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홍종익은 눈가를 파르르 떨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흥분하는 홍종익을 보며 정무는 입가에 가는 미소를 지었다.
“잘 못들었나? 이상하군. 다른 사람들도 다 들었을 만큼 작지 않게 얘기해 줬는데…”
“흐흐흐. 지금 뭔가 내가 잘못들은 것 같아서 말이야. 내가 이래봬도 정협련의 백호당 부당주인데 그런 내가 알아서 안 될게 뭔가 해서 말이지.”
정무는 자신의 짧은 턱수염을 손등으로 한번 살짝 비비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예전에 소문을 하나 들은 적이 있었지. 화산파에서 뛰어난 인재를 얻었다는 말이었는데… 길(吉)이 있으면 흉(凶)이 따르는 법이라고 대신 한 망나니를 받아 들였다더군. 그 덕에 요즘 한창 화산파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라지 아마?”
정무의 말에 홍종익은 입가에 가득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낮게 웃었다.
“후후후. 그럼 다른 소문도 들어봤겠군.”
“그래. 들어봤지. 제 능력도 모르고 아무에게나 이빨을 들이민다고 하더군.”
“후후후. 그럼 당신은 얼마나 능력이 되는지 볼까? 과연 이빨을 피할 재간이나 있나 모르겠군.”
“하하하. 백호당의 부당주나 된다는 자가 이렇게 사리분별이 없어서 정협련이 무엇을 할 수 있겠나?”
“어디 그 입심만큼 실력도 되는지 보지.”
홍종익은 정무를 향해 낮게 말하고는 탁자에서 물러나며 허리에 매고 있던 검을 쥐었다. 정무는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그래. 화산파의 망나니의 실력을 한번 기대해 보지.”
정무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등에 맨 도를 움켜쥐었다.
유세운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입을 가리고 작게 웃었다.
“후후후. 그래. 아주 저 재수 없게 생긴 놈을 짓밟아 다오.”
유세운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둘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소를 보고는 손짓했다. 이소는 불안한 얼굴을 한 채로 유세운에게 다가와 죽엽청과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약간의 절인 나물을 내오며 말했다.
“저 손님들은 어떻게 되신 거죠?”
“응? 아 어떤 재수 없게 생긴 놈이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시비를 걸어서 생긴 일이야. 너도 심심하면 여기 앉아서 구경해라.”
“아이고. 공자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는 그랬다간 그 날로 쫓겨납니다.”
“아. 그래. 미안하군.”
“아닙니다.”
이소는 공손히 유세운에게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유세운은 다시 고개를 돌려 홍종익과 정무를 바라보았다.
홍종익은 천천히 검을 뽑으며 입가에 비웃음을 띄었다.
“대체 뇌종문이 언제부터 우리 화산파를 업신여기게 된 건지 모르겠군. 철마성의 개가 된 뒤부터는 주인의 힘을 믿고 그러는 건가?”
“후후. 글쎄? 자네 정도가 화산파의 이름을 걸고 싸울만한 실력이 되나 모르겠군?”
“어차피 철마성의 밑으로 들어간 네놈의 생명을 살려주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 맘껏 떠드시지.”
“좋아. 그렇다면 나도 자네의 목숨을 살려둘 필요는 없겠군?”
“물론이지. 하지만 과연 그게 그렇게 될지 모르겠군.”
“글쎄…?”
정무는 천천히 자신의 등에 메어진 도를 뽑아들었다. 푸른 도신이 음산한 빛을 뿌렸다. 홍종익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체로 입을 열었다.
“선수(先手)를 양보하지. 어디 뇌종문의 도를 한 번 견식해 볼까?”
정무는 자신 있는 미소를 짓는 홍종익을 보며 자신의 도를 들어 올렸다. 뇌종문의 도법은 양손으로 쓰는 무공이라 다른 도에 비해 손잡이가 길었다. 손잡이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상대는 비록 비웃기는 했지만 실력이라면 화산파에서 신진고수중 매화기검을 제외하고는 최고수였다. 아무리 자신이 그보다 경험이 많고 뇌종문의 절기인 뇌영삼도(雷影三刀)를 터득했다지만 쉽사리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 정무는 저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렸다.
“오늘은 길보다 흉이 많겠군.”
“뭐라고 하는 거냐? 지금 이 상황에서도 검보다는 입으로 말할게 남은 거냐?”
“훗. 좋아. 자네의 오만이 언젠가 자네를 죽음으로 인도할 걸세. 뇌영삼도 제 일식 뇌종만리(雷從萬里)!”
힘차게 밟은 앞발에 힘을 실어 허리춤부터 찔러 들어가는 정무의 도는 뇌를 쫓으려는 듯 빠른 속도로 찔러 들어갔다. 홍종익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던 뇌종문의 일초를 보고는 안색을 굳히며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정무의 뇌종만리 일초는 저돌적으로 찔러오면서도 빠르기가 섬전과 같았다. 홍종익은 급히 물러나며 검을 들어 정무의 도를 막아갔다.
쩡!
정무의 도와 홍종익의 검이 부딪치자 악양루 전체를 울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무는 홍종익의 검에 담긴 진력에 두 걸음을 물러나는 가 싶더니 몸을 회전시키며 소리 질렀다.
“뇌영삼도 제 이식 선풍뇌참(旋風雷斬)!”
허리춤에서 가장 크게 도를 돌리며 홍종익의 허리께를 배어가는 정무의 도에는 푸르스름한 도기가 얼핏 보였다. 홍종익도 푸르스름한 도기를 보더니 혀를 내둘렀다.
“제법이군.”
홍종익은 몸을 비스듬히 띄우며 검으로 도의 옆면을 내리쳤다. 정무는 강한 회전력이 걸린 도가 옆에서 받은 힘에 의해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정무는 헛바람을 삼키며 한발을 강하게 앞으로 내딛었다.
“흥! 뇌종만리!”
도의 회전이 끝나자마자 다시 한번 정무의 허리춤에서 섬전처럼 도가 폭사 되어갔다. 미처 허공에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홍종익은 다급히 검에 진기를 불어넣으며 도를 쳐냈다.
쩡!
아까와는 다르게 홍종익은 뒤로 일장 가까이 날아갔고 정무는 몸을 숙이고 다시 뛰어 나갔다. 정무의 입가에는 가느다랗게 붉은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정무는 속이 진탕되고 내력이 끊어지는 부분을 느끼고는 무리하게 몸을 날렸다. 홍종익도 낭패한 얼굴을 하며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검을 들어올렸다. 홍종익의 얼굴은 홍시처럼 붉어졌다.
‘그렇게 강하지도 않은 것이 선수의 득을 확실히 보려고 하는군. 어딜!’
홍종익은 안색을 굳히고 십성의 내력을 끌어 올렸다. 화산파의 옥함신공(玉函神功)이 단전에서부터 뿜어져 올라오며 그의 청삼을 부풀어 올렸다. 홍종익의 붉어진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잔재주도 여기까지다. 매화삼검(梅花三劍)!”
홍종익의 검이 허공에 푸른 검기를 머금은 체 매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정무는 달려가던 기세에 다시 한번 발을 굴러 비스듬히 옆으로 몸을 날렸다. 검기를 머금은 매화는 허공에 세 송이가 허무하게 피었다 사라졌다. 정무는 검기에 의해 베어진 어깨부분의 통증을 어금니를 깨 물으며 참았다. 이미 상처를 돌보며 싸우기에는 너무 많이 와버렸다. 매화삼검을 펼친 홍종익의 오른쪽이 빌 것을 직감하고 그의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던 정무의 도가 다시 한번 빠르게 뇌종만리를 펼쳤다. 홍종익의 오른쪽 겨드랑이를 향해 섬전처럼 쪼아져 나가는 도를 보며 정무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그려졌다.
홍종익은 자신의 매화삼검에 어깨만을 살짝 베인 채 자신의 오른쪽에 웅크린 정무를 향해 이를 갈았다. 하지만 다시 한번 정무의 도가 일체의 변식 없이 자신의 겨드랑이를 향해 찔러오는 것을 보고는 이를 악물었다.
“윽!”
홍종익은 다급히 사문의 절기인 오행매화보(五行梅花步)를 펼쳤다. 오행의 방위를 밟아 나가기 시작하자마자 정무의 도가 코앞까지 들이 닥쳤다. 홍종익은 다급히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그의 도를 피했다.
슈각!
허공을 가르는듯한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홍종익의 뺨이 길게 베어지며 핏물이 솟아올랐다. 홍종익은 분노로 뇌가 타버리는 듯했다. 홍종익은 고개를 돌리던 방향으로 몸을 돌리며 검을 내뻗었다.
“광풍쾌검(狂風快劍)!”
홍종익이 십년을 넘게 고된 수련을 해왔던 검법이었다. 화산파라하면 의당 매화검을 떠올리기 십상이라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광풍쾌검을 심력을 다해 익히고도 자주 써볼 날이 없었다. 특히 저번 대회에서도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검법을 포기한 체 매화검 만으로 승부를 내다가 곤륜파의 신예고수인 운룡일검(雲龍一劍) 청호진인에게 패했었다. 그 울분마저 같이 쏟아져 나온 홍종익의 광풍쾌검은 주변의 공기마저 휘말려 들었다.
정무 또한 홍종익이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검을 피하자 전신의 진기를 끌어 올렸다.
“뇌영삼도 제 삼식 뇌형삼절참(雷形三節斬)!”
주변의 공기마저 휘말리며 뻗어오는 쾌검을 향해 정무의 도가 베어갔다. 마치 벼락의 모양으로 상단, 중단, 하단을 베어가는 도기의 위세는 진정 벼락이 치는 것만 같았다. 광풍쾌검의 진기와 정무의 뇌형삼절참은 허공에서 격렬한 굉음과 함께 부딪쳤다.
콰쾅!
“커헉!”
신음소리와 함께 정무의 몸은 뒤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그들이 서로 검을 뽑을 때부터 주변에 있던 자들이 자리를 피한 탁자로 날아간 정무는 등으로 탁자에 부딪쳤다.
쿠당탕
시끄러운 소음과 함께 정무의 몸은 바닥에 나뒹굴었다. 정무는 입에서 선혈을 흘리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크윽. 의외로군. 광풍쾌검에 이정도의 위력이 있을 줄이야.”
“흐흐흐. 물론이지. 내가 비록 호사형을 앞지르지는 못했지만 다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홍종익은 천천히 정무에게 다가갔다. 아까 베인 뺨에서 흘러내린 피가 청삼을 적시고 있었다. 홍종익은 왼손을 들어 자신의 뺨에 흐르는 피를 닦았다. 홍종익의 입에 비릿한 조소가 어렸다.
“흐흐흐. 각오는 돼 있겠지? 내 피를 본 값은 크다.”
정무는 자신에게 검을 들고 다가오는 홍종익의 눈에 어린 광기를 보고 고개를 내저었다. 순간 정무와 같이 왔던 세 명의 사내가 정무의 앞을 막아서며 도를 뽑아 들었다. 홍종익은 입가에 더욱 진한 미소를 지었다.
“뭐냐? 부하들에게 목숨이라도 구걸 받겠다는 거냐?”
“비켜라. 지금 뭐하는 짓들이냐!”
“안됩니다. 부문주님을 이런데서 저런 놈에게 죽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정무는 고개를 내저으며 소리를 질렀다.
“너희가 끝까지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구나. 비켜라. 죽더라도 마음 편하게 저 녀석을 비웃어주고 싶으니까. 너희가 나를 막으면 나 또한 저 녀석을 비웃을 수 없단 말이다.”
정무의 말에 그의 앞을 막아섰던 자들은 눈에 진한 눈물을 머금은 체 뒤로 물러나 정무의 뒤에 섰다. 홍종익은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하하하. 지금 뭐하는 거지? 그런다고 내가 네놈의 목숨을 살려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흥. 뭐라고 하는 거냐? 설마하니 나 정무가 너에게 목숨이라도 구걸할줄 알았느냐?”
“좋아. 아주 좋아. 구차하지 않게 죽음을 선택하는 모습이 아주 맘에 드는군.”
한걸음 더 앞으로 다가온 홍종익을 보며 정무는 고개를 내저었다.
“화산파가 안 됐군.”
“무슨 헛소리냐!”
“네놈의 실력만큼이나 인성을 가르쳤다면 매화기검과 더불어 화산파의 이름을 드높였을 것을 아쉽게 됐어.”
“흐흐흐. 유언치고는 조금 엉뚱하군.”
정무는 홍종익을 바라보던 눈을 감으며 말했다.
“그래. 죽여라. 최선을 다했으니 여한은 없다.”
“좋아. 죽여주지. 생각 같아서는 네놈을 토막이라도 내고 싶지만 보는 눈이 있어 안타깝군. 하지만 고통 없이 죽으리란 생각은 버려라.”
정무는 아무 대답 없이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내밀고만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홍종익은 이를 악물며 빠르게 검을 뻗었다.
“네가 뭐라고 되는 양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이냐! 죽어!”
슈악!
정무는 자신 없이 뇌종문을 이끌어 가야 할 문주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죄송합니다. 문주님. 비록 철마성에게 무릎을 꿇었지만 언제고 재기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날까지 제가 구천에서라도 지켜보겠습니다.’
“뭐냐!”
정무는 갑작스레 들려오는 홍종익의 목소리에 의아함을 느끼며 슬며시 눈을 떴다.
홍종익의 검은 정무의 바로 코앞에서 누군가의 손에 의해 잡혀 있었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잡혀 있는 홍종익의 검을 보고 정무는 가볍게 웃음이 나왔다. 더욱이 홍종익의 붉어진 얼굴을 보자니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
강호에 나와 처음으로 출수하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