 항상 실망을 시킨 적이 없었다. 철탑백마인과의 결전 때도 그는 그 미소 한번을 지어보이고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그들을 제압했다. 자신이 이런 감정을 갖게 된 것은 처음 그의 장난끼 어린 미소를 보았을 때부터 이었던 것 같았다.
백연혜는 문득 선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가볍게 옷이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만이 들리고 그 쪽에는 아무도 없었다. 백연혜가 의아해 하며 고개를 돌리자 표표히 허공에서 몸을 선회하며 선수(船首)로 내려서는 인물이 있었다. 선수에 내려서던 인물은 은은한 달빛을 받으며 고개를 들어 백연혜를 바라보았다. 유세운이었다. 하지만 유세운의 눈이 커다랗게 커지더니 선수에서 미끄러져 밑으로 떨어졌다.
“유오라버니!”
당황한 백연혜는 몸을 날려 선수로 다가갔다. 백연혜는 선수에서 밑을 내려다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망연자실한 백연혜는 자신의 어깨너머로 말을 거는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언제?”
백연혜의 뒤에서 같이 선수 밑을 바라보던 유세운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뭘 언제야? 뭐 잘못본거 아냐?”
백연혜는 유세운이 능청스럽게 대답하자 그의 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은 체 물었다.
“이상하군요. 선실에서 나온 분이 신발은 왜 젖어 있을까요?”
“응?”
유세운은 자신의 신발 끝 부분이 젖어 있는 것을 보고는 투덜거렸다.
“쳇! 실수했군.”
백연혜는 투덜거리는 유세운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어떻게 된 거에요? 그렇게 쉽게 떨어질 분도 아니면서…”
“응? 아 그게 말이지…”
유세운은 말을 하려다 멈칫했다. 밤에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밖으로 나오다가 백연혜를 보고는 멋진 모습 보여주려다 면사를 벗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발이 미끄러졌다고는 차마 말을 못했다. 얼굴만 붉힌 채 말을 못하는 유세운을 보고 백연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오라버니 어디 아프세요?”
“응? 아니. 내가 언제 아픈 거 봤어?”
“흐음. 그런데 얼굴이 붉어졌어요.”
“응? 그래? 아하하. 그게 더워서 그런 거야. 더워서.”
“덥다고요?”
백연혜는 왼쪽 눈썹을 슬며시 들어올렸다. 뭔가 자신에게 숨기는 것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말을 돌릴 리가 없었다. 강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는데 뭐가 덥다는 말인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백연혜가 뭐라고 하려고 하자 유세운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 벌써 중추절이 다 되어 가나봐.”
“그렇죠. 아마 중추절 안에 궁으로 갈 수 있을 거예요.”
“우음. 중추절이라…”
유세운은 은태정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도 중추절에는 잊지 않고 밖에 나가서 월병을 사다주고는 했었다. 괜히 은태정이 떠올라 기분이 가라앉던 유세운은 고개를 돌려 백연혜를 바라보았다. 백연혜는 어느새 고개를 들어 하늘에 떠있는 달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옆모습을 보면서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세운도 같이 달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예?”
“들은 얘기인데 삼룡삼봉이 신진 고수 중에서 무공이나 외모 면에서 모두 가장 뛰어나다며?”
“무공은 모르지만 외모만이라면 가능할 거예요.”
“그래?”
“물론이죠. 저희 오라버니만 봐도 알잖아요.”
백연혜는 자신이 말하고도 우스웠는지 작게 미소 지었다.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물었다.
“승천단창 헌원옥이라는 사람은 어때?”
“헌원언니요?”
“아! 본 적 있어?”
“예. 물론이죠. 언니는 삼봉 중에서 가장 강한데다가 미모 또한 누구 못지않아서 수많은 강호의 협객들을 가슴 설레게 하고 있다죠.”
“그래? 그럼 큰일이군.”
“…무슨 말이죠?”
유세운은 갑자기 주변의 공기가 싸늘히 식은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어 백연혜를 바라보았다. 백연혜의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다고 느낀 유세운은 태연히 말을 이었다.
“형이 그녀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말야.”
“예? 청운 공자님이요?”
“응. 저번에 얘기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녀가 좋은 가봐.”
“우음. 큰일이군요.”
“뭐가?”
“헌원언니는 다 좋은데 자신보다 강한 남자가 아니면 결혼 안한다고 했었거든요.”
“정말이야?”
“예.”
유세운은 침음성을 삼켰다. 저번에 형이 말해줄 때는 분명히 제대로 손도 써보지 못하고 패했다고 했었다. 그런 그녀를 이겨야만 한다면 형이 훨씬 강해져야만 했다. 유세운은 심각하게 고민하며 물었다.
“그녀의 실력이 어느 정도나 돼?”
유세운의 질문에 백연혜는 고개를 들어 생각에 잠겼다. 고민에 빠진 백연혜의 얼굴을 보며 유세운은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녀의 면사를 벗은 모습을 볼 수 있다니 꿈만 같았다. 자려고 하는데 꿈자리에서 은태정이 나타나서 두들겨 패지만 않았어도 일어나서 밖에 나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은태정에게 나중에 맛있는 저녁이라도 대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연혜는 생각이 난 듯 손뼉을 치며 말했다.
“맞다! 저번에 봤을 때 강기를 발출할 수 있다고 들었어요.”
“에? 강기를 발출 할 정도야?”
“예. 그 때 제 오라버니랑 겨루려고 했는데 저희 오라버니가 궁에 안 계셔서 겨루지는 못했지만 말이죠.”
“하하 이거 장난이 아닌데?”
“그러게 말이에요. 청운 공자님이라면 충분히 헌원언니랑 어울릴 만한데 말이죠.”
“그렇게 생각해?”
유세운이 의외라는 듯이 묻자 백연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외모도 뛰어나시고 의협을 아시는 분이시잖아요.”
“흐음. 그렇다면 형에게 부족한 것은 무공뿐이라는 것이군.”
“예. 그렇죠.”
유세운은 투지가 불끈 솟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의 형이 좋아하는 여자와 맺어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형을 혹독하게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세운의 입가에 장난끼 어린 미소가 그려지자 백연혜는 피식 웃었다. 유세운은 백연혜가 피식 웃자 의아해 하며 물었다.
“왜 웃는 거야?”
“아뇨. 그냥 꽤나 심각하게 다짐하는 것 같아서요.”
“어떻게 알았어?”
의아해 하며 묻는 유세운을 보며 백연혜는 그저 따뜻하게 웃음을 지었다. 유세운은 가볍게 볼을 부풀렸다. 유세운은 가만히 백연혜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백연혜가 의아해 하며 쳐다보자 유세운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다음부터는 그렇게 면사를 벗고 있어. 훨씬 보기 좋다. 아까도 그것 때문에 미끄러졌던 거야.”
유세운은 자신이 할말을 마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선실로 날아 들어갔다. 백연혜의 얼굴은 열기가 느껴질 만큼 붉어졌다.
일주일간의 약속(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