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오문-33화 (33/194)

(33)

“독고극을 붙잡다.”

해가 지며 하늘에 붉은 노을을 드리우기 시작할 때 유가장의 문이 열리며 유세운과 백연혜, 그리고 창천백검수와 흑마천살대 사백 인이 조용히 유가장을 나섰다. 언덕을 오르며 유세운은 흘끔 옆을 돌아보았다. 백연혜는 유주란의 옷 중 흑의를 하나 받아 입고 나왔는데 의외로 훨씬 잘 어울렸다. 얼굴은 역시나 흑색 면사를 하나 구해 가리고 있었지만 백의 면사와는 확연히 느낌이 달랐다. 몸매도 더욱 돋보이는 것 같았다. 유세운은 약간 얼굴을 붉힌 후 발걸음을 빨리했다.

언덕에 도착하자 유세운은 흑마천살대원들을 세워 놓고는 그 앞에 섰다.

“흠. 확실히 말하지. 내가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도 내 말을 안 듣고 허튼 생각을 하는 놈이 있으면 말이지.”

유세운은 손을 들어 옆의 바위를 향해 섬광마멸지를 펼쳤다.

퍽!

가벼운 소리와 함께 바위에 구멍이 뚫리는 것을 본 흑마천살대원들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희도 알고 있겠지만 이것은 섬광마멸지라고 하는데 아마 보고서도 피할 수 없을걸? 그러니 한번 허튼 생각해봐. 무슨 일이 있어도 단전에 바람구멍 하나를 만들어 줄 테니까.”

유세운의 으름장은 효과가 있는 듯 흑마천살대원들은 얼굴을 처참하게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숙였다. 유세운은 그들의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흠. 좋아. 다들 알아 들었나보군.”

유세운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백연혜를 보고는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리고 창천백검수에게 절대로 예기를 띄우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그럼 들킬 염려가 있으니까요.”

“예. 그렇게 할게요.”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 돌리려다 다시 백연혜를 보며 물었다.

“여운은 어디 있죠?”

“여기 있습니다.”

백연혜의 바로 뒤에서 여운의 대답이 들려왔다. 유세운은 백연혜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여운에게 웃음 지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한번만 더 부탁드리죠.”

“어떤 부탁이신지?”

여운은 유세운의 부탁을 들어준 기억이 없다라고 생각하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유세운은 여운을 향해 웃음 지었다.

“이번에도 저번처럼… 백소저를 지켜주세요.”

“예. 그런 것은 말씀 안하셔도 저희의 목숨만큼 소중한 분이니 만큼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하하하. 여운. 당신 정말 맘에 들어요.”

아무 생각 없이 속에 든 말을 한 유세운을 바라보는 여운의 눈에는 흐뭇한 미소가 그려졌다. 유세운은 고개를 돌려 표충을 바라보았다. 어제 두들겨 맞은 것까지 더해서 그의 몸은 흑마천살대원 둘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서 있는 게 고작이었다. 유세운은 표충에게 바짝 다가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이봐~”

“뭐냐?”

유세운은 가만히 표충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입을 열었다.

“아직 몸이 불편하지? 그러니 이따가 몸에 힘을 빼고 가만히 서 있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한다.”

“크크크. 어쩌면 좋지? 네놈 덕에 나는 누구의 부축이 없으면 서 있을 수도 없는데…”

“걱정 하지마. 내가 부축해줄 테니까. 대신 허튼짓을 하면 단전에 구멍을 내줄테니 명심해.”

“흥! 좋다.”

“좋아. 그럼 자리를 잡도록 하자.”

유세운은 흑마천살대원들을 일일이 손으로 가리키며 줄을 세웠다. 흑마천살대원 사이사이 창천백검수들이 끼어 섰다. 유세운은 창천백검수들을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옆에 있는 흑마천살대원들이 허튼 짓을 하면 여러분의 능력껏 대처해주시기 바랍니다.”

“예.”

멀쩡한 상황에 일대일로 겨루어도 이기지 못할 창천백검수들을 혈도를 제압당한 상황에서 반항한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할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흑마천살대원들은 말없이 하늘을 올려보았다. 유세운은 가장 선두에서 바닥에 표충을 앉히고는 그의 뒤에 섰다. 표충은 유세운을 등지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는 완전히 서산으로 넘어갔고 하늘은 점점 어둠이 빛을 감싸고 있었다. 표충은 신음을 흘렸다.

“크윽. 내 어쩌다 이런 놈을 만나서…”

하늘에 하나 둘 별들이 떠오르고 반달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할 때 유세운이 입을 열었다.

“이봐! 흑마천살대! 비록 내력은 끌어 올리지 못하지만 마기(魔氣)는 끌어올릴 수 있겠지? 죽을힘을 다해 끌어올려라. 형편없는 놈은 내가 직접 손을 봐주지.”

유세운의 말이 떨어지자 흑마천살대원들은 두 눈 가득 살기를 내뿜으며 전신에서 마기를 끌어 올렸다. 비록 정상인 상황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지만 충분히 느껴질 만큼의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유세운은 다시 한번 말을 이었다.

“창천백검수는 예기를 감추세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예기를 피워 올리던 창천백검수의 예기가 사라지자 순수한 흑마천살대원들의 마기가 느껴졌다.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연혜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었다.

“유공자…왜 그러시는 거죠?”

유세운은 반달에서 나오는 월광에 비춰진 백연혜의 눈을 보고는 잠시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지금 약 일리정도 밖에 놈들이 오는 것 같아요. 숨기지 않고 이렇게 마기를 뿌리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죠. 그래서 의심을 최대한 안 사기 위해서 그런거에요.”

“아! 그렇군요.”

유세운은 가만히 손을 들어 백연혜의 입을 가리며 주의를 줬다.

“놈들이 거의 다 온 것 같으니 여운의 옆으로 가 있으세요.”

“예.”

백연혜가 물러가자 유세운은 진기를 일으켜 표충을 세웠다. 표충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유세운은 그런 그의 표정을 보며 가볍게 미소 지어 주었다.

“허공섭물을 보는 건 처음인가? 그렇게 놀라다니?”

“이…무… 무슨!”

“쉿! 놈들이 왔다. 아까 경고한 대로 허튼 수작 부리지 말아라.”

“크…”

표충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유세운이 강한 줄은 알았지만 이정도 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잘못하면 이번에 오는 흑마천살대원들도 이 자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잠시 후 엄청난 마기를 풍기며 어둠을 가르고 흑의 인물들이 열을 지은 채 흐트러짐 없이 언덕을 올라왔다. 소리 없이 나타나는 그들의 모습을 본 백연혜는 내심 마음을 졸였다. 흑의 인영 중 선두에 있던 자가 앞으로 나섰다. 작은 눈에 좁은 이마가 상당히 속 좁고 비열한 놈처럼 보였다. 튀어나온 광대뼈를 보며 유세운은 속으로 혀를 찼다.

‘빌어먹을 놈이 저런 얼굴을 해갖고 누나를 넘봐? 오늘 한번 죽어봐라.’

선두에 선 자가 표충을 보고 반갑게 말을 걸었다.

“표대주. 일은 잘 처리하셨소?”

표충은 입을 열어 이 상황을 조금이라도 설명해주려 했지만 그의 고개는 의지와 상관없이 숙여졌다. 유세운의 진기로 고개가 숙여지며 표충은 다시 한번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방금 전 유세운이 한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허튼 수작하면 단전에 섬광마멸지를 쏜다고 했었지. 크윽!’

이런 상황을 알 리 없는 작은 눈의 사내가 입가에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흐흐흐. 그럼 창검낭화도 잡아 들였소?”

표충은 이번에는 좌우로 고개가 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을 본 작은 눈의 사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잘 처리하셨다면서 어이하여 그 계집을 놓쳤단 말이오? 강호의 소문에 엄청난 미인이라고 하던데…크크크 이거 참 안타깝구…켁!”

작은 눈의 사내는 갑자기 자신의 목을 쥐고 들어 올리는 손에 비명을 내질렀다.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힘은 단번에 자신의 목줄을 뜯어낼 것만 같아 작은 눈의 사내는 기가 막혔다.

유세운은 좀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빈틈을 노리려고 했지만 작은 눈의 사내가 백연혜에 대해 음탕한 말을 하는 것을 듣고는 참지 못했다. 표충의 뒤에서 뛰쳐나와 단숨에 그 자의 목줄을 틀어쥐었다. 유세운이 눈을 빛내며 조용히 물었다.

“네놈이 철마성의 둘째라는 미친놈이냐?”

작은 눈의 사내는 유세운의 말에 그의 손을 움켜쥔 채로 바둥거리며 대답했다.

“크…내…내가 누군지 알고…크. 감히…난. 독고…극이다…크윽!”

“독고극? 그건 내 알바 아니고 네놈이 산검낭자에게 수작을 부리다가 바로 채인 놈이라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또 내가 알아야 될 게 있나?”

“크크…어떻게 흑마천살대 사이에 숨어 있었는지 모르겠다만 이제 네…네놈은 죽은 목숨이다. 크크크.”

“쩝. 걱정마라. 적어도 지금 이순간이라면 누가 나를 치기 전에 네놈의 목줄을 뜯어 줄 수는 있으니…”

“꾸르륵…”

유세운이 손에 조금 힘을 더 주자 독고극은 게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새로 언덕에 올라온 흑마천살대가 황급히 몸을 날렸다. 유세운은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좋아! 오늘 이곳에서 단 한 놈도 성하게 물러날 생각은 버려라!”

유세운은 게거품을 물고 축 늘어진 독고극을 여운을 향해 던졌다. 여운은 독고극의 혈을 점한 후 빠르게 백연혜의 주위로 창천백검수들을 모았다. 백연혜가 놀라며 물었다.

“아니! 여운! 지금 뭐하는 거예요? 유공자를 도와줘야죠!”

여운은 흑마천살대를 향해 쏘아져 나가는 유세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유공자께서 공녀를 지켜드리라고 했습니다.”

“하…하지만…”

백연혜는 어둠 속에서도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들킬까 염려하며 고개를 숙였다. 여운은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그녀를 바라보다가 유세운을 바라보았다.

예전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흑의를 입고 있는 유세운이 돌풍처럼 흑마천살대원들을 헤집고 다녔다. 그가 지나가는 궤적을 따라 흑마천살대원들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날아갔다. 예전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자신에게 밀려오는 자들을 처리하던 그의 권무는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면 이번의 공격은 돌풍 같은 기세로 그의 주위 모든 것을 날려버리고 있었다. 권무에서 느껴지는 패도(覇道)에 여운은 가슴이 떨려왔다.

반각이 지나기도 전에 새로 언덕에 올라온 흑마천살대원들은 사방에 드러누워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유세운은 가볍게 손을 털고는 독고극에게 다가왔다. 혈이 제압당했지만 얼마 전 눈을 뜬 독고극은 유세운의 말도 안나올 무위를 보고 황당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일어난 상황은 마치 꿈결같이 느껴졌다. 그런 독고극의 귀로 유세운의 목소리가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흠. 이제 확실히 네놈을 황천으로 보내주는 데 거치적거릴 것은 없어졌군.”

“크…네…네놈은 누구냐!?”

“그거? 그건 네가 알 건 없지. 네 실력으로는 알아내기 무리라고나 할까?”

“이 미친 난 독고극이다!”

“그래? 그건 내가 알 바 아니고…어디.”

유세운은 조용히 발을 들어 독고극의 허벅지를 지그시 밟았다.

뿌드드득---

“으아악! 아악! 악!”

유세운은 조용히 발을 들어 올리더니 말했다.

“네놈은 감히 넘봐선 안 될 곳을 넘본 것도 모자라 힘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를 거야. 앞으로 한동안은 성히 걷지 못하겠지. 그리고…”

“크…아! 죽여…죽여 버리겠어!”

독고극은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을 턱짓만으로 해결하던 자신에게 이런 통증이 밀려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독고극의 광기에 번들거리는 눈에 유세운의 주먹이 비춰졌다.

빠각!

“크악! 내…내 코! 으아악!”

“흥! 엄살은 이건 방금 전 네가 한 무례한 언사에 대한 대가다. 건방지게…”

“으윽! 두…두고 보자!”

“그래? 이거 무서워서 안 되겠군. 후환을 남겨 둘 필요는 없겠지. 여기서 죽여 버려야겠군.”

유세운의 두 눈 가득 살기를 뿜으며 말하자 독고극은 잠시 그의 눈을 마주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큭! 사…살려 주시요. 크윽.”

“쩝 진작 그렇게 나와야지.”

“풋.”

유세운은 갑작스레 들려오는 작은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려보았다. 자신의 뒤편에서 백연혜가 입을 손으로 가린 체 웃고 있었다.

“응? 아니 왜 웃어요?”

“호홋. 아니에요.”

백연혜의 웃음소리를 들은 유세운은 가슴속에서 들끓던 화가 풀리는 것을 느꼈다. 독고극에게 분풀이도 했고 백연혜의 웃음소리에 화도 풀려버린 유세운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저들을 부탁하죠. 창천백검수가 잡은 걸로 해주세요. 그리고 저들에 대한 처분은 마음대로 하시구요.”

“예. 그렇게 하죠.”

“그러면 난 먼저 집에 가볼께요. 혹시라도 내가 없어 진 것을 아시면 걱정하실지 모르니까…”

“호홋. 알았어요.”

“그럼. 이만…”

유세운은 가볍게 미소 짓고는 유사장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는 유세운을 바라보던 백연혜는 작게 웃었다.

“훗. 저러는 걸 보면 꼭 애 같은데…”

“역시 유공자시군요.”

“예?”

갑작스레 뒤에서 들려온 여운의 목소리에 백연혜가 되물었다.

“아닙니다. 그냥 유공자 다우 시다고요.”

“그런가요?”

여운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백연혜를 보며 미소 지었다.

‘공녀는 아실까? 방금 유공자가 하신 행동을? 독고극의 무례를 꾸짖던 이유를… 아마도 모르시나 보군. 후후. 언젠간 아시겠지.’

독고극을 붙잡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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