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영호천을 만나다.”
강서성의 수도인 남창(南昌)은 포양호 서쪽 연안으로 흘러드는 간장강 오른쪽 연안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남창의 가장 유명한 명승지로는 강남 삼대 명루중 하나인 등왕각(騰王閣)이 자리 잡고 있었다. 등왕각의 건물 자체의 웅장함은 악양루를 앞지르고 있었다. 외관이 삼층이었고 내부로는 칠층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를 자랑했다.
유세운은 예전에 너무 다급하게 들어오느라 제대로 구경을 못했었기 때문에 연신 감탄사를 터트렸다.
“햐! 이곳 정말 그 때는 너무 다급해서 몰랐는데 웅장하군.”
유세운의 모습을 지켜보던 유주란이 그의 뒤통수에 일격을 가했다.
빠악!
“악! 왜 때려!”
“야. 이곳에 처음 오는 촌놈처럼 굴지 좀 마라. 같이 다니기 민망하잖아.”
“윽! 그렇게 점잖 뺀다고 달라지는 것 없잖아! 누나는 이곳 처음 볼 때 안 그랬어?”
“응. 안 그랬는데?”
유주란의 태연한 대답에 유세운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쳇! 거짓말. 누나가 그랬을 리가 없어.”
“뭐? 하! 이제 이게 이 누님의 말에 토를 달겠다?”
“윽! 동철 살려줘.”
유주란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듯 하자 유세운은 빠르게 동철의 뒤로 가서 숨었다. 동철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 지었다. 유주란은 동철을 보고는 차마 화를 터트리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유세운을 조용히 불렀다.
“이리 나와라. 먼저 맞는 매가 덜 아프다고 하더라.”
“체! 누가 그래? 순 거짓말이야.”
“이게 진짜!”
“란아! 운아! 그만해라. 다른 사람들 먼저 들어갔잖니.”
유청운이 나서서 말리자 유주란과 유세운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미 다 등왕각에 들어가고 남은 이들은 자신들과 동철 밖에 없었다. 유세운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동철의 손을 잡고 재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야! 거기 안 서?”
이층을 책임지고 있는 점소이인 왕여는 어제 꿈자리가 안 좋아서 오늘 하루 종일 다른 점소이들에게 짜증을 부리고 있었다. 어제 밤 꿈에서 목이 마르다며 자신에게 달라붙는 악귀들을 보아 잠을 설친 왕여의 기분은 아주 나빴다. 더군다나 방금 전 이층에 올라온 손님들을 보며 왕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의 면사녀와 그녀의 뒤에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남자와 남자인 자기가 보기에도 가슴이 울렁거릴 만큼 잘생긴 미공자와 한 명의 중년인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백의 면사녀를 보며 얼핏 불길한 생각이 떠오르는 자신을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록 코 밑을 다 가렸지만 눈만 보아도 얼마나 미인인지 알 수 있었다. 저런 미인을 보면서 불길한 기분이 든다는 것은 점소이 생활 이십 년간 단 한번도 없었다. 그래서 왕여는 다른 점소이들에게 그들의 주문을 받도록 했다.
이층을 대표하는 자기가 가서 받아야 하지만 어제의 꿈자리가 안 좋아 한 걸음 물러나 일층 계단을 내려 보았다.
“야! 거기 안 서?”
이층에 있는 자신에게도 들릴 만큼 큰 목소리와 함께 한 여인이 뛰어 들어왔다. 왕여는 여인의 모습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하! 정말 예쁘군. 삼봉이라는 강호의 절세 미녀들은 저 여인 보다 예쁠까?’
왕여는 들어오는 여인의 모습을 보고 감탄하다가 자신의 코앞에서 불쑥 나타나는 물체에 심장이 멎을 듯 했다.
“야! 비켜! 뭐 하는 거야?”
“헉!”
왕여는 놀라 뒤로 털썩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런 왕여를 가볍게 넘어가는 그림자를 보며 여인이 소리쳤다.
“어쭈? 네가 가긴 어딜 간다는 거냐?”
왕여는 주저앉아 있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여인을 보며 당황했다. 하지만 그를 더욱 당황시킨 것은 자신을 넘어간 그림자의 목소리였다.
“어라? 넌 저번에 내가 그렇게 목이 타 죽을 뻔 했는데도 죽엽청을 늦게 갖고 온 점소이잖아?”
“예?”
고개를 돌리며 벌떡 일어나던 왕여는 뒤통수에 느껴지는 충격에 정신을 잃었다.
퍽!
“꺅!”
주저앉아 있던 왕여를 가볍게 뛰어넘으려던 유주란은 그가 갑자기 일어나는 바람에 무릎으로 뒤통수를 가격하는 셈이 돼 버려 비명을 질렀다. 유주란은 당황했다. 이미 왕여는 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었다. 유세운은 그런 유주란을 보고 웃음 지었다.
“하하하. 좀 조신해서 경신법을 펼치라고 그렇게 무식하게 달려드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 거 아냐.”
“너 정말 죽고 싶은 거냐?”
유주란의 살기 어린 목소리에 유세운은 흠칫 놀라 다시 동철의 뒤로 숨었다. 동철은 씁쓸하게 웃고는 쓰러져 있는 왕여에게 다가가 인중혈을 가볍게 눌러 주었다. 동철의 진기가 조금씩 들어가자 왕여는 정신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왕여는 눈을 뜨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여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층에서 자신의 밑에 있는 모든 점소이와 손님들의 모든 시선이 쏟아지자 얼굴이 붉게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왕여의 당황한 표정을 보며 유세운은 작게 웃음 지었다.
“푸훗. 이봐. 이봐. 정신이 든 거야?”
유세운을 바라본 왕여의 얼굴은 사색으로 변해갔다. 유세운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봐 너를 그렇게 만든 건 내가 아니라구 그렇게 쳐다 보지마. 누가 보면 오해하잖아.”
왕여는 이게 다 너 때문이라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어제 꿈에 나타나 목이 마르다며 자신에게 붙은 악귀는 분명히 네놈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를 보자 그제야 백의 면사녀도 같이 떠올랐다. 창천궁의 인물들과 같이 나타났던 여인이라는 게 생각나자 화가 싸늘히 식어갔다. 말 한마디 잘못 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낀 왕여는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유세운은 다급히 고개를 숙이는 왕여의 어깨를 두들겨 주며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가 뭘 죄송해? 자네를 가격한 저 여협이 죄송해야지.”
“윽!”
주먹을 움켜쥐는 유주란을 보며 유세운은 천천히 물러났다. 유주란은 유세운을 잡아먹을 듯 쏘아보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왕여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큰 실수를 한 것 같군요.”
“아닙니다. 여협께서 무슨…여협의 길을 막은 제 잘못이지요.”
왕여는 무림인에게서 처음 받아보는 사과에 고개가 땅에 닿을 듯 숙여졌다. 유세운은 그런 둘의 모습을 보고는 동철의 손을 잡아끌고 창가의 자리를 잡았다. 일부러 아버지와 약간 거리를 두고 앉은 유세운은 왕여와 유주란을 지켜보고 있는 점소이를 불렀다.
“이봐. 주문 받아야지.”
“아…예.”
점소이가 다가오자 유세운은 동철을 바라보고 방긋 미소 짓고는 주문을 했다.
“일단 죽엽청 두 병과 간단한 안주거리 좀 내오게나.”
“예.”
점소이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유세운은 동철을 보며 작게 웃음 지었다.
“일부러 아버지한테서 거리를 두고 앉았으니 화끈하게 마셔보자구.”
“훗. 하지만 이거 술 먹고 추태부리면 안되는데…”
“하하핫. 그러고 보니 그 때 현요진인님에게 끌려가서 어떻게 됐어?”
동철은 반개한 눈으로 창밖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 그 때 일은 말도 하지마. 맞아 죽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니까…”
“오~ 많이 맞았나봐?”
“그 뒤로 한달 간 사부님과 대련만 했었으니까…”
유세운은 입가에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네 실력도 이해가 가는군.”
“응?”
“별거 아니야.”
유세운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길에서 서로 부대끼며 지나가는 모습을 보던 유세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독 한 죽립을 눌러쓴 회의인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회의인은 마치 자로 잰 듯 일정한 보폭을 유지한 채 걸음을 옮기는데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부대껴도 그의 곁은 비켜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우연인가 싶어 바라보았는데 그것은 아닌 듯 했다. 죽립인은 갑작스레 걸음을 멈추었다. 유세운은 죽립인이 멈추자 호기심에 그를 바라보다 흠칫 놀랐다.
죽립인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마주 보았던 것이었다. 죽립인과의 거리는 족히 삼십 장은 되어보였다. 저 정도 거리에서 자신의 시선을 느꼈다는 것에 유세운은 당혹감이 서렸다. 하지만 죽립인은 금세 고개를 숙이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유세운은 과연 방금 전 일어났던 일이 우연이었는지 골똘히 생각하다 동철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왜 그래?”
“응? 아니 조금 당황스러워서…”
“뭐가?”
동철의 눈에 의문이 떠오르자 유세운은 가볍게 고개를 내 저었다.
“아니야. 내가 조금 과민했나봐.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말야.”
“뭐가 그럴 리 없다는 거야?”
어느새 다가온 유주란의 목소리를 듣고 유세운은 그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아니 그냥 삼십 장 밖에서 다른 사람의 시선을 느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야.”
“하! 이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네. 그런데 너 왜 여기 앉았냐?”
“응?”
유세운은 유주란의 질문에 당황했다. 아직 질문의 대답거리를 생각 못하고 있을 때 점소이가 다가와 죽엽청 두 병을 내려놓았다.
“주문하신 죽엽청 나왔습니다.”
“호~그래? 이거 때문이었어?”
유세운은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하하…그게 말이지. 동철과 오랜만에 회포라도 풀려고…”
“그래서 이렇게 떨어져서 앉았다…이 말이지?”
“응?”
유주란은 유세운이 갑작스레 정색을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유세운의 모습은 어떤 때보다도 진지해 보였다. 철탑백마인을 쓰러뜨릴 때에도 이런 진지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던 지라 유주란의 얼굴엔 당혹감이 어렸다. 동철도 유세운의 행동에 의아해 하며 유주란의 궁금증을 풀어 줄 질문을 던졌다.
“왜 그래?”
“당신은 누구지?”
유세운의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서려있었다. 동철은 유세운의 시선을 따라 이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언제 올라왔는지 모르는 죽립인이 한 명 서 있었다. 죽립인은 짙은 회의(灰衣)에 허리춤에는 대체 언제 만들어 졌는지 모를 오래되어 보이는 고검(古劍)이 한 자루 메어져 있었다. 죽립인은 죽립 밑으로 보이는 가는 입술에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는 자네는 누군가?”
“나? 유세운이라고 하는데…”
동철은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죽립인에게서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일말의 살기도 또한 살벌한 예기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마저 불확실하다는 것 밖에 특이 할 점이 없었다. 유세운은 죽립인을 보며 장난끼 어린 미소를 지었다.
“아직 내 질문에 대답을 안 해 준 것 같은데? 당신은 누구지?”
“흠. 그렇군. 나는 영호천이라고 한다네.”
영호천을 만나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