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백연혜에게 오라버니라고 불리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는 아침 일찍 출발한 마차의 마부석에서 유세운의 표정은 과히 좋지 않았다. 어제 기분이 안 좋아 과음을 했다가 누나에게 말 한마디 못해보고 다시 마차를 몰고 있기 때문이었다. 유세운은 일행의 가장 선두에서 말을 몰고 가는 백연문의 등을 쏘아보았다. 더욱이 그의 옆에서 백연혜가 같이 있는 것을 보는 유세운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다그닥. 다그닥.
유세운은 마차 옆으로 말을 몰아오는 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돌렸다. 마차의 우측 편으로 바짝 말을 몰아온 유청운이 걱정스레 물었다.
“세운아 무슨 일 있느냐?”
“에? 무슨 일이라뇨?”
“어제부터 네 표정이 좋지 않은데…”
유세운은 어제부터 자신을 지켜봐왔다는 유청운의 말에 가볍게 웃음 지었다.
“훗. 아무것도 아니에요. 걱정 하지마세요.”
“그러면 다행이고…”
유청운은 가볍게 웃음 짓고는 말머리를 마차와 나란히 하며 말을 몰았다. 유세운은 백연문을 다시 쏘아보며 물었다.
“형.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요”
“그래? 물어봐.”
“삼룡삼봉이 어떤 사람들이에요?”
“삼룡삼봉?”
“예. 저 앞에 가는 백연문이라는 사람도 거기 든다면서요?”
“아. 그래. 네가 산에서만 수련해서 잘 모르는 구나. 설명해 줄께. 삼룡삼봉이란 현 강호무림에서의 신진고수 여섯 명을 일컫는 말이야.”
“신진고수요?”
“그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들은 모두 강기를 뿜어낼 정도의 고수라더군.”
“강기라…”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백연문의 등을 다시 쏘아보았다. 유청운의 설명이 이어졌다.
“삼룡이라 하면 창천뇌검 백연문, 철마신장(鐵魔神掌) 독고헌, 수라권마(修羅拳魔) 단우태가 있지.”
“독고헌?”
“그래. 지금 마차에 타고 있는 독고극의 형이지.”
“에게? 저런 녀석의 형이라고요?”
유청운은 빈정거리는 유세운을 보고 웃음 지으며 말을 이었다.
“걱정 하지마. 독고극과 독고헌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라니까…”
“그래요?”
“그럼. 철마성의 후계자인걸…”
“흐음. 그렇군요.”
유세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유청운은 그런 그를 보며 웃음 지었다.
“네가 만날 일은 없는 인물들이지만 그래도 강호에 대해서는 조금 알아두는 게 좋아. 수라권마 단우태는 수라성의 후계자라고 하는데 배일에 싸인 인물이야. 아직 강호에서 단 한번의 활동도 없었는데도 삼룡에 들었거든…”
“수라권마 단우태…”
유세운은 왜인지 모르게 인상 깊은 이름이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리고 삼봉이라면 청수성의(淸手聖醫) 조예림과 혈라묵편(血羅墨鞭) 황혜란, 승천단창(昇天短槍) 헌원옥이 있지.”
“에? 가만 왜 백소저는 거기 안 드는 거예요?”
유청운은 유세운의 질문에 의미심장한 눈빛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삼룡 삼봉이라하면 모두 현 일궁, 이성, 삼문의 후계자들이기도 해. 뭐. 가장 아름다운 세 명의 미인이라는 말이 있지만 백소저와 비교를 해주지는 못하겠구나.”
“이런 엉터리 같은…”
고개를 숙이고 작게 투덜거리는 유세운을 보고 유청운은 다시 한번 웃음 지었다.
“청수성의 조예림은 청의문의 금지옥엽인데 뛰어난 의술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구나. 마음씨도 착해서 아주 호평을 받고 있는 분이지.”
“그래요?”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유세운을 지켜보는 유청운은 어깨를 들썩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혈라묵편 황혜란은 강호에서 가장 가시가 돋친 미인으로 꼽고 있어. 성격이 상당히 안 좋다고 소문이 나있지. 하지만 미인은 미인이라고 하더라.”
“성격 안 좋은 미인이라면 필요 없어요.”
“녀석 걱정 하지마. 지금 말하는 삼룡 삼봉은 무림인이라도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한 사람들이니까…”
“그건 그렇군요. 하하하.”
“그래. 그러니 그런 걱정은 하지마라. 그리고 승천단창 헌원옥은 삼봉 중에서 가장 무공이 뛰어난 인물로 꼽고 있어.”
“예? 그렇다면 혹시 뭐 근육질의 뭐 그런 거 아네요?”
“후훗. 아니. 두 개의 단창을 쓰는데 그녀가 쌍창을 쓰는 모습을 보면 대부분의 남자는 정신을 못 차리지.”
유세운은 갑자기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한 유청운의 모습을 보고 물었다.
“본 적 있어요?”
“응? 아! 예전에 네가 행방불명이 되서 양숙부님을 찾아 뵌 적이 있었거든… 그때 우연히 봤었다.”
“오호. 그런데 정말 미인이에요?”
유세운의 질문에 유청운은 얼굴을 가볍게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적어도 내가 지금껏 본 사람 중에서는 최고의 미인이었다.”
“쳇.”
유세운은 유청운을 향해 가볍게 투덜거렸다.
‘하긴 형은 아직 백소저의 진면목을 보지 못했으니 그렇겠지.’
유세운은 나름대로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일 때 유청운의 말이 이어졌다.
“성격도 발랄하고 하지만 무공은 정말 뛰어나더라.”
“예? 그걸 어떻게 알아요?”
유청운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녀에게 단 삼 초 만에 패했었다.”
“예?”
유세운이 당황하며 되묻자 유청운은 쑥스럽다는 듯이 어깨를 들썩였다.
“양숙부님과 친하게 지내던 그녀가 우연히 찾아온 날 보더니 한번 겨뤄 보자고 했어. 처음엔 나도 조금은 그녀를 경시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가히 명불허전이더구나. 제대로 손도 못써보고 패했다.”
“하? 현류십삼검을 펼쳤는데도요?”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했다.”
“호~정말 강한 여자네요. 그런데 형.”
유세운은 목소리를 일부러 작게 냈다. 유청운은 말 위에서 고개를 숙여 유세운에게 다가갔다.
“그 여자한테 반했군요?”
“뭐?”
얼굴을 붉히며 크게 대답하는 유청운은 주변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히자 더욱 얼굴을 붉혔다. 일행의 선두에 있던 백연문과 백연혜가 말을 몰아 마차 곁으로 다가왔다. 백연문이 주변을 돌아보며 유청운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입니까?”
“아니 그게…”
유청운이 주저하자 유세운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신 대답했다.
“제가 마부석에 오래 앉아 있다보니 엉덩이가 아파서 잠시 쉬자고 했더니 그럴 수는 없다고 저런 겁니다.”
“아! 그렇군요.”
백연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쉴 만한 곳이 있으니 그때까지만 참아 주시오. 금방이오.”
“예.”
백연문은 다시 앞쪽으로 말을 몰고 나갔고 백연혜는 유세운을 빤히 쳐다보았다. 유세운이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자 백연혜는 눈웃음을 한번 지어주고는 말을 몰아 앞으로 향했다. 멀어지는 백연문과 백연혜를 보며 유청운은 유세운을 향해 한마디 했다.
“다시는 그런 소리 마라.”
“예? 왜요?”
유청운은 유세운의 말에 씁쓸하게 웃음 지었다.
“지금 나는 그녀 앞에 설 자격이 없으니까…실력으로나 모든 면에서…”
유세운은 가만히 유청운의 옆모습을 지켜보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걱정마요. 내가 반드시 이루어지게 해줄게요. 그렇게 되면 나한테 형수님이 되겠군. 후후후.’
아직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여자를 생각하며 유세운은 작게 속으로 웃었다.
잠시 후 일행은 길옆에 생긴 공터로 말을 몰았다. 유세운도 마차를 세우고는 나무 그늘로 들어가 앉았다. 유세운은 가볍게 물통을 꺼내 목을 축이고는 나무에 등을 기대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자신에게 친근하게 다가와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떠나는 바람을 음미하고 있을 때 바람을 타고 전음성이 들려왔다.
(힘드시죠? 오라버니가 옆에 있어서 말도 못 나누네요.)
유세운은 백연혜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얼굴가득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금세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빌어먹을… 사부는 제자한테 전음성 하나 가르쳐 주지 않았잖아! 제길!’
(어디 안 좋으세요?)
유세운의 안색을 살핀 백연혜의 전음에 그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유세운은 천천히 눈을 떴다. 저 멀리서 말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말발자국 소리가 다가오자 백연문도 고개를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그닥. 다그닥.
잠시 후 십여 마리의 말이 일행의 앞에서 멈추었다. 가볍게 먼지가 한 차례 일고 유세운의 안색이 찌푸려졌다.
‘어떤 자식이 와서 먼지를 날리는 거야?’
백연문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저희를 찾아오신 겁니까?”
정중하게 묻는 백연문을 가장 선두에서 말을 몰던 사내가 내려다보았다. 소매에 그려진 매화문양을 본 유세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거 어디서 많이 본 건데…?’
소매에 매화문양이 그려진 사내가 말에서 내리더니 백연문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저는 정협련의 련주를 맡고 있는 호강현이라고 합니다.”
호강현의 소개에 백연문은 의외라는 눈빛을 띠며 마주 포권을 취했다.
“저는 백연문이라고 합니다.”
백연문의 소개에 호강현을 비롯한 다른 인물들 모두 얼굴에 놀라움의 빛이 떠올랐다. 이미 호강현이 포권을 취할 때 말에서 내렸던 인물들은 모두 백연문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백연문은 어색하게 웃으며 호강현에게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정협련주께서 이곳까지?”
호강현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이번에 창천궁에서 흑마천살대원들을 호송 한다는 소문을 듣고 뭔가 도움이 될까 해서 왔습니다.”
“하하. 그런 일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백연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정협련의 련주나 되는 자가 이런 곳까지 와서 자신을 돕겠다는 것이 고맙기도 했지만 한심스러운 마음이 더 컸다. 자신의 위치를 망각한 행동에 그를 경시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백연문은 가볍게 서로 몇 마디 주고받는 것으로 호강현의 호의를 받아 들였다.
호강현은 이곳에서 잠시 쉬고 가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는 천천히 장내를 훑어보았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자신의 사제를 쓰러뜨릴 만 한 자가 쉽게 보이지 않았다. 창천백검수는 아니니 그의 시선은 당연히 유가장의 가족에게 쏟아 질 수밖에 없었다. 유세운을 바라본 호강현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고는 유청운을 바라보았다.
‘그래. 저자가 분명하군. 하지만 검을 쓴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그런 그의 생각은 그를 가로지르며 앞으로 나가는 동철을 바라보며 멈췄다. 동철은 아무 말 없이 유세운을 향해 다가갔다. 동철은 허리춤에 매고 있던 물통을 꺼내 유세운에게 던졌다.
유세운은 눈을 반개한 채 약간 낯이 익은 녀석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다가 물통을 집어 던지는 것을 보고는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에게 물통을 집어 던진 것도 모자라서 옆에 와서 털썩 주저앉은 녀석은 가볍게 웃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곡차니까 마셔.”
“곡차?”
유세운은 가볍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철은 그런 유세운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그래. 십삼 년 전 네가 내게 권했던 곡차야. 맛도 그대로 일거야. 그곳에 들려서 사왔으니까.”
“십삼 년 전?”
유세운은 가만히 십삼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기억을 더듬었다. 십삼 년 전이라면 자신이 집을 막 나왔을 때였다. 그리고 곡차라고 한다면 분명히 웬 도사와 한 명의 꼬마가 생각났다.
“너…너…동철이냐?”
“그래. 반갑다.”
동철이 내민 손을 마주 잡은 유세운은 오랜 친구를 만난 것만 같은 기분에 얼굴 가득 웃음꽃을 피웠다. 동철도 보기 드물게 환한 웃음을 지었다.
호강현은 그런 동철의 모습을 보다가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저 녀석은 누군데 부련주가 저렇게 친하게 구는 거지? 저런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호강현의 뒤로 다가오던 열명의 청년들이 조용히 물었다.
“련주님. 저자는 누구입니까? 부련주의 저런 모습은 처음 보는 군요.”
호강현도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나도 처음이라 뭐라 말해줄 수는 없군. 자네도 처음인가?”
호강현은 고개를 돌려 도사 복장을 하고 있는 청년을 향해 물었다. 청년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저희 무당파 내에서도 동사숙의 저런 모습은 본 적이 없습니다. 의외군요.”
“그래? 정말 이상하군…”
호강현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고는 다시 유청운을 쏘아 보았다.
‘흥. 나를 보고도 태연하게 앉아 있는 것을 보면 믿는 구석이 있나보군. 아무리 창천궁이랑 같이 움직인다 해도 네놈이 저지른 짓에 대한 대가는 받아야겠지.’
백연혜에게 오라버니라고 불리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