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오문-34화 (34/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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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의 동쪽에 위치한 북천(北天)

지금으로 말하자면 만주지방을 중원사람들은 북천이라고 불렀다.

그들과의 교류는 거의 없었지만 그곳에도 엄연히 강호가 존재했다. 중원과는 전혀 별개의 강호였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법과 질서가 존재했다.

북천의 법이나 질서라 하면 모든 것은 북천방(北天房)으로 통했다.

북천방에서 내뱉은 한마디는 법이자 질서였고 그들의 행사를 막을 수 있는 것은 북천의 땅 어디에도 없었다.

북천방

높이 삼장 높이의 담벼락이 반경 백리에 달하는 언덕을 감싸고 있었다. 언덕이라고 보기보다는 하나의 작은 산과 같은 곳이었는데 그곳에 지어진 북천방의 크기는 그들의 위세를 확실히 보여줬다.

북천방의 방주가 머무는 곳인 천주각(天主閣)에서 부드러운 금음(琴音)이 들려왔다.

한명의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 섬섬옥수(纖纖玉手)로 물결치듯 금을 켜고 있었다. 다소곳이 앉아 눈을 반쯤 감은 체 금을 켜는 그녀의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단아한 이마와 오똑한 콧날 그리고 도톰한 붉은 입술은 색기(色氣)마저 물씬 풍겼다. 새하얀 피부 때문인지 더욱 입술이 돋보였다. 청순한 듯 보이는 전체적인 인상에 유독 붉은 입술이 조화를 깨며 색기를 물씬 풍겼다. 그런 그녀의 금음은 부드럽기만 하던 것이 서서히 격정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홍조를 띄우며 금을 켜고 있었다. 금음을 가장 잘 들을 수 있는 그녀의 맞은편의 비단 침상에는 한 명의 중년인이 반쯤 누워있었다.

중년인은 가슴팍까지 내려오는 검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굵은 눈썹과 선이 굵은 콧날은 그의 강인한 인상을 돋보이게 했다. 전체적으로 무거운 기운을 보여주는 인상이었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는 지금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중년인은 금음에 깊이 심취해 있었다. 그녀의 격정적인 금음은 절정에 달했다.

팅~

“하악!”

여인의 입이 벌어지며 거친 숨이 토해졌고 금의 현이 한줄 끊어져 튀어 올랐다. 중년인의 안색이 미미하게 찡그려졌다. 여인은 다급히 오체투지(五體投止) 했다.

“죄…죄송합니다. 방주님!”

외모에서 기대했던 만큼 그녀의 작은 떨림이 있는 목소리는 듣는 이의 가슴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중년인은 손을 들어 그녀를 불렀다.

“이리 오거라.”

부드러운 중년인의 목소리에 여인의 떨림은 더욱 잦아졌다. 여인은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인 체 중년인에게 다가갔다. 중년인은 가볍게 웃음 짓고는 그녀를 침대에 앉혔다. 그녀의 몸이 떨리는 것을 느낀 중년인은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에 얹었다.

“왜 이리 떠는 것이냐?”

“아…아닙니다.”

“후후. 걱정하지 말거라. 설마하니 내가 너를 어떻게 하겠느냐? 이 북천의 땅 어디에도 너 만한 아이가 없거늘…”

여인은 눈에서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가…감사합니다.”

“후후. 그러니 이제 그만 떨 거라. 보는 내 마음이 아프구나.”

“예. 방주님.”

방주라 불린 중년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여인의 입술을 향해 다가갔다. 천천히 다가가던 중년인은 피식 웃었다. 여인은 감았던 눈을 뜨고는 걱정스레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중년인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여인은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중년인의 이런 눈빛을 할 때 곁에 있다가 살아남은 이가 아무도 없음을 누구보다 가장 잘 아는 그녀였다. 그녀의 눈에 두려움의 빛이 가득해졌다. 중년인은 그런 그녀의 눈빛을 보더니 가볍게 혀를 찼다.

“허허. 괜찮다. 내 너 때문에 이러는 것이 아니니라. 오늘은 그만 물러가거라.”

“예. 알겠습니다.”

여인은 깊이 절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금을 들고 고개를 숙인 체 방을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중년인은 가볍게 혀를 찼다.

“허허. 이거 참 아쉽군. 오늘은 기분이 아주 좋았는데 말이야.”

여인이 물러나고 나자 중년인은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자단목으로 만들어진 탁자에 다가간 중년인은 천천히 차를 한잔 따르며 중얼거렸다.

“제법이군. 감히 북천방의 심처인 이곳까지 들어올 수 있다니…”

“역시 명불허전(名不虛傳)이시군요.”

굵고 갈라지는 목소리가 귀를 거슬렸다. 중년인은 가만히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자리에 앉았다.

“누군가?”

“북천방주이신 광천주(光天主) 이청형(李淸炯)이 맞으십니까?”

“흠. 맞네만 나에 대해 아직 잘 모르나 보군?”

그의 뒤편에 그림자처럼 나타나 있던 흑의인은 일순 당황했다. 전신을 흑의로 감싸고 단지 눈만을 내놓고 있던 흑의인의 안색이 급변하며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마치 그 자리에 있었으면 갈갈이 찢어질 것만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흑의인의 당황한 목소리가 세어 나왔다.

“확실히 북천방주님이 맞으시군요.”

“호. 제법이군? 이건 정말 의외인데?”

“과찬이십니다.”

“한 가지만 말해주지. 내 앞으로 오게. 난 내 뒤에 누가 있는 것을 용납지 못하는 성격이니까.”

“예. 그러지요.”

방금 전의 기세에 놀란 가슴을 달래며 북천방주의 맞은편으로 간 흑의인은 선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북천방주는 천천히 차를 한모금 더 마시며 웃었다.

“그렇게 서 있으면 내가 좀 부담스럽군.”

“죄송합니다. 서있는 것이 습관이 되서…”

“그래? 그렇다면 편하게 하게.”

북천방주 이청형은 물끄러미 자신 앞의 흑의인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의기상인(意氣傷人)을 느끼고 피했다는 것은 이미 저자도 심검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말이었다. 비록 자신 만큼은 아니었지만 심검의 초입은 넘은 자가 서있는 것이 습관이 들었다는 말에 가볍게 안색이 찌푸려졌다. 흑의인을 바라보던 이청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넨 누군가?”

흑의인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저는 수라마교(修羅魔敎)의 십팔마왕(十八魔王)중 비천마왕(飛天魔王)입니다.”

“수라마교?”

이청형의 질문에 흑의인은 다시 몸을 세우며 대답했다.

“수라성의 전신입니다. 저희들은 아직도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 십팔마왕이라면 자네 같은 자가 또 있단 말인가?”

“예. 물론입니다.”

“그래?”

이청형은 자신의 수염을 만졌다. 흥미로운 얘기였다. 저자 한명이라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지만 저 정도의 인물이 열여덟 명이나 된다면 그건 얘기가 달라진다. 저런 자가 세 명만 되도 승부를 짐작할 수 없었다. 이청형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칠 년 전 심검의 경지에 완벽히 들어서고 나서부터 더 이상 세상에 욕심이 없어졌다. 무학의 끝을 본 것만 같았던 그 당시에 더 이상 무학에 뜻을 접고 이렇게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중원의 수라성이라는 곳에서는 저 정도의 인물을 수하로 두고 있는 자가 있다는 말에 자신의 나태함이 부끄러워졌다. 이청형은 태연히 차를 한 모금 더 마시며 물었다.

“그렇다면 자네의 주인은 어떤 사람인가?”

“현 수라성주께서는 이미 저희의 경지를 예전에 뛰어넘으셨습니다.”

“그래? 흠.”

이청형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비천마왕은 의구심이 들었다. 비록 자신보다 강하게 느껴졌지만 자신의 주인에 비하면 한 수 정도 약해보이는 그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자 강한 의구심이 들었다. 자신보다 강자가 있다면 피가 끓어오르는 것은 모든 무림인의 공통점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의 의구심은 이청형의 이어지는 말에 의해 끊어졌다.

“그래? 그래서 자네가 날 찾아온 이유는 뭔가?”

비천마왕은 눈을 빛내며 품에서 한 장의 혈지(血紙)를 꺼내 들었다. 피처럼 붉은 혈지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이청형은 묵묵히 그의 행동을 바라보다 천천히 혈지를 집어 들었다. 혈지에 찍혀 있는 수라모양의 인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이청형은 혈지를 뜯어 꺼내보았다.

비천마왕은 천천히 혈지를 읽어나가는 이청형을 바라보며 입술을 축였다. 만약 자신들의 뜻을 거절한다면 자신을 쉽게 보내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손을 잡는다면 자신의 성내에서의 입지가 높아 질 것이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보고 느낀 북천의 힘은 예상을 훨씬 웃돌았다. 강호의 어떤 방파라도 단신의 힘으로는 막지 못할 만한 힘이 느껴졌다. 비천마왕은 숨을 죽였다. 이청형이 서서히 혈지를 다시 접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청형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게 무슨 뜻인가?”

“보신 대로입니다.”

“왜 내 힘이 필요하지?”

이청형은 질문을 하며 투기(鬪氣)를 끌어올렸다. 허튼 소리를 하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이 다분히 포함 되 있었다. 비천마왕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지금 자신이 할 말은 성내의 비밀이었다. 자신의 뜻대로 밝혀서는 안 되는 것이었지만 이청형의 힘은 그만큼 필요했다.

“저희에게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간?”

“지금 소성주께서 폐관수련에 들어가셨습니다.”

“호~ 대단한 분인가 보군.”

“예.”

이청형은 가볍게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래서 지금 이 혈지에 약속한 내용을 들어 줄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무엇을 보고 자네들을 믿지?”

비천마왕은 잠시 안색을 찌푸렸다. 이청형의 의구심은 충분히 가능한 것이었지만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비천마왕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가 이곳에 남아 있을 것 입니다. 만약 이행되지 않는다면 먼저 저의 목을 치시죠.”

“후후후. 그런가? 그거 괜찮군.”

이청형은 자신의 수염을 한번 쓸어내리고는 말을 이었다.

“한 가지 청이 더 있네.”

“청이라 하시면…?”

“후에 일이 다 성사되고 나면 자네의 그 소성주라는 인물을 만나게 해주게.”

“소성주님을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이청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천마왕은 그가 왜 자신에게 소성주를 만나게 해달라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의아하게 여기는 비천마왕을 향해 이청형은 어깨를 들썩이며 대답했다.

“그냥 호기심이니 그렇게 걱정하지 말게.”

비천마왕은 이청형의 말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청형은 손에 들고 있던 혈지를 품에 넣으며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수라성의 부탁을 들어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이청형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비천마왕을 한번 쏘아보며 말했다.

“내 즐거움을 방해한 죄는 이번일로 용서해 주지. 오랜만에 피가 끓어오르는 일이니 말이야.”

“감사합니다.”

이청형은 차를 한잔 더 따라 앞으로 내밀며 웃었다.

“차나 한잔 하게나.”

“예.”

“그건 그렇고 나를 그렇게 높이 평가해준 것은 고맙다고 전해주게.”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대답하는 비천마왕을 바라보고는 이청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 저 멀리 중원이 있을 곳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중원이라… 아무도 넘지 못했던 곳이지. 후후후.”

독고극을 붙잡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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