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아침 해가 떠오르는 광경은 혼자보기에는 아까울 만큼 아름다웠다. 서서히 하늘을 밝아오는 여명을 바라보며 유세운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폐 속 가득히 밀려오는 새벽공기는 진기를 충천시켰다. 유세운은 가슴 가득 차는 진기를 느끼며 천천히 팔각연환권을 펼쳐보기 시작했다. 마치 사부와 겨루듯이 펼쳐지는 팔각연환권은 빠르고 표흘하기가 바람 같았다. 하지만 바람을 닮아가는 그의 권로(拳路)는 퉁명스레 들려오는 목소리에 의해 멈춰졌다.
“야! 너 십삼 년동안 배웠다는 게 고작 그거냐?”
“응?”
뒤를 돌아보며 새벽의 무공수련을 방해한 인물을 바라본 유세운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뒤에는 유주란이 팔짱을 끼고는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유주란은 자신의 등에 매고 있는 검을 툭툭치며 말했다.
“어때? 이 누나가 진정한 무공이 뭔지 가르쳐줄까?”
“하하! 누나 참아줘. 누나가 보시다시피 나 이정도 밖에 안 되거든…”
“그러니까 조금 배워보라니까? 그렇게 대책 없이 주먹과 발만 뻗어서 뭘 하자는 거야?”
“하하. 배운 게 이거 밖에 없어서 말야.”
“좋아. 이 누나가 조금 가르쳐 주지.”
차앙!
맑은 검명과 함께 검을 뽑아드는 유주란을 보는 유세운은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진짜 이럴 거야? 아침부터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거야!”
“그냥 심심해서~”
유주란은 가볍게 검을 찔러왔다. 유세운은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바닥에 구르며 피했다.
‘에이 씨! 이거 마음대로 할 수도 없구. 두고 보자!’
“호호호. 대체 그 뇌려타곤(惱驢惰坤)은 어디서 배운 거냐?”
“으윽!”
유세운은 이를 갈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이런 굴욕까지는 못 참겠다는 생각에 제대로 한 수 단단히 가르쳐 줘야겠다고 일어나는 순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하는 거냐? 이런 아침부터?”
“형!”
자신을 구원하는 목소리를 들은 유세운은 반갑게 형을 부르며 달려갔다. 유주란은 도망가는 유세운을 보고는 입맛을 다셨다.
“오빠는 왜 지금 와서 세운이를 돕는 거야?”
“돕기는? 그렇다고 너 무공을 배워서 동생 괴롭히려고 한건 아니잖니.”
“그건 그렇지만…”
“세운이 없어졌다고 했을 때는 제일 걱정하던 녀석이…”
“뭐! 내가 언제!”
화를 내는 유주란을 바라보고 유세운이 피식 웃었다.
“에이 그러면서 나는 왜 괴롭히려고 하는 거야?”
“왜긴 왜야?”
유주란은 검을 검집에 꽂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야 괴롭혀줄 동생이 없어서 그런 거지 뭐.”
“뭐?”
유세운이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째려보자 유주란은 혀를 내밀며 웃었다. 유청운은 가볍게 유세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어제 출발한 백소저가 오늘 아침 일찍 왔더구나.”
“그래요? 분명히 어제는 강서성의 분타주를 만나러 간다고 했는데…”
“그래. 생각보다 일찍 일이 끝났는지 오늘 아침에 왔더구나.”
“흐음. 그래서 지금 어디 있어요?”
“후원으로 갔지. 이제 막 도착했거든…”
“아! 그래요.”
유세운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후원으로 향했다. 유주란은 그런 유세운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빠. 오빠가 보기에도 이상하지 않아?”
“그래. 내가 보기에도 뭔가 이상하구나.”
유청운과 유주란은 같이 팔짱을 낀 채로 멀어져 가는 유세운을 바라보았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후원으로 향한 유세운은 여운과 함께 있는 백연혜를 볼 수 있었다. 창문을 열어놓고 방안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백연혜를 본 유세운은 창턱에 팔을 괴고 섰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됐어요?”
“아! 유공자. 들어오세요.”
“그럴까요?”
유세운은 가볍게 창문을 넘어 방안으로 들어섰다. 백연혜는 그의 모습에 가볍게 미소 지었다.
“창문으로 들어오시면 어떻게 해요.”
“아! 하하하. 이거 실례를 했네요.”
유세운은 계면쩍게 웃고는 다시 창문을 넘어가려고 했다. 백연혜는 그런 유세운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 여기 와서 앉으세요. 다시 나갈 건 없잖아요.”
“하하. 그런가요? 그럼 실례.”
유세운은 가볍게 발걸음을 옮겨 백연혜의 맞은편으로 가서 앉았다. 유세운은 백연혜에게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됐어요?”
“아! 그 일이요? 개방에서 도와주기로 했어요.”
“그럼 그들이 언제쯤 사람을 보내주나요?”
“내일까지는 보내주기로 했어요.”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역시 의문점은 남아 있었다.
“그들이 인원은 많다고 하지만 천 명이나 되는 인원을 호송할 수 있을까요?”
“개방의 인원이야 아주 많으니 걱정할 것은 없죠. 이번에 그들이 인원을 보충해줘서 흑마천살대원들을 백 명 단위로 나눠서 본궁으로 호송할 거예요.”
“흠. 백 명씩 열 단위로 나누면 되겠군요.”
“예. 그리고 저희 창천백검수도 그들 중 백 명을 맡아 호송하게 되겠지요. 물론 표충은 저희가 데려가고요.”
“독고극도 데려가겠죠?”
“예. 그도 저희가 호송해야 될 것 같아요. 그 둘이 이번에 잡은 인원들 중 가장 인질의 값어치가 있는 인물들이니까요.”
“흐음. 그렇군요.”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유가장의 연무장에는 일주일전 저녁의 격전으로 잡아온 인원들까지 포함한 흑마천살대원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유태청은 창천백검수의 무용에 놀라긴 했지만 그 많은 인원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고민했고 그 일로 개방에 협조를 구하기 위해 어제 백연혜가 출발했다가 오늘 아침에 도착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을 모두 한꺼번에 창천궁으로 데리고 가기로 했지만 뭔가가 계속 가슴 한쪽을 아려오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의 정체를 잘 모르던 유세운은 백연혜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출발일이 언제죠?”
“아마 내일은 조금 무리일 것 같고 이틀 후면 가능할 것 같아요.”
“아! 그럼 창천궁으로 돌아가는 거죠?”
“예. 물론이죠.”
백연혜의 대답을 들은 유세운은 자신의 가슴 한쪽이 왜 아파오는 지 어렴풋이 느꼈다. 백연혜가 떠나간다는 얘기를 듣고서야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했다. 유세운은 말없이 백연혜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면사를 쓰고 있긴 했지만 그날 본 백연혜의 모습은 눈을 감아도 생생하게 떠올라 별 지장은 없었다. 아마도 이번에 떠나면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아니 혹 만날 일이 있을지도 몰랐다. 자신이 창천궁을 찾아가면 설마 박대하지는 않겠지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유세운을 바라보며 백연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말없이 자신을 보다가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가 하는 유세운의 눈빛을 보던 백연혜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예요?”
“뭐 특별히 할일은 없죠.”
백연혜는 속으로 웃으며 태연하게 물었다.
“그럼 이번에 저희 창천궁에 같이 가지 않을래요?”
“창천궁에요?”
유세운은 백연혜의 질문에 구미가 동한 듯 웃음을 지었다. 백연혜는 그런 유세운을 바라보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이건 유장주님에게도 말하려고 하는 거였지만 아무래도 이 곳은 위험할 것 같아요.”
“위험? 무슨 소리에요?”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묻는 유세운을 보며 백연혜는 잠시 그의 무공능력을 의심할 만한 말을 했다는 것을 알고는 얼굴을 붉혔다.
“물론 유공자가 있으니 걱정은 없지만 그들이 노리는 것은 유공자가 아니니까요.”
“흠.”
유세운은 백연혜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유장주님께 부탁해서 같이 창천궁으로 가셨으면 해서요.”
“흠. 창천궁이라…”
유세운은 솔직히 자신이야 백연혜랑 안 떨어져 있어 좋을 듯 했지만 과연 아버지는 어떨지 고민했다. 이곳에서 지내오신 지가 벌써 몇 십 년이 지났다. 이 곳에서 터를 닦고 유가장의 이름이 인근 지역에서 유명해진 것은 아버지의 노고였다. 그런데 그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
“흠. 이건 제 문제가 아니군요. 저만 가기에도 위험하고…”
“예. 유장주님에게 부탁하려고 하고 있어요.”
“아버지의 뜻을 존중할게요.”
유세운은 조금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리 자신이 가고 싶다고 해도 갈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가면 이곳에 철마성이 손을 썼을 때 방도가 없었다. 그리고 만약 아버지의 뜻이 이곳에서 꺾이지 않고 지내시겠다고 한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줄 것이었다. 유세운의 안색을 살피던 백연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예?”
갑작스런 백연혜의 말에 유세운이 부지불식간에 되물었다. 백연혜는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그럼 저희는 일단 유장주님을 뵈러 갈까요?”
“아버지는 왜요?”
“그야 창천궁으로 모시고 가려고 하는 거죠.”
유세운은 차분히 백연혜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한 가지만 말하죠. 저는 아버지의 뜻을 존중해 드릴 거예요.”
“물론이죠. 저희도 유장주님의 뜻을 존중할 거예요.”
“그럼 다행이군요.”
백연혜는 가만히 유세운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흑마천살대를 호송하는 길이 위험할 텐데요. 저는 같이 갔으면 좋겠네요.”
“아! 물론이죠. 저도 그랬으면 좋겠군요.”
유세운의 대답을 들은 백연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한 말을 음미하던 유세운도 당황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에게 가죠. 아마 대청에 있을 거예요.”
“예. 그렇게 하죠.”
여운은 어색해 하면서도 서로의 속내를 조금씩 내비치는 두 남녀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유공자라면… 그래 유공자라면 충분하시지.’
유가장을 두고 떠나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