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유가장을 두고 떠나다.”
유가장의 대청에 유세운과 백연혜 그리고 여운이 들어섰다. 대청에는 유태청과 유청운, 유주란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유주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백소저랑 같이 오다니 말야.”
“어? 아 그게 말이지…”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백연혜는 유세운의 앞으로 나서며 말을 꺼냈다. 유태청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리를 권했다.
“일단 앉으시지요. 주란아 가서 차 좀 내 오거라.”
“예.”
유주란이 일어서 나가며 슬쩍 유세운을 째려보았다. 유세운은 태연하게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서는 유청운의 옆으로 가 자리에 앉았다. 백연혜가 앉고 여운은 그녀의 뒤에 시립해 있었다. 유태청이 허허롭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창천백검수가 소문보다 훨씬 뛰어나더군요.”
“과찬이십니다.”
“아닙니다. 강호의 소문이 너무 그들을 과소평가 했더군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높게 평가해주시다니…”
“백소저 고마워요. 백소저 덕에 철마성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어요.”
유주란이 차를 들고 들어오며 백연혜에게 감사의 말을 건네자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모든 일은 유세운 덕이었는데 그의 뜻이기에 이런 오해가 일어난 것에 한숨이 다 세어 나왔다.
“아니…뭘요…당연히 저희가 해야 할 일인걸요.”
“아니에요. 저 때문에 집에 혈겁(血劫)이 일어날 뻔 했는데…”
유세운은 유주란의 침울한 목소리를 듣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무슨 소리야? 누나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
유주란은 유세운을 째려보며 말했다.
“흥! 야 아무 도움도 안 될 네가 뭔 말이 많냐?”
“쳇!”
“이게!”
화를 내려던 유주란은 백연혜와 여운을 한 번 바라보더니 조용히 그들 앞에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유주란은 조용히 유세운을 흘겨보고는 전음을 날렸다.
(손님들 앞이라 봐준 줄 알아.)
유세운은 어깨를 들썩이고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큭! 내가 이걸 왜 마신거지? 으~’
유세운은 백연혜가 유태청에게 말을 거는 것을 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장주님 드릴 말이 있습니다.”
“그런가요? 말씀하시죠.”
“솔직히 이번에는 어떻게 흑마천살대를 막기는 했습니다만…”
“그렇게 겸손할 필요는 없소. 창천백검수는 부상자 한 명 없지 않소?.”
백연혜는 가볍게 얼굴을 붉혔다.
“그건 그들이 저희의 계략에 빠져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드릴 말은 외람되지만…”
“흠 괜찮소. 말해보시구료.”
백연혜는 잠시 뜸을 들였다. 솔직히 이런 말이 실례가 된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이번 일은 꽤나 중요한 일이었다. 유가장에 있어서나 창천궁에 있어서나 물론 자신에게 있어서도 말이다. 백연혜는 결국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유가장의 전 인원이 잠시 저희 창천궁에 머물러 주실 수는 없는지요?”
유태청은 백연혜의 말을 듣고 안색을 굳혔다. 그녀가 한 말은 자신의 인생을 걸어 만들어 온 유가장을 포기하라는 말과 같았다. 유태청은 결국 이유를 물어 볼 수 밖에 없었다.
“이유가 뭔지 말해 줄 수 있겠소?”
“철마성이 흑마천살대면 충분할 줄 알았을 텐데 의외로 흑마천살대가 무너지고 독고극까지 잡혔으니 아마도 철탑백마인(鐵塔百魔人)을 보낼 것 같습니다.”
“철탑백마인…”
“설마요?”
놀라서 묻는 유주란을 보며 유세운은 귀를 후벼 팠다.
“왜 그렇게 놀라고 그래? 그들이 뭐 그렇게 대단해?”
“뭐? 아니 너는 어떻게 된 애가 강호 소식에 깜깜 무소식이냐!”
“그딴 건 몰라도 잘 산다고…”
“흥! 과연 그럴까? 네 실력이라면 흑마천살대원 한명도 무리거든? 그런데 철탑백마인이라 하면 그들 중 일인이 흑마천살대원 스무 명을 거뜬히 상대한다는 얘기가 있어. 그러니까 그들은 백 명 밖에 안 되지만 그들의 전력은 흑마천살대의 두 배에 달하는 집단이지.”
“뭐?”
유세운은 그래서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유태청은 침음성을 삼켰다.
“흠. 철탑백마인까지…”
“예. 분명히 그들이 올 것입니다. 그리고 유장주님을 초청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기도 합니다.”
“흠…창천궁주께서?”
“예.”
유태청은 안색을 더욱 굳혔다. 창천궁주가 그렇게까지 말했다면 그의 체면도 생각을 해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유태청은 유청운을 바라보았다.
“청운아 네 생각은 어떠냐?”
유청운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저희로서는 흑마천살대도 힘든 상대였습니다. 물러나심이… 식솔들을 위해서도 좋을 것 같습니다.”
유태청은 유청운의 눈빛이 굴욕감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파했다. 유태청은 유주란을 바라보았다.
“네 생각은 어떠냐?”
“저야 저 때문에 커진 일. 아버지 뜻에 따를게요.”
유태청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유세운을 바라보았다.
“그래. 세운아 네 생각은 어떠냐?”
유세운은 형의 얼굴과 누나의 얼굴 그리고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나서면 그깟 철탑백마인 따위 와봤자 충분하다고 말해서라도 그들의 얼굴에 웃음을 주고 싶었다. 고민하던 유세운은 살짝 백연혜를 바라보았다. 백연혜를 바라본 유세운은 결국 어깨를 들어올리며 대답했다.
“그냥 같이 가죠? 이곳에 있다가는 무서워서 잠도 못 잘 것 같아요.”
“네 생각도 그러냐? 좋다! 백소저 같이 갑시다. 하지만 준비를 하려면 내일 쯤 떠나는 것이 어떻겠소?”
“감사합니다. 그럼 저희도 준비시키겠습니다.”
백연혜는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연혜와 여운이 밖으로 나가자 유태청이 참았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휴~결국 물러나야 하는 건가?”
“아버지. 다시 돌아오시면 됩니다.”
“그래요. 아버지 힘내세요.”
“에이…아버지 왜 그러세요. 다시 안 돌아올 것도 아닌데요. 뭐.”
“그래. 그래야겠지. 다시 돌아와야지.”
유주란은 유태청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유세운을 바라보았다. 유주란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물었다.
“너 정말 백소저랑 아무 사이도 아니지?”
“왜? 무슨 일 있어?”
유세운의 되물음에 잠시 생각을 하던 유주란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아니. 그냥 처음 온 날이랑 이번이랑 분위기가 많이 다른 것 같아서…”
“그래? 흠…”
유세운은 속으로 기뻤지만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그럼 저 먼저 가서 준비하고 있을게요.”
“그러도록 하거라.”
유세운은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서 나왔다. 유세운은 방으로 가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그렇게 보인단 말이지. 하지만 별로 달라진 건 없는데?’
유세운은 입가의 미소가 사라지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유세운은 기지개를 힘껏 키고는 침대로 몸을 날렸다. 침대에 몸을 파묻고 뒹굴려는 순간 방문 밖에서 유청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운아.”
“응? 형이에요? 무슨 일이에요?”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유청운은 씁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구나. 이 형이 능력이 부족해서 네가 돌아오자마자 다시 집을 떠나게 만들어서…”
“하하. 아니에요. 뭘…”
유청운은 밝게 웃으며 대답하는 유세운을 기특하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다가가 그의 머릴 헝클어트리더니 칭찬했다.
“녀석. 아버지 힘드실까봐…밝은 척 해줘서 고맙다.”
“헤헤. 뭘…”
“그럼 천천히 준비하거라.”
“예. 형도…”
유청운은 잠시 유세운을 바라보다가 방문을 열고 나갔다. 유세운은 침대에 다시 몸을 뉘우며 중얼거렸다.
“내가 어떻게라도 막을 걸 그랬나?”
“뭘 막아요?”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던 유세운은 문가에 서 있는 백연혜를 보고는 활짝 웃었다.
“아! 아니오. 하하. 무슨 일이에요?”
“흠. 제가 오면 안 될 곳을 왔나보군요.”
“아…그건 아닌데…어서 들어오세요.”
유세운이 안절부절 못하며 말하자 백연혜는 피식 웃으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훗. 알았어요.”
“흠. 이런 어쩌죠? 대접할 것 두 없는데…어쩌지?”
“아니에요. 그것보다 아까 고마웠다는 말을 하려고요.”
“응? 뭐 말이에요?”
“유공자가 저희와 같이 가겠다고 하셔서요.”
“하하. 그야 뭘 당연한 걸 가지고…”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러워하는 유세운을 보며 백연혜는 고개를 흔들며 진지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고마워요. 혹시나 공자의 실력이 뛰어나서 남으려고 하면 어쩌나 했어요.”
“하하. 그런데 남으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
백연혜는 유세운의 말에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면 공자가 다치거나 심하면 죽을 위험도 있으니까요.”
“어? 지금 날 걱정해 주는 거예요?”
“……”
“……”
서로의 말에 무안해져서 둘은 말이 없이 잠시간의 침묵을 가졌다. 백연혜가 먼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럼 준비하세요.”
“아. 그러죠. 백소저도 준비하실 게 많겠네요.”
“예. 그럼.”
밖으로 나가던 백연혜는 잠시 멈추어 서더니 작게 말을 건네고는 서둘러 나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같이 가줘서 고마워요.”
백연혜의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유세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 이거. 이거. 걱정까지 해주다니. 하하. 기분 좋은데…”
유가장을 두고 떠나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