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하아~”
유세운은 가부좌를 튼 자세로 앉아 있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력은 이틀 전 사부가 만들어준 십년의 내력보다 배는 되는 것 같았지만 아직 내면의 우주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유세운은 결국 고개를 들고 은태정을 쳐다보았다.
“사부님. 제자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냐?”
정중하게 물어오는 유세운을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은태정이 대뜸 물었다. 유세운은 결국 주저하면서 물었다.
“아무리 명상을 해도 잡생각이 많이 납니다. 그리고 뭔가 실마리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은태정은 유세운의 말에 기분이 좋은 듯 미소를 지었다.
“그래?”
유세운은 은태정의 미소를 보며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저기 사부님?”
“내가 너에게 잡생각이 나지 않도록 해주마.”
유세운은 왠지 계속 불길하게 느껴지는 감정을 추스르려 했지만 그것이 쉽지가 않았다. 유세운이 주저하고 있자 은태정은 가볍게 손짓을 했다. 유세운은 자신을 옭아매는 은태정의 진기를 느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부님 왜 그러십니까?”
“너에게 적임인 장소를 내가 물색해 놓았느니라.”
은태정은 가볍게 몸을 날렸고 유세운은 그의 진기에 속박된 채로 끌려갔다. 유세운은 십장 높이에서 떨어져 내리는 폭포수로 몸을 날리는 은태정의 뒷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폭포에는 왜?”
“저기가 바로 네가 수련할 장소이니라.”
“엑?”
유세운의 비명에 찬 목소리를 들으며 은태정은 가볍게 일장을 날렸다. 은태정의 일장에 폭포수가 갈라지며 그 밑에 넓은 바위가 있는 것이 보였다. 은태정은 유세운을 그곳으로 집어 던져놓으며 웃음 지었다.
“폭포의 물줄기를 등으로 받으면 너의 전신혈맥도 부드러워 질 것이고 잡념도 사라질 것이다.”
유세운은 자신의 등으로 쏟아져 내리는 폭포의 압력에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켁! 여기서 어떻게 가부좌를 틀라는 말이에요! 어푸!”
“그래? 가부좌는 틀게 해주마.”
은태정이 가볍게 손을 내젓자. 폭포수가 거짓말처럼 좌우로 갈라지며 쏟아져 내렸다. 유세운이 어이없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을 보며 은태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이 아니면 가부좌를 틀 시간조차 없을 텐데?”
“엑! 잠깐만요.”
유세운은 다급하게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유세운이 가부좌를 튼 것을 본 은태정은 자신의 진기를 거두었다. 유세운은 자신의 등으로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에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유세운의 귀로 은태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하는 거냐! 무상진기를 운용 하거라.”
“으윽! 알고 있다고요.”
유세운은 얄밉게 말하는 은태정을 바라보려고 했지만 자신의 등에 부딪쳐 튀어나온 물방울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유세운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일단 가부좌는 틀고 앉았지만 자신의 등으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의 압력은 전혀 줄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세운은 천천히 진기를 운용했다.
콰콰콰콰-
은태정은 손에 사과를 하나 든 채 한입베어 물며 발로 물장구를 쳤다. 벌써 유세운에게 내력 수련을 시킨지 일년이 넘어갔다. 아직 무상진기의 요체를 완전히 터득은 못했지만 이제는 제법 폭포수 밑에서 견뎌내고 있었다. 은태정은 폭포수에서 뛰어 연못에 들어가는 유세운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자신을 향해 물살을 가르며 다가오는 유세운을 바라보던 은태정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 오거라.”
“에? 갑자기 왜 그러세요?”
“따라오라면 따라올 것이지 무슨 잔말이 그렇게 많으냐.”
“예.”
유세운은 젖은 몸을 가볍게 손으로 털어내고는 은태정의 뒤를 따라갔다. 은태정은 목옥 근처 바위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아직 너만의 우주를 느끼지 못했느냐?”
“예. 보일 듯 보일 듯 보이지 않습니다.”
은태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주란 자연의 모든 삼라만상(森羅萬象)을 느끼고 내 안에 있는 것을 느끼라는 거다. 그러려면 일단 주위 모든 사물을 느끼고 그리고 네 안에 머물러 있는 너만의 우주와 공명시켜보도록 해라.”
“예.”
결국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소리만 잔뜩 했지만 그래도 일 년 만에 실마리가 주어진 것에 안도하며 다시 명상에 잠겼다.
육감을 수련할 때 주위의 사물을 익히는 수련은 했기 때문에 별로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주변의 모든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먼저 육감으로 모든 것이 인지되었다. 주변에 있는 폭포나 나무 그리고 땅과 연못들이 느껴졌다. 그리고 피부에 와 닿는 바람 한줄기가 가슴에 스며들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육감뿐만 아니라 귀로도 주변의 상황이 들려왔다. 폭포수의 커다란 소리와 그 사이에 들려오는 벌레들의 소리 새소리 등이 들려왔다. 그리고 코로는 풀 냄새와 연못에서 나는 싱그러운 냄새들이 맡아졌다. 눈을 감고 있지만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욱 주변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아니 느낄 수 있었다.
주변을 느끼기 시작하자 천천히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았다. 온통 어둡기만 했지만 조금씩 적응이 되기 시작했다. 뚫어지게 어둠을 바라보고 있자 어둠은 점점 크기를 확장해 가기 시작했다. 어둠은 겉잡을 수 없이 커지더니 금세 자신을 집어 삼켰다. 갑작스레 발 디딜 곳도 없이 어둠으로만 둘러싸인 곳에 집어 던져진 것만 같아 중심조차 잡지 못했다. 허둥대고 있는 사이 사부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그곳은 무엇이든지 네가 바라는 대로 되는 곳이다. 당황하지 말고 네 안의 우주와 동화 되어라.)
어떻게 들려왔는지도 몰랐지만 사부의 말대로 마음을 편안히 먹었다. 서서히 어둠은 자신의 몸을 뒤덮기 시작했다. 점차 자신의 몸과 어둠의 구분이 엷어지기 시작했다. 어디가 어둠이고 어디가 자신의 몸인지 구분이 가지 않기 시작하자 조금은 당황스러웠지만 사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가만히 그 순간을 즐겼다. 점점 자신의 몸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입가에 가는 미소를 지었지만 자신의 몸이 모두 어둠에 휩싸이는 순간 전율했다.
믿을 수 없는 쾌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하나가 되는 순간에 자신의 모든 감각이 무한히 확장되는 것이 느껴졌다. 비록 자신의 손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무엇이라도 움켜쥘 수 있을 것만 같았고 자신의 발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한걸음에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문득 자신의 내부에 남아있던 사부가 남겨준 진기가 떠올랐다.
‘아! 지금 이대로라면…’
생각이 미치자 어둠의 사방에서 빛줄기처럼 기운들이 생겨났다. 빛줄기들은 긴 꼬리를 그리며 자신에게로 모여들었다. 그리고는 하나의 기운이 되어 점점 크기를 확장해가기 시작했다. 끝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밝히려는 듯 퍼져나가는 빛에 눈이 부셔왔다.
유세운의 상황을 지켜보던 은태정은 당혹스러웠다. 명상에 잠기고 대략 이 각 만에 자신의 우주를 바라본 듯 흠칫 몸을 떠는 것을 본 은태정은 다급히 의기전성(意氣轉聲)을 펼쳐 유세운을 안정시켰다. 잠시였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은 듯이 보였다.
‘허허. 이렇게 갑작스레 이런 순간이 다가오다니 이녀석 정말 운이 좋은 놈이군.’
하지만 놀라움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약 반 시진 정도를 무아지경에 빠져들더니 서서히 전신에서 은빛의 광채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허허. 진기를 모으는 것인가?”
금세 은빛의 광채는 유세운의 전신을 뒤덮더니 서서히 그의 몸을 휘감더니 일 각 후에 모두 그의 전신모공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유세운의 눈이 떠졌다. 세상 모든 것을 꿰뚫을 듯한 안광이 번쩍였다. 그리고는 유세운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빠악!
“악!”
“이게 어디서 사부 앞에서 눈을 부라리고 지랄이야! 죽고 싶어!”
자신의 머리에 난 혹을 움켜쥐고 인상을 구기는 유세운을 바라보며 은태정이 미소 지었다.
“솔직히 의외구나. 그래 상태는 어떠냐?”
유세운은 자신의 혹을 어루만지며 속으로 욕을 했다.
‘이씨. 분명히 뭔가 달라졌을 줄 알았는데? 맞으니 똑같이 아픈걸…’
“사부님이 전해주신 진기를 모두 저의 것으로 만든 것 같습니다.”
“그래?”
은태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명상은 멈추지 마라. 처음으로 네가 너의 우주와 일치감을 느꼈지만 앞으로는 그런 일이 항상 있어야 하니까 자만하지 말고 항시 명상을 하거라.”
“예.”
은태정은 어깨근육을 풀며 앞장섰다.
“따라오너라. 이제부터 본문의 가장 기본이 되는 기본기(基本技)를 가르쳐주마.”
“예.”
유세운은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깜짝 놀랐다. 전신에 충만한 기운이 하늘이라도 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온몸에 느껴지는 기운을 만끽하며 걸음을 옮겨 사부의 뒤를 따랐다. 은태정은 공터 가장자리에 있는 나무 아래로 갔다. 나무는 어른 장정 한사람이 간신히 두를 수 있을 정도의 두께를 가진 나무였다. 은태정은 나무에 한손을 짚으며 말했다.
“잘 들어라. 일단 우리 광오문에서는 대부분의 내력을 와선형(渦旋形)으로 발출(發出)한다. 와선으로 내뿜어진 기는 훨씬 강한 파괴력을 가지게 되지.”
“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세운을 보며 은태정은 고개를 내저었다.
“흠. 그러니까 기를 그냥 발출하는 것이 아니라 내기를 내뿜는 순간 회전(回轉)을 주는 것이지.”
“흠.”
“기본기로 일단 어깨로 받는 것부터 연습 하거라. 먼저 한 수 보여주마.”
“예.”
유세운은 대답을 하면서도 속으로 욕을 하고 있었다.
‘회전을 줘? 아직 진기 발출법도 안 가르쳐주고선? 그리고 저렇게 두꺼운 나무에 어깨로 받아봤자 잘해야 흔적이나 남기면 다행이지.’
유세운이 속으로 한참을 욕하고 있을 때 은태정은 아무렇지 않게 나무를 어깨로 들이 받았다.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소리가 났다.
푸-콰--콱!
“엥?”
어이없는 소리에 놀라 돌아본 유세운은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은태정의 어깨에 부딪친 부분의 나무가 회전력에 의해 뜯겨져 나가서 나무가 뒤로 넘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쿠---웅!
나무가 넘어가며 먼지를 일으켜 유세운은 호흡을 멈추며 인상을 찌푸렸다.
“꿈은 아닌 것 같은데?”
“꿈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은태정은 가볍게 일침을 가하고는 유세운의 어깨에 한 손을 짚으며 말했다.
“저기 그 옆에 나무 보이냐?”
“예.”
비슷한 굵기의 나무를 가리키는 은태정의 손가락을 향해 저주를 퍼부으며 유세운은 대답했다.
“잘 알겠지? 저 나무를 똑같은 형태로 쓰러트리는 것이 기본기이니라. 넘어뜨리기 전까진 밥도 먹을 생각 하지 말거라.”
“에~?”
유세운의 얼굴이 순간 확 일그러졌고 은태정은 여유 있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못하면 밥은 물론이고 잠도 못 잔다.”
“마…말도 안돼요! 잠도 못 자다니…”
“무슨 소리하는 거냐? 넘어뜨리기만 하면 된다니까.”
은태정은 가볍게 핀잔을 하며 어깨를 두들겼다.
“그럼 오늘 저녁에는 멧돼지나 잡아다가 먹을까나?”
“에? 멧돼지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계속 먹으면 질리기 마련인지라 물고기에 질리고 있는 판에 멧돼지 구이라니 절로 침이 삼켜졌다. 은태정은 그런 유세운을 향해 가벼운 미소만 띄우고 바라보았다.
“쳇! 두고 봐요. 저도 반드시 멧돼지구이를 먹어 드릴 테니까요.”
“그러려무나.”
은태정은 가볍게 발을 굴려 허공으로 몸을 띄워 올리고서는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아~ 이걸 무슨 수로 멧돼지구이가 다되기 전에 쓰러뜨리지?”
무상진기를 익히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