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연무장에는 흑마천살대 인원 오백 여명의 인물들이 혈도를 제압당한 채 이곳저곳에 쓰러져 있었다. 유세운은 그들을 쭉 훑어보았다. 그들은 눈빛으로 만약 살인을 할 수 있다면 유세운을 죽이려는 듯 쏘아보았다. 유세운은 그들의 눈빛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유세운은 시선을 돌려 표충을 찾았다. 역시나 그들 무리 가운데서 다리에 부목을 댄 채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유세운은 그쪽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표충의 안색이 대번에 찡그러졌다. 유세운은 다짜고짜 표충의 뒷덜미를 집어 들고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두 명의 흑마천살대원들이 일어나며 소리 질렀다.
“뭐하는 짓이냐!”
유세운은 대답대신 깔끔하게 주먹을 날렸다.
빠악!
“크억!”
유세운의 주먹을 맞은 한 명이 삼 장 정도 날아가 바닥을 굴러가는 모습을 본 다른 흑마천살대원의 얼굴이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유세운은 그를 슬그머니 쏘아 보았다. 흑마천살대원은 눈빛이 많이 흔들리더니 결국 자리에 앉았다. 표충의 눈이 치켜떠졌다. 유세운은 피식 웃더니 표충을 들어 올린 채 연무장의 구석으로 향했다.
“크윽! 뭐하는 짓이냐.”
“흠. 내가 길게 얘기하지 않을 테니 꼭 대답해줬으면 하는데…”
“흥! 걱정마라. 절대로 말을 안 해줄테니…”
“응? 아니 들어보고 얘기하는 게 어때?”
유세운이 걱정스럽게 묻자 표충은 웃기지 말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흥. 필요 없다. 흐흐흐.”
“그래? 이걸 어쩌지?”
“흐흐흐. 뭘 말이냐?”
유세운은 흘끔 뒤를 돌아보았다. 오백의 흑마천살대원들이 쳐다보고 있는 것을 확인한 유세운이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말을 안 하겠다니 두들겨 패긴 패야겠는데 부하들 앞에서 맞으면 좀 부끄럽지 않을까 해서 말이야…”
표충의 안색이 보기 좋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유세운의 입가에 장난끼 어린 미소가 그려졌다. 표충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씹어 뱉듯이 말을 했다.
“크크크. 그 정도로 겁을 먹을 줄 알았느냐?”
유세운은 표충의 결연한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선비야 죽음을 줄지언정 치욕은 주지 말라고 했지만 무림인이니 상관없겠지?”
“흐흐흐. 어떤 고문도 버텨온 나다. 과연 네가 하루 안에 내 입을 열게 할 수 있을까?”
“그러게…별로 자신이 없군.”
“흐흐흐 그러니 포기하…컥!”
비웃고 있던 표충의 턱에 유세운의 주먹이 그림처럼 쑤셔 박혔고, 표충은 말을 하다가 얻어맞고는 뒤로 밀려나려 했다. 유세운은 피식 웃더니 발로 표충의 배를 찼다. 표충은 자연스럽게 고개가 숙여지며 뒤로 밀려나지 않게 됐다. 유세운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참 내…사부한테 맞던 대로 때리면 움직이지도 못한다구…”
말을 마침과 함께 무릎으로 표충의 턱을 올려쳤다. 뒤로 꺾어지는 표충의 가슴에 팔꿈치가 들어갔다. 표충은 처음의 비명 이후로 단 하번의 비명도 질러볼 새도 없이 이어지는 연타(連打)에 약 일각을 맞고 나서야 바닥에 몸이 구르는 것이 허용됐다. 표충은 바닥의 차가움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표충은 자신의 몸의 부상도 잊은 듯 부하들에게 얼굴을 안보이기 위해 고개를 돌리며 숨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유세운의 깔끔한 발차기가 턱에 꽂히며 자신의 몸이 다시 허공에 뜨는 것을 느끼고 의식의 끈을 놓으려 했다. 하지만 유세운의 화려한 기술들을 몸으로 겪으며 자신의 몸이 땅에 떨어지지도 않고 의식의 끈도 놓을 수 없음을 느꼈다.
허공에 뜬 채로 땅에 떨어지지도 않고 두들겨 맞고 있는 표충의 처참한 모습에 흑마천살대원들은 하나 둘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반 시진이 지나서야 표충은 다시 땅에 떨어졌다. 눈에서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유세운은 그의 옆에 쪼그려 앉으며 조용히 말을 건넸다.
“어때? 이제 부하들도 고개를 돌려버리는데?”
“흥! 내가 큭! 이 정도로…커흑! 말…욱!”
표충은 폐를 가득 채우고 넘쳐 올라오는 핏물을 삼키려고 했다. 유세운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더니 표충의 등을 팔꿈치로 찍었다.
“커헉!”
표충은 입안에 머금고 있던 피를 토해냈다. 유세운은 그를 가엽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봐 몸에 안 좋아…빨리 말하는 게 우리 서로에게 좋지 않을까?”
“흥!”
표충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을 했다. 유세운은 혀를 찼다.
“쯧쯧. 적어도 환자에게 공력은 안 쓰려고 했는데…공력을 주고 패면 뼈가 금방 가루가 될 거 같아 참으려고 했는데…”
유세운은 가만히 표충의 팔을 한번 어루만지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휴~나이도 많아서 과연 가루가 된 뼈가 다시 붙을까?”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유세운의 혼잣말에 표충은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유세운은 태연히 몸을 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하자 장포가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표충은 과연 이렇게까지 이번 일을 막아야 되나 라는 회의가 물밀 듯이 들어왔다. 폭발할 듯이 기세를 일으키던 유세운은 곧 기세를 거두었다. 표충의 입에 미소가 그려졌다.
‘크크크. 그래. 아무리 네놈이 그래도 나를 죽일 수는 없는 거야. 크크크.’
하지만 표충의 기대는 처참히 무너졌다.
“너 왜 웃냐? 아까 머리는 그렇게 심하게 안 때렸는데? 아! 그거 알겠군.”
“크…뭐 말이냐?”
말을 하려고 입을 벌릴 때 마다 턱이 송곳으로 쑤시는 것만 같아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내가 사부에게 혈에 관해서는 제대로 배운 기억이 없어서 그러는데…”
“…”
표충은 심각한 표정으로 물어오는 유세운을 보며 긴장했다.
“얼핏 들은 소문에 단전을 파괴하면 공력(功力)을 상실한다던데…사실인가?”
“큭!”
유세운으로부터 고개를 돌린 표충의 안색은 완전히 사색이 되었다.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유세운이 말을 이었다.
“무림의 고수가 죽을 때 가장 괴로운 것은 단전에서 빠져나가는 진기를 느끼는 거라고 하던데 그걸 살아서 두 눈 뻔히 뜨고 겪으면 기분이 어떨까?”
표충은 아무렇지 않게 뱉는 유세운의 말에 치를 떨었다. 유세운은 그의 멱살을 쥐고 들어 올려 바라보았다. 표충은 가만히 유세운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알겠네…”
유세운은 장난끼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흠. 진작에 그랬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을…괜히 복잡하게 만들고 그래.”
“크…웃기지마라. 이 일이 새나가면 난…”
“응? 이 일이 어떻게 새나간다는 말이야?”
유세운은 고개를 돌려보다가 이쪽을 보고 있는 흑마천살대원들을 보고 피식 웃었다.
“무슨 소리야? 저 녀석들도 모두 동참할 텐데…”
“무슨?”
“설마 저들이라고 단전이 파괴 되고 싶겠어?”
“큭!”
갑작스레 신음을 토하는 흑마천살대원들을 보며 유세운이 미소 지었다.
“거봐. 아무도 이일이 새나가게 하지 않을 거야.”
“흥!”
비록 코웃음을 치고 있었지만 다소 안심한 듯한 표충을 보고 유세운은 그를 바짝 당기고는 귓가에 대고 물었다.
“이제 말해주실까? 오늘 오기로 한 그 미친 녀석을 어디서 만나기로 했지?”
“뭐…뭐야?”
“왜? 빨리 말해! 약속은 지켜야지.”
“크윽!”
표충의 얼굴이 다시 침중하게 굳어지자 유세운은 표충의 멱살을 잡아당기며 손을 슬며시 단전에 가져다 댔다. 표충의 안색이 급변했다.
“자…잠깐 말을 안 하겠다고 하지 않았네…”
“아! 그랬나? 난 참을성이 없어서 말이야.”
표충은 유세운의 말에 치를 떨고는 작게 말을 했다.
“크윽! 어쩔 수 없군. 저쪽에 있는 언덕에서 만나기로 했다. 한눈에 내려다보이기에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네…”
유세운은 표충의 손짓을 따라 그가 가리킨 언덕을 바라보았다.
“흠. 저곳이란 말이지?”
표충이 가리킨 곳은 유가장에서 약 오 리 정도 떨어져 있는 언덕이었다. 그리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유가장이 한 눈에 내려다보일 것 같았다. 유세운은 언덕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흑마천살대의 오백 여명을 바라보았다. 유세운의 눈에서 항거할 수 없는 눈빛이 흘러나왔다.
“내가 하고자 하는 계획이 있는데 너희가 꼭 필요하다.”
“…”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흑하천살대의 인원들을 향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하고자 하는 계획에 참가 안할 사람은 지금 말해라. 시간이 없으니까…”
쿠웅!
유세운의 오른발이 살짝 들어올려졌다가 바닥을 강하게 밟았다. 유세운의 진각에 연무장이 흔들린다는 헛된 생각과 함께 그의 발밑의 청석에 와선형의 금이 갔다. 유세운의 눈빛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말을 안 들으면 어디 한군데를 이렇게 밟아주겠다는 듯한 협박의 빛이었다.
“…”
흑마천살대원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결국 모두 고개를 숙였다. 유세운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하핫! 똑똑들 하군. 잠깐만 기다리라구…”
유세운은 그렇게 말하고는 표충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발걸음을 돌려 후원으로 향했다. 가벼운 걸음걸이로 연무장을 벗어나는 유세운의 뒷모습을 보며 표충을 비롯한 흑마천살대원들은 한 마음이 되어 저주를 퍼부었다.
유세운은 후원으로 가는 길에 백연혜를 만날 수 있었다. 백연혜는 정원에 나와 바깥바람을 쐬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는 여운이 그림자처럼 서있었다. 유세운은 싱그럽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백소저. 오늘밤 창천백검수와 함께 도와주실 수 있겠어요?”
“아! 어디서 만나기로 했는지 알아내셨어요?”
“하하. 그냥 몇 대 쥐어박았더니 불던데요?”
“에? 설마 대력참도 표충이 그 정도에?”
“하하. 그러게 말에요? 겁은 많아가지고서는…”
“후훗. 설마요?”
백연혜의 웃는 모습을 본 유세운은 가볍게 고개를 틀며 헛기침을 했다.
“흠흠. 그 얘긴 넘어가고 오늘밤 창천백검수와 함께 흑의(黑衣)를 입고서 역습을 합시다. 도와주겠어요?”
백연혜는 유세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말이 바뀐 것 같군요. 유공자께서 저희를 도와 주셔야죠…”
“아! 그런가요? 하핫. 그럼 흑의를 입고 준비히 주세요.”
“예…”
“아! 그리고 가족에겐 비밀이에요. 그래야 내가 움직이기 편할테니 말이죠.”
“예. 그렇게 할께요.”
“그럼 이따 봐요.”
유세운은 말을 마치고는 곧장 자신의 처소를 향해 돌아섰다. 백연혜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그런 멋진 권무(拳舞)를 보여줄까?”
“그럴 것 같습니다. 벌써 가슴이 두근거리는군요.”
백연혜는 숨김없이 말하는 여운을 돌아보았다. 백연혜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후후. 유공자가 맘에 드셨나 봐요?”
여운은 그런 백연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권무를 보고 어떻게 반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백연혜는 뭐가 그리 좋은지 얼굴에 가벼운 홍조까지 띄우며 눈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처소로 가던 유세운은 오늘따라 유난히 맑은 하늘을 올려보았다.
“거참…왜 이리 웃음이 많아지는 거지? …쩝.”
독고극을 붙잡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