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자그마한 연못과 그에 어울리는 단아한 정자(亭子).
정자 뒤편으로 푸른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서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정자에는 한 청년이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그는 대나무 숲과 하늘을 번갈아 보았다. 반쯤 눈을 감은 채 하늘을 바라보는 사내는 얼핏 봐도 충분히 호감이 갈만하게 생겼다. 반개(半開)한 눈에서는 진중한 빛이 흘러나왔고 오뚝한 코와 약간은 두툼한 입술은 편안한 인상을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둥그스름한 얼굴을 한 사내는 다시 한모금의 차를 마셨다. 하지만 그는 뒤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 정자를 올라오는 자를 바라보았다.
까치집을 짓고 있는 머리와 여기저기 기운 옷과 만만치 않은 악취를 풍기며 정자를 올라오는 자를 향해 사내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기운 옷의 사내는 넉살좋게 웃었다.
“어이 정협련(正俠練)의 부련주께서 여기서 뭐하고 계신건가?”
부련주라 불린 사내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현무당주(玄武堂主)군. 푸훗. 그래 복상 자네 여긴 웬일인가?”
현무당주라 불린 복상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냥 동철 네가 여기 있다 길래 와봤지.”
“그래?”
복상은 동철의 맞은편에 앉으며 정자 뒤편의 죽림(竹林)을 바라보았다. 복상은 고개를 흔들더니 물었다.
“이거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저 죽림은 네가 만들자고 했다면서?”
“응?”
동철은 복상의 말을 듣고는 푸른 죽림을 바라보았다.
“아. 저거? 내가 처음 마신 술이 죽엽청이었거든…생각이 나기에 만들자고 했지.”
복상은 동철의 말을 듣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야. 그만 잊어버려. 처음 너랑 술을 마셨던 그 꼬마 녀석은 행방불명된 지 벌써 십삼 년이 흘렀어. 이제 그만 잊어버려. 아직도 소식이 없는 것 보면 어디선가 죽었나 보지.”
“그럴까? 하지만 내 느낌인데 왠지 살아 있을 것 같아.”
“에휴~ 어떻게 보면 그놈에게 고마워해야 하기는 하겠지. 그렇게 내성적이던 네가 이제는 이만큼이나 성격이 밝아진 걸 보면 말이야.”
“사부님도 가끔 그 애 얘기를 하곤 해.”
“하긴 너희 현요진인님의 가장 큰 걱정거리가 그날 이후로 많이 나아졌으니 당연하지.”
“후후. 그런가?”
동철은 다시 한 모금 차를 마셨다. 복상은 정자의 난간으로 다가가 걸터앉으며 물었다.
“너 그때 왜 그런 거냐?”
“그때라니?”
“구파일방의 신예고수들이 모두 모여서 련주를 뽑을 때 말이야.”
“그때가 왜?”
“너 나한테까지 그럴 거냐?”
“무슨 말이야?”
진지하게 물어오는 복상을 보며 동철이 난처한 표정으로 물었다. 복상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야. 비록 지금 련주인 매화기검(梅花氣劍) 호강현이 뛰어난 매화검수라고 해도 그래. 그리고 비록 그가 자하신공(紫霞神功)의 경지가 육성(六成)에 달했다 해도 네 상대는 안 된다는 걸 잘 알 수 있단 말야!”
복상이 폭풍처럼 말을 쏟아 붓자 동철이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무슨 소리하는 거야. 자하신공의 육성은 장난이 아니야. 게다가 호강현의 검은 장난이 아니었어.”
동철의 변명에 복상이 거칠게 입을 열었다.
“그래봤자 녀석은 자하신공을 이용한 검기(劍氣)가 전부인 녀석이야. 너하고는 그릇이 달라!”
동철은 복상의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복상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동철을 보고는 자신이 너무 흥분했었다는 것을 느끼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래. 대체 왜 그런 거냐?”
동철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얘기하는 복상을 보고 웃었다.
“별거 없었어. 솔직히 너 말고는 아무도 모를 테니까…”
“뭐? 그럼 네가 이미 검강(劍剛)의 경지에 도달한 것을 현요진인님도 모르신단 말이야?”
“응. 솔직히 너와 둘이서 대련하다 깨달은 거라서… 그리고 괜히 사부님에게 얘기했다가 엄청나게 소란스러워졌을 거야.”
“야! 너 미쳤어? 네 나이에 그 정도의 경지에 드는 사람이 얼마나 적은지 알잖아! 그리고 거기서 만족할거야?”
“뭐… 사실 여기서 만족하려고 해.”
복상은 동철의 대답에 어이없어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조용히 물어보았다.
“대사형 때문이냐?”
갑작스런 복상의 질문에 동철은 흠칫 놀랐다. 동철은 찻잔을 내려다보며 어색하게 대답했다.
“갑자기 대사형은 왜…?”
복상은 동철이 앉아 있는 탁자로 다가와 앉으며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네가 너희 대사형보다 뛰어나다는 건 현요진인님도 알고 너희 장문인님도 알고 그리고 우리 사부님도 아는 일이야.”
복상의 말에 동철은 아까보다 더욱 놀라워했다.
“뭐…뭐?”
“그래. 너희 대사형은 아직도 검강의 경지에 도달을 못하고 있어. 네 녀석이랑은 그릇이 다르다고… 모두 다 아는 사실을 왜 너는 모르는 거냐? 아니…아니지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네가 여기서 멈추려는 거겠지.”
“그…그건.”
복상은 태연히 동철에게 그리고 한심하다는 듯이 말을 건넸다.
“이봐 동철. 네가 대사형을 걱정해주는 것은 알겠지만 무공이 가장 강한 사람이 장문인이 되는 것은 아니야. 특히나 너희 무당파와 같은 곳은 말이지. 우리 개방처럼 거지들만 모인 곳은 확실히 강한 자가 방주가 되주지 않으면 곤란하지만 말이야.”
“…”
“그리고 너희 대사형의 인품이야. 무당파 밖에서도 알아주는 정도니까 네가 아무리 강해져도 그리고 네가 아무리 뺏고 싶어도 무당파의 장문인 자리는 무리야. 그러니까 마음껏 강해져도 괜찮아.”
동철은 반개한 눈을 번쩍 떴다. 동철은 복상을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복상은 기분 좋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희 사부님도 엄청 기다리고 계실 거다. 솔직히 이미 검풍의 경지에 든 현요진인님이 설마 네가 그 경지에 든 것을 몰랐을까? 네가 말하길 기다리고 계신거야.”
“…그런 거였어?”
“그래.”
동철은 사부가 자신을 위해서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을 기다려줬다는 것에 너무나 고마웠다. 복상은 그런 동철을 바라보며 귀를 후벼 팠다.
“그건 그렇고… 사적인 얘기는 이거면 됐고 이제 공적인 얘기를 조금 해볼까?”
“공적인 얘기?
“이봐. 이봐. 동철 너는 아무리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자리에 있다지만 명백히 정협련의 부련주라고 그렇게 멍청하게 있으면 어떻게 해?”
“아. 그래? 난 무슨 얘기인가 했지.”
“야! 등골 빠지게 정보수집하고 다니는 우리 현무당의 애들을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좀 해줘.”
“아~ 미안해. 그래 무슨 일이야?”
“아 별거 아냐. 요즘 한창 분위기가 어수선해서 말이지.”
“분위기가 어수선해?”
“철마성에서 자신들의 구역이 아닌 다른 구역을 노린다는 소문이 있어.”
“정말이야?”
동철은 안색을 굳혔다. 이건 생각외의 움직임이었다. 철마성이 자신들의 지부가 있는 곳의 군소방파를 흡수한 지가 벌써 팔 년 전의 일이다. 당시 그들의 발호를 막기 위해서 구파일방의 신예고수들을 모아 정협련을 만들었다. 그리고 정협련의 련주가 일 년 전에 선출 되었다. 하지만 그뒤로 움직임이 없던 철마성에서 자신들의 세력권이 아닌 창천궁의 세력권에 있는 군소방파를 노린다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복상은 귀를 후비며 말했다.
“아직 정확히 어디를 노리는 건지를 모르겠어. 하지만 소문이 제법 신빙성이 있는 것 같아.”
“그래? 이거 심각하군. 련주에게는 말했어?”
동철의 물음에 복상은 피식 웃었다.
“당연한거 아니냐? 그랬더니 백호단(白虎團)에게 이일을 맡기겠단다. 대체 련주라는 녀석이 그렇게 생각이 없어서야.”
“무슨 말이야? 백호단이 맡으면 어때서?”
복상은 머리를 내저었다.
“너는 그래서 아직도 멀었다는 거야. 백호단의 부단주로 있는 녀석 때문이라고. 같은 화산파의 녀석들이 이름을 날리길 원하고 하는 결정이라니까! 대체 뭐가 우선인지도 모르는 놈한테 련주를 맡기다니 에이!”
“그런 건가? 하지만 백호단에는 화산파만 있는 게 아니니 잘 해내겠지. 백호단주인 곤륜파의 운룡일검(雲龍一劍) 청호진인도 있는데 설마 일을 그르칠까?”
“하하 말도 하지마. 그 화산파의 부단주가 얼마나 망나니인지 네가 몰라서 그래. 너도 좀 주변 일에 신경 좀 써라.”
“그래? 그래도 부단주정도 되는 자라면 상당한 무공의 소유자일 텐데…?”
“아 물론 무공이야 쓸만하지. 인간이 안 되어 있을 뿐이지.”
“그래? 흐음.”
복상은 머리를 긁으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실력으로 따진다면 청룡단(靑龍團)이 최고야. 그들을 이용해도 솔직히 철마성의 행사를 알아챌 수 있을지 의문인데 고작 백호단으로? 위험해. 련주라는 녀석이 너무 철마성을 모르고 있어.”
“련주에게 말해보지 그래?”
“시끄러. 네 녀석이 련주가 됐으면 이런 일도 없잖아! 괜히 일만 복잡하게 하고 있어.”
“그런데 철마성이 그렇게 위험해?”
동철의 말에 복상은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장난하냐? 철마성 삼 할의 전력이면 구파일방중 한개 문파정도는 해치울 정도야. 그들의 가장 대외적으로 많이 움직이는 흑마천살대(黑魔千殺隊)만 해도 우리 정협련으로는 무리야.”
“뭐? 그런데 어떻게 막으라고 우리를 내보내는 거야?”
“바보 녀석. 하지만 우리는 구파일방의 일대제자 밑 가장 뛰어난 녀석들이니까 우리를 전부 죽이지는 못할 거라는 계산 하에 내보낸 거지. 우리는 그들과 무력으로 붙으려고 만들어진 곳이 아냐.”
“그런 거였어?”
당황하는 동철을 바라보며 복상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 사부가 너를 얼마나 애물단지처럼 취급하는지 알겠다. 너도 좀 눈치가 있어라.”
“으응.”
동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상은 동철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디 가냐?”
“음. 사부님을 뵈러 갈려고.”
“현요진인님? 하긴 그나마 우리의 가장 큰 기대라고하면 너희 사부님과 우리 사부님이 정협련의 고문으로 와 계신 거 정도라고나 할까? 나도 사부님이나 뵈어야겠다.”
“그래. 같이 가자.”
동철은 밝게 웃으며 복상에게 손짓했다. 복상은 그를 따라 일어서며 웃었다.
‘이 바보야. 때 묻지 않은 모습은 좋다만 너를 보면 마음 졸여서 힘들다. 에이. 그래 뭐 어때! 네가 더럽혀 질 것 내가 다 대신 더럽혀져주마. 너는 순수하게 네가 추구하는 길을 가라. 그리고 강해져라.’
유세운 십삼 년 만에 강호에 다시 나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