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대청으로 들어간 유세운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제야 집에 돌아온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유세운은 예전에 자기가 항상 앉던 의자가 아직도 있음을 보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와 형, 누나가 모두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유세운은 빙긋 웃으며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유태청은 잔잔한 미소를 지은 채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래. 대체 어떻게 지낸 거냐?”
“하하. 그냥 길을 잃어버려서요. 산속을 헤매다가 어떤 권법가를 만나서 이것저것 조금 배웠죠.”
“야! 당연히 그럼 집으로 연락을 했어야지!”
유주란의 다그침에 유세운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말이지. 워낙 산 속이라…나오질 못했어.”
“얼마나 걱정했었는지 알아?”
“나두 얼마나 걱정했다구…”
유주란은 입술을 삐죽이며 팔짱을 끼고 자리에 앉았다. 유청운은 가만히 손을 내밀어 유세운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네가 얼마나 무공을 배웠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무사히 돌아와 준 것이 고맙다.”
“형…”
유청운은 말문이 막힌 유세운을 보며 따뜻한 미소를 지어줬다. 유세운은 천천히 자신의 가족들을 돌아보았다. 자신의 형인 유청운은 이제 완연한 사내가 되어 있었다. 탄탄한 근육에 잘 벼려진 듯한 기세가 사뭇 고수의 경지에 들어선 것이 느껴졌다. 아직 아버지 수준만큼은 아니지만 흑마천살대원보다는 강하게 느껴졌다. 의외로 유주란의 기세 또한 흑마천살대원 못지않았다. 얼굴도 상당히 예뻐졌다. 맑은 눈에는 기쁨의 빛이 넘쳐났다. 유세운은 마음이 따뜻해져 옴을 느꼈다. 하지만 유주란의 눈빛이 이상하게 변하는 것을 보며 잠시 마음을 졸였다. 유주란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네가 어떻게 창검낭화를 알게 됐어?”
“응? 그거? 남창에서 우연히 만났어. 등왕각에 올라갔다가 만나게 됐지.”
“그래? 별 일 아니구나.”
“왜?”
“아니 난 네가 어떻게 창천궁의 소공녀를 알고 있나했지.”
“흠…”
유태청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보고는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벌써 밤이 되었구나. 이제 그만 들어가서 쉬거라. 이제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느냐?”
“예. 아버지.”
유세운은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유태청을 향해 큰절을 하였다. 유태청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세운은 일어나서는 대청을 물러났다. 밖으로 나온 유세운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어두워져오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사부랑 지내왔던 시간들이 후회되지는 않지만 집에 왔다는 기분이 몸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내일은 드디어 늦잠을 한번 자볼까?’
예전을 회상하며 자신의 방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유세운은 건물의 그림자로 몸을 숨겼다. 흔적도 없이 그림자로 스며든 유세운의 한쪽 눈썹이 치켜떠졌다. 지금 그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창천백검수 두 명이 대력참도 표충을 데리고 그들의 숙소인 후원으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유세운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소리 없이 그들의 뒤를 밟았다. 그들은 곧 후원 안으로 들어갔고 유세운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몸을 날렸다. 비호처럼 날아오른 유세운은 지붕위에 고양이처럼 살며시 내려앉았다. 창천백검수 둘은 표충을 데리고 백연혜의 방으로 향했다.
“소공녀님. 데리고 왔습니다.”
“예. 들어오세요.”
백연혜의 대답이 들리자 창천백검수중 한 명이 문을 열었고 다른 한 명은 표충을 끓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백연혜는 자신의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으로 앉혀주세요.”
“예.”
표충은 창천백검수의 손에 의해 의자에 앉혀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입에서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간신히 억눌렀다. 표충의 일그러진 안색을 바라보던 백연혜는 창천백검수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물러가 있으세요.”
“예.”
창천백검수들은 방 밖으로 물러가 문 앞에 시립했다. 백연혜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표충을 바라보았다. 표충은 인상을 찌푸린 채로 백연혜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백연혜는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는 표충에게 질문을 던졌다.
“흠. 아까 우리를 막았을 때 한말이 사실인가요?”
표충은 가만히 백연혜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들썩였다.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백연혜의 눈빛이 단호해졌다.
“철마성에서 우리 창천궁을 노리고 있다는 말 말이에요.”
“아! 그거? 흐흐흐. 그건 알아서 뭐하게?”
“그 말이 사실이라면 무림에 큰 혈풍이 불 것을 알고 한 말인가요?”
“크크크. 다 필요 없는 얘기다. 아까 그놈만 아니었어도 그 계획의 터를 잡았겠지. 네년을 생포했을 테니 말이다. 크크크.”
백연혜는 고운 아미를 찌푸리며 표충을 쏘아 보았다. 표충은 인상을 찌푸린 채 그녀의 시선을 덤덤히 받아 들였다. 잠시간의 대치 끝에 백연혜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휴~ 정말 말 안 할 생각인가요?”
“크크크. 죽인 테면 죽여보아라. 크크크.”
가슴을 피며 대답하는 표충의 눈빛은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한 눈빛이었다. 이미 포로가 된 마당에 거칠 것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백연혜는 그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데려 가세요.”
“예.”
창천백검수들이 들어와 표충을 데리고 나갔다. 표충은 나가는 와중에도 괴소를 흘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크크크. 어차피 막을 수 없는 일이다. 크크크.”
유세운은 창천백검수에게 끌려 나가는 표충의 뒷모습을 보며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저 자식은 웃음소리가 맘에 안 들어.’
백연혜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표충이 비록 말은 안했지만 그가 한말이 진실이라는 것은 세살짜리 아이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백연혜는 이 일은 자신의 선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다. 곱게 한숨을 내쉰 백연혜는 천천히 면사를 벗었다.
유세운은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기심에 따라오긴 했지만 야밤에 남의 일을 엿듣는 것은 취향에 없었다. 가볍게 몸을 띄워 지붕 위를 지나 날아가던 유세운은 백연혜의 한숨소리를 듣고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순간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으며 허공에서 떨어질 뻔했다. 창문너머로 보이는 백연혜의 아름다운 모습에 깜짝 놀라 호흡이 이어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서늘한 아미에 아름다운 봉목(鳳目), 그리고 면사에 가려져 있던 오똑한 콧날과 윗입술은 약간 얇으면서도 아랫입술은 도톰한 앵두 같은 붉은 입술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새하얀 피부…유세운은 땅에 떨어질 듯 하더니 왼발로 오른 발등을 차고는 신형을 뽑아 올렸다.
백연혜는 가벼운 인기척이 밖에서 나자 자리에서 일어나 반쯤 열린 창문을 활짝 열어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어둠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백연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창문을 닫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유세운은 건물의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은신해 있다가 백연혜가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기척 없이 움직여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방에 들어온 유세운은 방문을 닫고 등을 문에 기댔다. 아직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멍하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휴~장난 아니다. 누나도 그렇게 예뻐진 게 거짓말 같은데 누난 비교도 안 되는군.”
유세운은 깊이 한숨을 내쉬더니 침대에 앉아 겉옷을 벗었다.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려고 했지만 눈앞에 계속 백연혜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결국 유세운은 신경질을 부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에이! 오늘 자기는 글렀군.”
잠자는 것을 포기한 유세운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에 잠기기 시작했다.
아침 해가 떠오르고 나서 유주란은 오랜만에 돌아온 잠꾸러기 동생을 깨우러 까치발을 하고는 유세운의 방으로 향했다. 경신법을 이용해 최대한 조용히 미끄러져 나가던 유주란은 방문 앞에 도착해서는 입가에 작은 미소를 그렸다. 십삼 년 동안 못 보았지만 다시 이렇게 볼 수 있게 된 것에 행복을 느끼며 조용히 문을 열었다.
“왁!”
따악!
문을 열자마자 튀어나오며 놀래키는 유세운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날려 머리를 쥐어박았다. 유세운은 머리를 움켜쥐며 투정을 부렸다.
“아야! 왜 때려!”
“놀랬잖아!”
“체~”
유주란은 유세운의 삐진 듯한 표정을 보고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유세운은 그런 그녀의 행동을 보고는 가볍게 웃었다.
“이거 왜이래? 내가 아직도 애로 보여?”
“후훗. 당연하지. 그럼 네가 어른이냐?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가자.”
“어딜 가? 이런 아침부터?”
유주란은 유세운을 보고는 가볍게 그의 귀를 잡아끌며 말했다.
“따라와. 아버지가 오늘 아침은 다 같이 모여 먹자고 하신다.”
“아~아파! 알았어. 가구 있잖아. 귀는 좀 놔줘.”
유주란과의 가벼운 실랑이를 벌이고 대청으로 간 유세운은 아버지와 유청운이 앉아 있는 곳으로 웃으며 다가갔다.
“하하하. 이렇게 다 모여 먹는 게 얼마만이죠?”
“그게 다 네가 멍청하게 길을 잃어버려서 그래!”
“밥 먹기 전부터 시비 거는 거야? 그래도 무사히 돌아왔잖아.”
“어쭈? 지금 너 이 누님한테 덤비는 거냐?”
“으…응? 그건 아니구~”
“그만 장난치고 자리에 와 앉거라.”
“예.”
유주란의 덤비면 국물도 없다는 듯한 눈빛을 받으며 유세운은 식은땀을 흘렸다. 유청운은 그런 둘의 모습을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유세운은 유주란과 장난을 치며 식사를 마쳤다. 유세운은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며 말했다.
“아버지. 저 먼저 일어날게요.”
“왜? 차라도 마시고 일어나지.”
유주란의 말에 유세운은 가볍게 웃었다.
“이래봬도 바쁜 몸이라고 누나랑 같이 취급하지 말아줘.”
“요게 정말!”
“하하하.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유세운은 꾸벅 인사를 하고는 대청을 나왔다. 대청은 나온 유세운은 가만히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을 해보더니 곧장 걸음을 옮겼다. 백연혜가 묵고 있는 후원으로 걸음을 옮기던 유세운은 금세 도착했다. 백연혜의 방문 앞까지 도착한 유세운은 잠시 고민하더니 가볍게 문을 두들겼다. 안에서 맑고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아. 저 유세운입니다. 들어가 되나요?”
“아!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선 유세운은 차를 마시고 있다가 일어난 듯한 백연혜의 모습을 보았다. 아쉽게도 면사를 쓰고 있었다. 유세운은 언제고 저놈의 면사를 찢어버려야 겠다는 생각을 하며 서 있었다. 백연혜는 의아한 눈빛으로 유세운을 바라보다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일단 앉으세요.”
“아! 고마워요.”
유세운은 백연혜가 권한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는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흠. 흠. 백소저…”
“예.”
차분히 대답하는 백연혜의 눈빛에는 무슨일일까라는 궁금증이 떠올라 있었다. 유세운은 그런 그녀의 눈빛을 보다가 순간적으로 질문을 던져버렸다.
“백소저 나이가 어떻게 되죠?”
“예?”
아침부터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무엇일까 못내 궁금해하던 백연혜는 유세운의 질문에 당황했다. 하지만 금세 웃으며 되물었다.
“아침부터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그걸 묻기 위해선가요?”
백연혜의 질문에 유세운은 식은땀을 흘리며 변명했다.
“아…아니…그게 아니고…아! 이게 아닌데.”
“후훗. 전 올해로 스물둘이 되요.”
“에? 그렇소? 하하핫. 난 올해로 스물다섯이 되었는데. 하하…”
혼자 어색함을 달래려 웃던 유세운은 이게 아니다라는 생각에 천천히 목소리를 낮췄다. 백연혜는 그런 유세운의 모습이 귀여워 보여 저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후훗. 그럼 제게 오라버니가 되시는군요.”
“…”
“…”
유세운이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말이 없자 자신의 실언을 느낀 백연혜도 얼굴을 숙이고는 말문을 잃었다. 유세운은 잠시 멋쩍게 웃더니 말을 돌렸다.
“아! 이건 어때요?”
“에?”
“흠 오늘 안에 철마성의 놈들이 오기로 했잖아요?”
“예…”
“그러니까 그들이 모이기로 한 장소에서 역습을 하는 거요.”
“아! 철마성의 무리로 변장해 있다가요?”
“그래 그거요! 하하핫! 역시 백소저는 정말 명석하군요. 하하하핫”
“과찬의 말씀을…다 유공자의 생각인 걸요.”
백연혜가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이 없자 유세운은 머뭇거리다가 말머리를 돌렸다.
"흠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철마성의 그 미친놈만큼은 잡아서 치도곤을 치고 싶어서 그래요."
"아… 예. 그런데 왜 가족에게는 비밀로?"
"아! 그거 말이오?"
유세운은 백연혜를 향해 아무 거리낌 없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거야 혹시라도 아시게 되면 여러 가지로 부려먹으실지 몰라서 그런 거예요. 특히 우리 누나가 말이죠. 하하하"
"훗 설마요?"
"아니요. 우리 누나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
"훗 알았어요."
"그러니 창천백검수에게도 비밀로 해달라고 해주면 고맙겠소."
"예 그러지요."
"그리고 이따 밤에 그놈을 잡아도 창천백검수와 백소저가 잡은 걸로 해주시오."
"예. 알았어요."
"하핫 그럼 내가 표충에게 가서 오늘 어디서 만나기로 했는지 알아오겠소."
"예. 그럼 이따 뵙죠."
"그럼."
유세운은 가볍게 목례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가는 유세운의 모습을 보며 백연혜는 어제 보여준 아름다운 무위를 떠올리며 가볍게 얼굴을 붉혔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밖으로 나와 표충등을 잡아 놓은 연무장으로 걸음을 옮기는 유세운의 발걸음은 유난히 가벼웠다.
"하하. 이것 참. 보면 볼수록 맘에 드니 큰일이군."
흑마천살대(黑魔千殺隊)와의 결전.(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