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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익은 자신의 눈으로 보고도 눈앞에 일어난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정무와 싸우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이 물러나 주변에 분명히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정무를 찔러가는 도중에도 주변의 상황을 모두 인식하고 있었다. 아니 그렇다고 믿었었다. 자신의 검이 누군가의 손가락에 잡히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더욱이 열 받는 것은 정무가 앉은 채로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내력을 이용해도 꿈쩍도 않는 검이 정말 자신의 검인가 의구심이 들었다.
“이봐. 지금 살인을 저지르려고 한거야?”
홍종익은 자신에게 말을 거는 인물을 쏘아보았다. 고급스런 청삼에 하나도 웃기지 않은 이 상황에서도 얼굴가득 웃음을 짓고 있는 상대를 보니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이런 빌어먹을! 넌 뭐냐!”
홍종익의 말을 들은 유세운은 자신의 손가락에 잡힌 검에서 느껴지는 힘을 재보고는 가볍게 웃었다.
“하하. 고작 이정도 실력으로 나한테 막말해서 좋을 건 없을 텐데…?”
“무슨 헛소리냐! 그리고 이거 어서 못 놔!”
“훗.”
유세운은 가볍게 웃고는 자신의 손에 잡혀 있던 검을 놓았다. 홍종익은 뒤로 물러난 채 유세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까 삼층으로 올라오며 장삼에게 면박을 주던 녀석이었다. 심상치 않은 내력을 지닌 녀석이겠거니 하고 신경을 쓰다가 정무 일행이 올라와 신경을 끊었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낯이 익어보였다. 홍종익의 눈에 의아함이 깃들 때 유세운이 허리춤에 양손을 걸치며 말했다.
“네가 나한테 한 무례는 용서해 줄 테니 이만 물러가라. 네 녀석의 얼굴에 난 흉터를 보니 용서해 줘도 될 것 같군.”
유세운의 말에 홍종익은 다시 한번 자신의 뺨에 난 상처에 손을 가져다 댔다. 피가 아직도 흐르는 것을 보니 상처가 생각보다 깊어보였다. 얼굴에 난 상처는 순식간에 홍종익의 이성을 불태워 버렸다.
“흐흐흐. 누가 누굴 용서한다는 거냐?”
유세운은 홍종익의 얼굴변화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너 지금 그 표정은 뭐냐? 마치 용서 받기 싫다는 듯한 표정인데?”
“흐흐흐. 용서? 용서라… 누가 누굴?”
“네놈의 무례를 내가 용서해 준다니까”
“헛소리!”
홍종익의 청삼이 부풀어 오르며 그의 눈에서 광기가 번쩍이기 시작했다. 정무는 그런 홍종익을 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괜찮으니 물러가게. 저자의 실력이 녹록치 않다네.”
유세운은 정무의 걱정 어린 말투에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걱정 마시죠. 솔직히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아무리 잘 쳐줘도 제 한번의 공격도 막아내지 못할게 뻔하니까.”
정무는 유세운의 자신감 어린 말투를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솔직히 방금 전 유세운이 어떻게 홍종익의 검을 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방심했었기 때문이었다. 저렇게 진심으로 나오는 상대를 보고 자신의 일초지척(一招之斥) 밖에 안 된다고 장담하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홍종익도 유세운의 말을 듣고는 안색을 붉게 물들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흐. 진심이냐? 내 앞에서 이렇게 광오하게 말하는 녀석은 내 평생에 처음이다.”
“그래? 그건 그렇고 너 제법인데?”
“뭐가 말이냐?”
“날보고 광오하다니 말야. 내가 광오문의 이대 문주거든.”
“갈! 지금 누굴 놀리는 거냐!”
“놀리고 싶긴 하지만 아직 놀리지도 못했는데?”
홍종익은 검을 들어 유세운을 가리키며 소리 질렀다.
“그런 문파 따위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누굴 바보로 아는 거냐?”
“그거야 네놈의 견식이 짧아 서지. 날 탓하진 말라구.”
홍종익은 금세 흥분을 가라앉히며 조용히 웃었다.
“흐흐흐. 어차피 죽을 놈이니 상관없겠지.”
“넌 살인을 아무 생각 없이 하는 놈이군.”
유세운은 홍종익을 보며 고개를 흔들더니 손가락 관절을 풀기 시작했다. 홍종익은 자신이 검을 겨누고 있음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가락 관절을 풀고 있는 유세운을 보며 입을 열었다.
“준비는 끝난 거냐?”
유세운은 홍종익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자신을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지금 그 말 나한테 한거냐?”
“당연히 네놈보고 한말이다.”
“이상하군. 너 하나 두들겨 패는데 무슨 준비가 필요하다는 거야?”
“갈!”
홍종익은 결국 참지 못하고 광풍쾌검 초식을 펼쳤다. 홍종익 주변의 공기가 광포한 바람에 휘말리며 질풍처럼 검이 찔러왔다. 유세운은 자신의 코앞까지 찔러오는 검을 보고도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유세운은 태연하게 고개를 살짝 움직여 검을 피하고는 홍종익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홍종익과 눈이 마주친 유세운은 진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거봐. 무슨 준비가 필요해?”
퍽!
“커헉!”
홍종익은 자신의 복부에 깊이 박힌 유세운의 주먹을 보며 신음성을 터트렸다. 유세운은 숙여진 그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내가 어딜 봐서 촌놈 같다는 거냐?”
“뭐…?”
홍종익이 가물가물해지는 의식 속에 간신히 유세운의 말에 의문을 표했다. 유세운은 피식 웃어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별로 중요한건 아냐. 잊으라구.”
빡!
“컥!”
홍종익은 유세운의 주먹에 턱을 얻어맞고는 비명과 함께 위로 떠올랐다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탁자를 부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우당탕!
유세운은 고개를 흔들며 어깨를 살짝 들어올렸다.
“다음부터는 상대를 봐가면서 덤비라구.”
유세운은 멍하니 둘의 대결을 바라보고 있던 인물들 중 홍종익과 같이 온 일행들에게 물었다.
“뭐 하는 거야? 데려가야 하지 않아?”
“이름이라도 알려줘야 하지 않소?”
“응? 아 내 이름. 하하하.”
유세운은 시원하게 웃어주고는 사내들을 향해 자신 있게 입을 열었다.
“광오문의 이대 문주인 유세운이라고 하지. 음하하하.”
“광오문? 유세운…”
“그래. 유세운. 너희가 앞으로 평생 기억하게 될 이름이지. 음하하하.”
“흥! 마도인을 감싸고 우리 화산파를 적으로 둔 것을 후회하게 될 거요.”
“응? 마도인?”
유세운은 고개를 들어 정무를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지켜본 유세운으로서는 둘의 행동은 전혀 달라보였다. 오히려 홍종익이 훨씬 더 마도인다운 모습을 보여줬다. 유세운은 정무를 보고는 빙그레 웃어보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화산파의 검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글쎄? 마도인을 감싼 것도 그리고 화산파를 적으로 둔 것도 별로…”
“뭣이! 그 말에 책임 질 수 있는 거요?”
유세운은 한쪽 눈썹을 슬며시 들어 올리며 화산파 검사를 내려다보았다.
“당연하지. 감히 누가 있어 광오문의 문주를 핍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이런 겁 없는…”
화산파 검사는 유세운의 터무니없는 자신감에 말문이 막혔다. 대체 들어보지도 못했던 문의 문주라는 자가 화산파의 이름 앞에서도 코웃음 한번으로 넘어가려 하다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화산파 검사는 이를 악물고 홍종익을 바라보고는 유세운을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당신은 지금 화산파 뿐만 아니라 정협련과도 등을 돌린 거야. 알겠어?”
“정협련?”
유세운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화산파 검사의 눈에는 그 것조차 자신들을 비웃는 행동 같았다.
“흥! 그리고 너는 지금 정협련주님의 사제를 저렇게 만든 거다. 각오 단단히 하시지!”
“뭐? 저놈의 사형이라고?”
유세운은 화산파 검사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저런 녀석이라면 그의 사부가 온다고 해도 웃음이 나올 판에 장난 그만하고 데리고 가라. 그리고 한번만 더 내 앞에서 허튼소리하면 똑같은 꼴로 만들어주지. 어차피 두 명 남으니까 숫자도 맞겠군.”
“으윽!”
유세운의 말에 화산파의 검사는 이를 악물더니 뒤로 천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유세운은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뒤로 물러가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정무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고맙소.”
정무는 입에서 흐르는 선혈을 닦을 생각도 않고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유세운은 악양루의 삼층을 둘러보았다. 이미 주변은 난장판이 되었고 방금 전 홍종익과 화산파 검사들이 내려 갈 때 자신의 옆에 앉아 있던 자들도 같이 내려간 게 보였다. 유세운은 정무를 향해 웃음 지으며 말했다.
“이쪽은 자리가 없으니 제자리로 가죠. 음식이 방금 올라왔군요.”
“고맙소.”
정무는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다른 세 명이 달려와 부축하려하자 정무는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괜찮다.”
유세운은 그런 그들을 바라보고는 자신의 자리로 갔다. 이소는 음식을 내려놓고 걱정스런 눈빛으로 유세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세운은 이소의 시선을 받고는 가볍게 웃었다.
“왜 그러냐?”
“괜찮으십니까? 화산파와 원한을 만드셨는데…”
“훗. 그런 건 상관없다. 걱정 말고 잔이나 네 개 더 가져다 다오.”
“예.”
이소는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유세운의 자리로 와 앉은 정무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자신도 처음 들어보는 문파의 문주라는 자였다. 무공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가늠해 볼 수 없을만한 고수였다. 이런 신진고수가 있다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강호에서 신진고수 중 가장 유명한 인물들은 삼룡삼봉(三龍三鳳)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일궁, 이성, 삼문의 소주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제외하고 이렇게 강한 자가 있다는 것은 눈으로 보고도 믿기가 어려웠다. 정무는 힘겹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초면에 실례지만 철마성에 들어오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철마성이요? 훗. 농담마세요.”
“무슨 말씀이신지?”
“철마성의 성주가 와서 부성주를 맡아 달라고 해도 맡아줄 생각 없어요. 아니지. 성주 자리를 준다고 해도 싫은데요?”
“예?”
“하하하. 전 광오문의 이대 문주에요.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다고요.”
“그런…”
유세운은 그저 가볍게 웃음을 보여주기만 했다. 하지만 정무는 이런 고수가 철마성으로 온다면 그리고 자신이 소개해 준 것이라면 조금이라도 뇌종문에 득이 될 거라는 생각에 쉽게 포기하지를 못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는 거지만 머지않아 무림천하는 철마성의 깃발아래 놓일 겁니다.”
“설마요?”
유세운이 말도 안돼는 소리 말라는 표정으로 되묻자 정무는 정색을 하고 말을 이었다.
“아닙니다. 지금 철마성은 혈천문(血天門)과 손을 잡고 무림평정에 올랐습니다.”
“호오. 그래요?”
“그리고 이건 극비입니다만…”
극비라는 말에 유세운은 솔깃해하며 같이 고개를 숙이다가 정무를 바라보고는 인상을 가볍게 찌푸렸다.
“피는 좀 닦고 얘기하죠?”
“아. 그렇군요.”
정무는 어색하게 웃고는 입가의 피를 닦았다. 유세운은 피를 닦는 정무를 바라보며 궁금한 점을 물었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당신 철마성의 성도가 아니라 나중에 들어간 사람 아닌가요?”
“예? 맞습니다만.”
“그런데 왜 그렇게 철마성 편을 들죠?”
“후후후 그렇게 보였습니까? 죄송합니다. 저희 문주님이 아직 어려서 걱정이 앞서다 보니 철마성을 편 든 것 같군요.”
“흐음. 아! 그건 그렇고 극비라는 것은 뭐죠?”
“아 혹시 유가장이라고 아십니까? 가주가 유태청이라는…”
“응? 유가장이요? 아니 유가장이 왜요?”
다급하게 묻는 유세운을 바라보며 정무는 그의 관심을 끄는데 성공했다는 생각에 자신 있게 말을 이었다.
“철마성의 이 공자께서 유가장의 여식인 산검낭자(散劍娘子) 유주란에게 반했습니다. 하지만 그 여식이 어이없게도 거절했습니다.”
“흠. 당연하죠.”
“예?”
“아! 계속 말하세요. 그래서 어떻게 됐다는 거죠?”
유세운이 말을 돌리며 다시 묻자 정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철마성에서는 그것을 빌미로 창천궁의 영역권 안에 있는 강서성의 유가장으로 흑마천살대(黑魔千殺隊)를 보낸 겁니다. 이것은 확실한 창천궁과의 결전을 염두에 둔 초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천궁에서는 자신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철마성의 흑마천살대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는 것이죠.”
쾅!
정무는 갑작스레 탁자를 반쪽으로 부수는 유세운의 주먹에 당황했다. 유세운은 두 눈 가득 살기를 내뿜으며 물었다.
“다시 한번 말해 보시죠? 그러니까 철마성에서 유가장으로 흑마천살대라는 자식들을 보냈다는 말이요?”
집으로 돌아가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