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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한바탕 몸을 풀었던 곳으로 돌아온 유세운은 깨끗하게 정리된 모습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여기가 내가 한바탕 난리를 피웠던 곳 맞아?’
고개를 갸웃거리며 장내로 들어서는 유세운을 향해 백연문이 다가와 깊이 읍을 하며 고마워했다.
“유공자의 도움에 감사드리오.”
유세운은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던 백연문의 첫 만남이 생각나 가볍게 웃음 지었다.
“하하. 뭘요. 이제 백공자님이 저를 기억해주시기만을 바랄뿐이죠.”
“에?”
백연문의 되물음에 유세운은 그저 가볍게 웃음 짓는 것으로 대답을 피했다. 유세운은 마차를 돌아보며 신음했다.
“어떻게 하죠? 마차가 부서져서…”
유세운의 걱정스런 말투에 백연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어쩔 수 없을 것 같군요. 남창까지는 말에 태워 데리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군요. 저도 말을 탈 수 밖에…”
“그래야 될 것 같습니다.”
백연문이 미안해하는 기색을 보이자 유세운은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래 좋았어. 이제 말을 타고 가는 거야.’
유세운이 속내를 내비치지 않고 침중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호강현이 다가왔다. 유세운은 호강현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아까 분명히 자신에게 화산파의 명예를 훼손시킨 것에 대해 따지던 게 생각났다. 그리고 조금 전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다. 명예를 훼손시키는 일은 죽이는 것보다 나쁘다는 말이 떠오르자 유세운은 씁쓸히 웃었다.
호강현은 아까의 무례를 사과하러 오다가 유세운이 자신을 보고 씁쓸하게 웃자 걸음을 멈추었다.
유세운은 가만히 호강현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어 보였다. 사부에게 배운 것이라고는 무한한 자신감과 오만함을 배웠는데 그런 일로 고개를 숙일 것 까지는 없다고 편하게 생각했다. 게다가 처음부터 자신에게 빚을 받으러 왔다는 듯이 말한 호강현의 태도 또한 맘에 들지 않았다. 더욱이 동철에게 으름장을 놓을 때는 자신의 문파와 동철의 문파까지 문제를 키우려고 했던 모습은 더욱 얄미웠다. 유세운은 고개를 빳빳이 세운 채 말했다.
“예전에 홍종익에 대한 건은 사과드리오.”
“윽!”
호강현은 무례를 사과하러 오다가 유세운의 거만한 태도에 배알이 뒤틀렸다. 속에서 욕지기가 터져 나오려는 순간 방금 전 유세운이 철탑백마인을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쓸어버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강호는 약육강식의 세계. 호강현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저 정도의 무공을 익히려면 그만큼의 노력이 수반 되었을 것을 생각하니 저토록 잘난 체 하는 모습도 이해가 갔다.
자신도 자하신공을 익히고는 세상의 무서운 것이 없어 보였었다. 정천비무회의 결승에서 동철을 꺾을 때 까지만 해도 자신은 삼룡삼봉과 겨루어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오늘 본 동철의 모습은 자신 보다 확실히 한 수 위의 고수였다. 그리고 백연문 또한 결코 허명을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아직 자신은 안주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배운 것만으로도 오늘의 경험은 값진 것이었다. 유세운에게 대답하는 모습에 저절로 진심이 베어져 나왔다.
“아닙니다. 홍사제가 잘못한 점이 많았던 것 같군요.”
“에?”
유세운은 호강현의 갑작스런 저자세에 당황했다. 유세운은 헛기침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흠. 흠. 뭐 그 정도 까지는 아니었소.”
호강현은 눈을 빛내며 유세운을 바라보았다. 유세운은 호강현의 부담스런 눈빛에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호강현의 결의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훗날 제가 찾아 가면 비무해 주시겠습니까?”
“에?”
유세운은 호강현의 뜻밖의 말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훗날에 비무를 해달라는 말에 어이가 없었다. 대체 언제 봤다고 비무를 해줘야 한다는 말인지 납득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귀찮은 일을 약속해 달라고 하다니 염치가 없다고 쏘아 주려다가 호강현의 부담스런 눈빛을 보고는 차마 하지 못했다. 유세운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좋소. 나중에 언제라도 찾아오시오.”
“고맙습니다.”
유세운은 머리를 긁적였다. 고맙다고까지 하는데 달리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호강현은 백연문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백공자님. 오늘 무례를 범했군요. 죄송합니다.”
“정협련주님. 이러시면 제가 부담스럽습니다.”
백연문은 비록 감투뿐이라지만 그래도 정협련주에 앉아 있는 인물이 고개를 숙이자 부담스러웠다. 호강현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말을 꺼냈다.
“언제 한번 정협련에 찾아 주십시오. 거하게 대접하겠습니다.”
호강현의 목소리에 묻어 나오는 호탕함을 느낀 백연문은 눈웃음을 지었다. 백연문은 보는 모든 여인의 심금을 울릴만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꼭 찾아 가도록 하겠습니다.”
“잊지 말고 찾아 주십시오.”
호강현은 백연문에게 읍을 하고서는 동철에게 다가갔다.
동철은 반개한 눈을 들어 호강현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고의적으로 숨긴 것은 아니지만 그가 자신을 능멸했다고 말해도 변명을 할 말이 없었다. 동철이 차마 말을 못 꺼내고 있을 때 호강현은 웃으며 말을 건넸다.
“자네는 어떻게 할 텐가?”
“무슨…?”
동철은 갑작스런 호강현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강현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다시 물었다.
“나는 지금 련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자네는 어떻게 할 건지 묻고 있는 걸세.”
“아…지금 돌아가시는 겁니까?”
호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려고 하네. 아무리 혜오 부련주에게 맡겼다 해도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내가 지켜야 되니 어서 돌아가 봐야지.”
동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복상에게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대사형이 비록 무학의 성취는 자신보다 낮아도 그가 장문인이 될 거라는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동철이 아무 말이 없자 호강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련주로서 자네에게 한 가지 명하도록 하지.”
“명을 받겠습니다.”
동철은 호강현이 정협련주임을 내세우며 명한다고 하자 고개를 숙였다. 호강현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동철 부련주는 유대협을 비롯한 창천궁의 일행들의 이번 호송을 도와주게. 남창까지는 가도 괜찮을 듯 싶군.”
동철은 고개를 들어 호강현을 바라보았다. 호강현은 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철은 입가에 가는 미소를 지었다.
“반드시 명을 완수 하겠습니다. 그런데 유대협이라 하면?”
“응? 아 그거야 오늘 보지 않았나. 유세운 대협 말일세. 금세 강호를 떨어 울릴 분이더군.”
호강현은 동철에게 한 걸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고는 금세 다시 돌아갔다. 동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유세운 정도의 능력이라면 자신이 아무리 숨기려 해도 낭중지추(囊中之錐)처럼 세상에 들어나게 마련이었다. 호강현은 동철의 대답을 듣지 않고서 십강호법을 데리고 말에 올랐다. 호강현은 말을 몰고 떠나기 전 유세운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다짐을 받았다.
“방금 전의 약속 잊으시면 안 됩니다.”
“하하. 걱정 마시오.”
“그럼 모두들 조심하시오.”
호강현은 마상에서 읍을 하고서는 먼저 장내에서 떠나갔다. 유세운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동철에게 다가갔다. 동철에게 다가간 유세운은 그의 어깨를 다독여 줬다.
“햐 동철! 아까 보여준 검강은 아주 멋졌어.”
“훗. 네 앞에서는 우습게만 보였을 텐데 뭘…”
“무슨 소리야. 솔직히 그 정도 일 줄은 몰랐다구.”
“훗. 됐어. 남창까지는 따라 가 줄 테니 그렇게나 알아.”
“어? 정말이야? 남창까지는 같이 가는 거야?”
“그래.”
“흐흐흐. 그럼 우리 남창에 가서 곡차나 배터지게 한번 마셔 보자구.”
동철은 유세운이 다가와 작게 속삭이자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아직 헤어졌던 모습 그대로인 것만 같아 웃음이 나왔다. 유세운은 동철이 웃자 의아해 하며 물었다.
“뭐야? 왜 웃는 거야?”
“응? 아냐. 네가 하나도 변한 것 같지 않아서…마치 너만은 십여 년이라는 시간이 비켜간 것 같아서…”
“뭐? 그럼 아직도 내가 열두 살 꼬마애로 보인다는 거야?”
예민하게 반응하는 유세운을 보며 동철은 당황했다.
“아니 꼭 그렇다는 게 아니라…”
“흥! 아냐. 됐어.”
화난 듯 고개를 내젓는 유세운을 보며 동철은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유세운은 가뜩이나 걱정하고 있는데 동철까지 그런 식으로 말하자 걱정이 앞서 화를 냈다. 고개를 돌리고 있는데 여운이 마차에서 말을 푼 다음 고삐를 쥔 채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여운은 유세운의 앞까지 다가와 말고삐를 건네주었다.
“마차가 부서져서 직접 말을 모셔야 될 것 같습니다.”
“그래요? 어쩔 수 없군.”
유세운은 말고삐를 받아들고는 말의 콧잔등을 한번 쓰다듬어 주었다. 말은 기분이 좋은 듯 작게 푸르릉 거렸다. 유세운은 말의 안장으로 가볍게 뛰어 올랐다. 유세운은 말 위에 앉아 주변을 돌아보았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백연혜를 발견한 유세운은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었다. 백연혜는 자신의 백마를 몰아 유세운에게 다가왔다.
“아까 가신 일은 어떻게 됐어요?”
“응? 하하하. 아버지에게 몇 가지 배우고 왔어.”
“그래요? 다행이네요.”
자신의 일처럼 해맑게 웃는 백연혜를 보며 유세운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유세운은 면사에 가려져 있는 백연혜의 얼굴을 생각하며 다짐했다.
‘언젠가는 반드시 저 면사를 다시는 못쓰게 해야지.’
“하하. 고마워. 걱정해줘서…”
유세운의 대답에 백연혜는 눈웃음을 지었다.
“아니에요. 운오라버니가 도와줘서 이렇게 다친 사람도 한 명 없는 걸요. 제가 고맙죠.”
유세운은 자신이 타고 있는 말을 몰아 백연혜의 옆으로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오라버니처럼 대하기로 했으면서 뭘 고맙다는 거야? 그런 말은 하지마.”
백연혜는 유세운의 말에 얼굴을 가볍게 붉히며 대답했다.
“치! 그건 운오라버니가 먼저 고맙다고 하셨잖아요.”
“아! 그런가? 하하하. 미안.”
“미안이란 말도 하는 거 아니라고요.”
“윽! 그렇군…”
당황하는 유세운을 보며 백연혜는 눈웃음을 지었다.
장내의 정리가 끝나고 출발 준비가 끝나자 백연문의 공력을 담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그만 출발하겠습니다.”
백연문의 목소리를 들은 백연혜는 유세운에게 작게 말했다.
“이제 저희도 출발 하죠.”
“응. 그래. 가자! 일단은 남창으로!”
철탑백마인과의 결전(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