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다그닥. 다그닥.
관도위를 달리는 말발굽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긴 먼지구름을 꼬리처럼 달고 달리는 한 무리의 말은 순백의 백마들이었다. 특히 가장 선두에서 달리는 백마는 하얀 가루가 떨어질 듯 새하얗다. 북쪽의 설산에서만 산다는 설리총이란 명마(名馬)였다. 천리를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다는 말이 전설처럼 전해오는 명마였다. 그리고 설리총의 위에는 그에 어울리는 백의의 면사녀가 타고 있었다. 창천궁의 금지옥엽(金枝玉葉)인 백연혜였다. 이번에 철마성에서 길안의 유가장을 노린다는 것을 알고 창천궁에서 파견 나오는 길이었다. 백연혜는 자신의 애마를 몰면서 슬며시 눈을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갈색의 튼튼한 말에 올라탄 사내가 보였다. 사내의 처음 모습은 무척이나 거침없어 보였다. 비록 이번이 첫 임무로 강호에 나온 거라고는 하지만 저런 인물은 주변에서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방약무인(傍若無人)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그를 처음 상대한 창천백검수들은 정체모를 위화감에 검을 뽑을 뻔했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창천백검수들이라면 이미 검기를 쓸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인물들만이 있는 곳이었다. 그런 그들이 정체를 모를 위화감에 검을 뽑았다는 것은 사내에게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가지게 했다. 항상 장난끼 어린 미소를 짓고 다니는 그의 모습은 절대로 그런 생각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 하지만 말이다. 지금도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싱글 웃고 있는 모습이 조금은 귀엽게 보였다. 결국 달리는 도중에 왜 그렇게 웃는지가 궁금해서 먼저 말을 걸었다.
“유공자. 뭐가 그리 즐거운가요?”
“예? 아! 오랜만에 돌아오는 곳이라 서요. 하하. 이곳을 떠난 지 벌써 십삼 년이 흘렀다는 게 믿기지 않는군요.”
“아! 그것 때문이었나요?”
“예? 뭐가요?”
“아까부터 계속 미소 짓고 있던 걸요.”
“예? 하하하. 제가 그랬나요?”
“예.”
“그냥. 형이랑 누나랑 아버지를 볼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져서요.”
“예. 그랬던 거군요.”
백연혜는 유세운의 대답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항상 아버지와 오라버니 밑에서 소중하게 커왔다. 뭐든지 원하는 것은 들어주었었고 뛰어난 명사님들에게 교육을 받았다. 항상 바깥세상을 동경하여 강호에 나오고 싶어 했지만 잘 내보주시지 않았었다. 그래서 불만이 많았었지만 십년동안 행방불명 된 채 집에서 떠나 있었을 유세운을 생각하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에서 달려오던 창천백검수의 대장인 여운이 말을 몰아 옆으로 다가오며 말을 건넸다.
“이제 한 십리만 더 가면 길안이 나옵니다.”
“아. 그래요? 그럼 속도를 조금 줄이기로 하죠. 말들이 많이 지친 것 같아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운은 손을 들어 뒤에서 달려오던 창천백검수들의 속도를 줄였다. 옆에서 같이 달리던 유세운도 말의 속도를 천천히 줄였다. 관도를 따라 말을 천천히 달리게 하자 유세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분명히 우리가 먼저 가는 게 맞소?”
“예. 아무리 그들이 빨리 온다 해도 저희보다 일주일은 늦을걸요. 그리고 그때쯤이면 시간은 충분해요.”
“그렇다면 이건?”
“예?”
유세운은 말을 세우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 기운은 마기(魔氣)인 것 같은데…?”
“마기라니요? 그런 것이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유세운은 눈을 빛내며 손을 들어 백연혜의 말을 막았다.
“아니! 이건 분명히 마기요.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닌 것 같은데?”
“크크크. 어린 놈이 제법이구나…”
흉측한 괴소와 함께 관도의 옆 숲에서 수백 개의 인영이 나타났다. 전신을 흑색으로 도배를 한 듯한 인물들이 나타나 관도를 막아섰다. 그들의 숫자도 숫자였지만 그들 개개인이 뿜어내는 마기는 마치 유형화되어 보이는 것만 같았다. 흑의인들은 좌우로 갈라서며 길을 만들었고 그 사이로 흰 수염이 길게 자란 한 명의 노인이 걸어 나왔다.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는 주변의 흑의인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했다. 노인의 등에는 한 자루의 대도(大刀)가 비껴 매여 있었다. 대도는 마치 참마도(斬馬刀)의 그것마냥 엄청난 크기를 자랑했다. 어떻게 사람이 저걸 휘두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길만한 크기였다. 노인은 유세운을 한번 바라보고는 백연혜를 바라보았다.
백연혜는 노인의 눈빛을 받으며 몸서리쳤다. 저런 불쾌한 눈빛은 맹세코 평생 처음 겪어 보는 눈빛이었다. 마치 전신을 뱀이 훑고 지나가는 듯한 불쾌한 기분에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노인은 다시 한번 흉측한 괴소를 터트렸다.
“크크크. 이곳에서 뼈를 묻어 줘야겠다. 물론 백가 계집 너는 걱정하지 말거라. 너 정도 되는 아이를 맛도 안보고 죽일 만큼 나는 대담한 놈이 못되어서 말이지. 크크크”
백연혜는 노인의 불쾌한 말에 몸서리치면서 그의 등에 매어진 거대한 도를 바라보았다. 강렬한 마기를 뿜어내면서 저렇게 거대한 도를 휘두르는 인물의 이름이 생각났다. 백연혜는 설마하는 심정으로 제발 아니기를 빌며 물었다.
“혹시 흑마천살대의 대주 대력참도(大力斬刀) 표충. 표노선배님 이십니까?”
“크크크. 어린 계집이 견문이 보통이 아니구나.”
백연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흑마천살대의 대주인 표충이 이정도의 일에 직접 나서다니 믿을 수 없었다. 흑마천살대라면 백 명 정도면 충분히 어지간한 군소방파는 쓸어버릴 정도의 고수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비록 유가장의 장주나 그의 아들이 고수의 반열에 들었다고는 하지만 흑마천살대원 삼인의 합공도 못 막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 자리에 흑마천살대주가 왔다는 것은 자신들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밖에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더욱 믿을 수 없는 것은 흑마천살대는 분명히 자신들보다 이틀 전에 출발했고 거리상으로 봤을 때 당연히 일주일쯤 뒤에나 도착 할 수 있었다.
“하지만…당신들이 어떻게 우리보다 빨리 올수 있었죠?”
“크크크. 이렇게 기습하기 위해 밤을 세워가며 달려왔다. 우리가 선발대지. 지금 둘째 소성주가 나머지 오백의 흑마천살대원들을 데리고 오고 계시지. 그쪽도 밤을 세워가며 달려오고 있으니 내일쯤 도착하실 거다. 크크크.”
“그…그런.”
백연혜는 철마성의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에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이건 결코 유가장의 딸이 탐나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무림재패의 야욕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백연혜의 안색은 파리하게 질렸다. 지금 저들이 생각하는 일은 강호에 한바탕 피바람을 불러올 일이었다.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백연혜의 옆으로 창천백검수의 대장 여운이 앞으로 나서며 작게 말을 건넸다.
“일단 피하시지요. 저희가 막겠습니다.”
백연혜는 여운의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저희마저 돌아가면 유가장은…”
“저희에게는 공녀님의 안전이 우선입니다. 그러니…”
둘의 대화를 듣던 표충은 팔짱을 낀 채로 웃음을 터트렸다.
“크크크. 뭘 모르나 본데? 그건 너희들이 결정할 일이 아니야. 너흰 이미 포위됐거든?”
표충의 말이 떨어지자 일행의 뒤편으로 백여 명의 인물들이 나타났다. 그들이 나타나 마기를 물씬 풍기자 백연혜의 안색은 더욱 창백해 졌다. 앞뒤로 둘러싸인 상황에서는 정말 자신의 목숨도 지킬 자신이 없었다. 표충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그려졌다.
“걱정마라. 너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크크크.”
백연혜는 흠칫 놀라며 말의 고삐를 움켜쥐었다.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유세운은 천천히 말을 몰았다.
다각. 다각.
조용한 가운데 울려 퍼지는 말발굽 소리는 그곳에 모인 모든 이들의 시선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유세운이 표충의 시선에서 백연혜를 가리면서 나오자 그의 안색이 싸늘하게 변했다.
“네놈은 뭐하는 녀석인데 지금 노부의 시선을 방해하는 것이냐?”
“네놈? 하! 웃기는 노인네구만. 날 언제 봤다고 이놈 저놈 하는 거야?”
“뭐…뭐라고?”
표충의 안색이 확 돌변하며 물씬 살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유세운은 말의 갈기를 쓰다듬어 주며 한가롭게 얘기했다.
“하나만 묻지. 그럼 너희는 이곳에 오자마자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냐?”
“크크크. 유가장 따위 이정도 인원이면 반시진 안에 쥐새끼 한 마리도 안남기고 죽일 수 있다. 뭐 급하다고 그들을 먼저 공격 하냐?”
표충의 비웃음 섞인 말에 유세운은 다행이라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군. 너희를 모조리 죽이지 않아도 되겠어.”
“뭐? 크크크. 하하하하. 이거 정말 황당한 놈이군. 뭐 어차피 죽을 놈이니 그 딴 소리 지껄여도 유언이라고 생각해주지. 크크크.”
백연혜는 표충의 말에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당신들이 우리를 공격하면 창천궁과 전면전이 될 텐데…”
표충은 시선을 계속 가리는 유세운을 짜증나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반드시 저놈의 목부터 베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말이다.
“어차피 창천궁을 무너뜨리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단지 그 시기를 정하기가 힘들었을 뿐… 이제는 때가 무르익었다고 봐도 되겠지.”
표충의 말에 백연혜의 안색은 더욱 창백해졌다. 그녀의 면사가 가볍게 떨리는 것을 지켜본 유세운은 그녀를 향해 장난끼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여줬다. 백연혜는 그의 미소를 보고는 속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이렇게 강호사정을 모를 수가 있지?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웃을 수가 있는 걸까? 지금 표충의 말은 전 강호를 뒤흔들 발언이었는데도…’
유세운은 말에서 천천히 내리며 말의 목을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표충은 아까부터 계속 시선을 잡아끄는 녀석의 행동에 자신의 애도가 빨리 피를 마시고 싶다고 우는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세운은 말에게 시선을 준 채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일단 너희가 그 미친 망나니 녀석이 보낸 선발대라 이거지?”
“뭐? 미친 망나니?”
“그래. 너희 둘째 소성주라는 미친 녀석 말이다.”
“크크크크.”
표충의 웃음은 점점 낮아지기 시작했다. 표충은 사람의 목을 일도에 베는 것을 좋아했다. 시원하게 베어 나가는 자신의 도로 인해 하늘로 치솟는 머리를 볼 때마다 몸서리 쳐 지는 쾌감은 중독성이 있었다. 표충은 가장 먼저 베야 할 녀석을 발견하자 손이 근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유세운은 그에게 관심조차 가지지 않고 백연혜에게 물음을 던졌다.
“저기 창천백검수의 실력이 어느 정도나 됩니까?”
“예?”
유세운의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한 백연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다시 되물었다. 유세운은 그런 그녀를 향해 안심하라는 듯 장난끼 어린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창천백검수가 있으면 흑마천살대 몇 명과 견줄수 있냐고요.”
유세운의 미소에 조금이나마 마음을 가라앉힌 백연혜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아직 집접적으로 부딪친 적은 없지만 아마 창천백검수라면 흑마천살대의 이백과 견줄 만 할 것 같아요.”
유세운은 백연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도망가는 건 무리 없겠군요.”
“아니에요. 흑마천살대의 대주가 이곳에 온 이상 무리에요. 창천백검수의 대장도 그의 백초(百招)를 받아내기 힘들 거예요.”
백연혜의 말에 표충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크크크. 제법 똑똑한 계집이구나.”
유세운은 표충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여운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일단 백소저를 지킬 수 있겠소?”
“무슨 말이오?”
여운의 물음에 유세운은 가볍게 어깨를 들어올리며 대답했다.
“이건 우리 가문의 일이니 굳이 당신들이 피를 흘릴 필요는 없소.”
유세운의 말에 백연혜와 여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백연혜가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린가요! 당신 혼자 저들을 상대하겠다는 건가요?”
유세운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당연한거 아닌가요? 저 정도의 녀석을 상대하는데 다른 이의 손을 빌린다는 건 웃음거리 밖에 안 된다고요.”
유세운의 말에 백연혜는 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소리에요! 흑마천살대 오백이면…”
유세운은 백연혜의 황당하다는 듯 소리치는 말을 손을 들어 막았다.
“걱정말아요. 우리 광오문이 패할 일은 없으니까…사부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놈인 거 같은데…”
“광오문이라면…?”
“하하. 내가 몸담고 있는 곳이에요. 내가 이대 문주죠.”
유세운은 그 말을 마치고는 천천히 뒤를 돌아 표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백연혜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저렇게 무모한 인물이라니 그리고 어디서 기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무한한 자신감을 표현하는 그의 모습에 걱정이 앞섰다.
유세운은 걸음을 옮겨 표충의 십장 앞에 멈춰 섰다. 표충은 자신이 찾아 갈 것도 없이 자신 앞에 와 서는 유세운을 기특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괴소를 흘렸다.
“크크크. 미친놈. 그렇게 죽고 싶다면 그 소원을 들어주지.”
“쩝. 그게 좀 힘들 거야. 네 실력으론… 아마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무리겠지. 음 그래.”
표충의 눈썹이 상큼 위로 치켜떠졌다.
“크크크.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놈이로구나.”
“쩝 일단 우리 유가장을 넘봤으니 몸 성히 돌아갈 생각은 버려.”
유세운의 말에 표충은 자신의 등에 매여진 대도를 뽑아 들며 말했다.
“너희 유가장? 그렇다면 네놈을 시작으로 유가장의 주춧돌 하나 남기지 않아주마. 크크크.”
유세운은 표충의 말에 어깨를 들썩였다.
“가능하다면…”
흑마천살대(黑魔千殺隊)와의 결전.(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