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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나무들이 쓰러지고 사방에 널려 각혈을 하고 있는 철탑백마인들을 창천백검수들이 포획하며 장내를 정리하고 있었다. 장내가 수습되는 것을 지켜보던 유태청이 작은 목소리로 유세운을 불렀다.
“세운아.”
“예.”
기죽은 목소리로 작게 대답하는 유세운을 바라보던 유태청은 뒤돌아 발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따라오너라.”
“예.”
아무 말도 못하고 조용히 따라나서기 시작한 유세운은 아버지의 준엄해 보이는 뒷모습에 잔뜩 기가 죽었다.
유태청은 장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본 아들의 신위(神威)는 정말 말을 못할 만큼 멋져보였다. 이미 강호에서 명성이 자자한 자들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긴 오늘 유세운이 보인 무위는 자신도 평생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일수에 하늘을 가르고 일수에 땅을 뒤집어엎을 것만 같은 무공을 보여준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유세운이 오늘 철궁마 전소에게 행한 행위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다. 그 장면만 생각하면 유세운의 사부라는 사람을 찾아가 한바탕 쏘아주고 싶었다. 어떻게 사부라는 사람이 아이에게 무공만 가르쳐 줄 수 있단 말인가. 마치 어린아이 손에 보검을 들려주는 것과 다른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태청은 생각보다 많이 일행에게서 떨어졌음을 느끼고 멈춰 섰다.
유세운은 말 한마디 없이 앞장 서 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에 잔뜩 기가 죽었다. 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잘 못 했는지 확실히 알 수가 없어 더욱 두려웠다. 말없이 걸어가던 아버지의 걸음이 멈추자 자연스레 멈춰 섰다.
유태청은 뒤돌아서더니 차분한 눈빛으로 유세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에서 나오는 엄중한 빛은 유세운을 더욱 움츠려 들게 했다. 유태청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부님이 누구시더냐?”
“예. 은태정이라는 분이십니다.”
“무광 은태정님이란 말이냐?”
“예.”
백연혜가 놀랬듯이 유태청 또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무광 은태정이라면 벌써 백년도 전의 고수였다. 그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에게 무공을 전수 받았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기만 했다. 유태청은 속으로 침음성을 삼켰다.
“그래. 너는 그분에게 무엇을 배웠느냐?”
“예?”
의외의 질문에 되묻던 유세운은 유태청의 눈빛을 보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분에게서 무공 몇 수를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무공 밖에 배운 것이 없단 말이냐?”
“예.”
“허허. 이를 어쩐단 말인가?”
“예?”
유태청은 다시 고개를 들며 되묻는 유세운을 바라보았다. 이런 어린 녀석에게 그런 고강한 무공을 전수해 준 이유를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이 울컥 치솟았다. 유태청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강호에서 살아가는 데에는 무공만이 전부는 아니다.”
“…예.”
고개 숙이며 작게 대답하는 유세운을 보며 유태청은 말을 이었다.
“강호라는 곳이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철칙이 존재한다마는 모든 이들이 그렇게 된다면 사마외도(邪魔外道)만이 존재하게 될 거다.”
“예.”
“물론 정파를 자처하는 인물들이라고 해서 모두 올바른 것만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들이 더욱 악할 수도 있지.”
“예.”
유세운은 아버지에게서 이렇게 무거운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던 터라 잔뜩 긴장한 채 이야기를 들었다.
“강호인들에게는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
납득할 수 없는 말을 들은 유세운은 대답이 없었지만 유태청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바로 자신이 쌓아온 무명이다. 그들은 아무리 간악한 사파, 또는 마도인물이라도 그가 쌓아온 명성이라는 것이 있다. 물론 자신이 쌓아온 명성에 목숨을 걸지 않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은 시정잡배와 다를 바가 없느니라.”
“예.”
“그래. 그런데 오늘 너는 그것을 짓밟았다.”
“예?”
유세운의 놀란 눈을 보며 유태청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너는 오늘 전소를 어떻게 대했느냐?”
“그야 당연히 해서는 안 될 짓을 했으니까 죄 값을 치르게 하려고…”
“…그는 강호에 나선 지가 이 애비보다도 오래된 인물이다.”
“예.”
“그간 수많은 악명을 떨치긴 했지만 그 또한 무림인. 그의 무명 또한 결코 가볍지 않느니라.”
“…예.”
“그런 그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치욕을 준다는 것은 그를 죽이는 것보다도 잔인한 일이니라.”
“…예.”
유세운은 이제야 자신이 한 일을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태청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거라. 만약 네가 오늘 전소의 입장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거라.”
“윽! 말도 안돼요.”
강하게 부인하는 유세운을 보며 유태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이다. 그런 치욕을 받고 살고 싶은 생각이 드는 자는 드물 것이니라.”
“…예.”
유태청은 유세운을 향해 다짐하듯 강한 어조로 말을 했다.
“앞으로 네가 강호를 살아감에 있어서 너의 무명은 네가 지켜야 하는 것이다.”
“예.”
“그것은 누가 지켜주는 것도 아니고 누가 대신 쌓아주는 것도 아니지. 그리고 만약 누군가가 너의 무명을 깎아내려고 한다면 철저히 보복을 해야 한다.”
“…예.”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부할 말은 출수함에 있어서 인정을 베풀라는 것이다.”
“인정을요?”
“그래. 아무리 무명이 중요하다지만 사람의 생명 또한 하늘이 내려준 가장 귀한 것 중 하나가 아니더냐.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는 말라는 뜻이다.”
“예.”
유세운은 자신도 항상 사람에게 출수함에 있어 죽지는 않을 정도로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걱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태청은 그런 유세운의 모습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유태청은 유세운의 어깨를 다독여주며 말을 꺼냈다.
“오늘 네 모습은 자랑스러웠다.”
“……”
자신의 어깨를 다독여주고는 일행이 있는 곳으로 먼저 걸음을 옮기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유세운은 미소 지었다.
“하하. 아버지가 그래도 내가 조금은 자랑스러우셨나보군.”
유세운은 일행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려다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유청운과 유주란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유청운은 유세운의 앞까지 걸어와 말을 건넸다.
“녀석…진작 말을 해주던지…”
“예? 아하하. 그게 말이죠…”
유주란은 잔뜩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야! 너 진작 그렇다고 말했으면 걱정도 안했을 거 아냐!”
“그…그게…”
차마 자신이 왜 무공을 숨기고 있었는지 말 하지 못하는 유세운은 변명거리를 찾느라 식은땀을 흘렸다. 유주란은 가볍게 주먹을 날려 유세운의 머리에 알밤을 놓았다.
“윽!”
엄살을 부리며 머리를 움켜쥐는 유세운을 보며 유주란은 양손을 허리에 얹고서 웃음 지었다.
“호호. 앞으로도 이 누나를 잘 모실 수 있도록…”
“크윽! 이럴 줄 알았어. 그래서 말 안했던 건데…”
“뭐?”
작게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을 들은 유주란의 눈에서 불이 붙는 듯 했다. 유세운은 얼굴빛이 파랗게 변하며 유청운을 향해 도움의 눈빛을 보냈다. 유청운은 가볍게 웃고는 유세운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유주란을 향해 말했다.
“너무 그러지 마라. 그러니까 세운이가 말도 못하잖니.”
“쳇! 오라버니는 항상 세운이만 걱정한다니까…”
“무슨 소리냐? 그건 나나 아버지나 너나 똑 같은 것을…”
“흥! 웃기지 말아요. 누가 저런 녀석을 걱정한다고.”
유세운은 토라진 듯 말하는 유주란을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하하하. 걱정 하지마. 누나. 내가 알아서 잘 모실께…”
“흥! 당연한 소리를 선심 쓰듯이 한다?”
“그런가? 하핫. 알았어. 미안해. 누나.”
유세운은 장난끼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고 유주란도 결국 실소를 터트렸다.
“너는 이제 나이도 스물다섯 이나 된 애가 아직도 그대로냐?”
“응? 그런가?”
유주란의 가벼운 말 한마디에 유세운은 심각성을 느꼈다. 자신이 아직도 그렇게 어려 보인다면 백연혜에게도 어리게만 보일 것 같았다. 유세운이 고민에 빠지는 것 같아 유청운이 어깨를 두르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유세운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유청운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가족이니까 그렇게 느끼는 거야. 고민하지 마라.”
“내가 뭘 고민했다고 그래?”
강하게 부인하는 유세운을 보며 유주란은 코웃음을 쳤다.
“흥! 너 내가 어려보인다고 했더니 바로 그렇게 걱정스런 표정을 짓던데? 누구한테 어리게 보이면 안 되는 걸까?”
“윽!”
말문이 막혀버린 유세운을 보며 유주란은 더욱 추궁했다.
“아까 누군가가 소매를 붙잡고 걱정스레 바라보던데 말야.”
“무…무슨…”
유세운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이자 유청운이 친절하게 충고했다.
“세운아. 그렇게 당황하면 더욱 의심을 사는 법이야.”
“의…의심?”
“뭐 의심이라기보다는 확신이지만 말이다.”
“윽! 형마저…”
유청운은 유세운의 어깨를 잡아끌며 말했다.
“가자. 다른 사람들도 기다리겠다. 아까 장내 정리가 다 돼갔거든…”
유세운은 유청운에게 끌려가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조심해야겠어. 이거 누나와 형이 눈치 챌 정도라면…위험해.’
철탑백마인과의 결전(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