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대륙의 남쪽에 위치한 광동성(廣東城).
광동성의 수도인 광주(廣州)의 동북쪽에 위치한 백운산(白雲山) 전체를 뒤덮는 성채가 있었다. 산 하나를 둘러쌓은 성채의 위용은 보는 이들이 혀를 내두르게 할만했다.
백운산을 오르는 길목에 위치한 대문의 높이만 오장에 달했다. 그리고 그 위에 길이만 삼장에 달하는 편액이 걸려있었다. 편액에는 웅혼한 필체로 ‘철마성’이라 쓰여 있었다.
철마성(鐵魔城)
당금 강호에 이 이름을 모르는 인물은 없을 터였다.
감숙성(甘肅城)에 자리 잡고 있는 수라성(修羅城)과 함께 마인들의 본거지로 이름이 높았다. 더욱이 현 철마성주인 철마멸뢰(鐵魔滅雷) 독고황은 전 강호를 통틀어도 적수가 손에 꼽힐 만큼 극강한 마인이었다.
철마성의 태상각(太上閣)
전대 철마성주인 태상성주(太上城主) 철마풍(鐵魔風) 독고청.
올해로 팔십이 된 독고청은 청아한 풍채의 노인이었다. 그의 눈에서는 한점의 마기도 찾아 볼 수 없었고 그의 기도 또한 유순하기 짝이 없었다. 독고청은 자신의 취미인 난을 가꾸고 있었다. 정성스레 물을 주고 있는 그의 모습은 전 마도인들이 우러러보는 철마성의 태상성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독고청은 자신의 새하얀 눈썹을 꿈틀거렸다.
“허허. 누군가?”
소탈한 웃음을 터트리며 독고청은 물을 주던 손을 멈추었다. 허리를 펴고 일어서는 그에게서는 극강한 기운이 서서히 일기 시작했다. 천천히 돌아선 독고청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죽립인을 볼 수 있었다.
“허허. 어떻게 이곳까지 들 수 있었나?”
죽립인은 가볍게 읍을 했다.
“철마성의 태상성주이신 철마풍 독고대협이십니까?”
순간 독고청의 눈에서 마주보기 힘들 정도의 강렬한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내가 독고청이네만 자네가 누군지는 아직 밝히지 않았군.”
죽립인은 태연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과연 명불허전이시군요. 저는 비풍십이검(飛風十二劍)의 셋째입니다.”
독고청은 자신을 비풍십이검의 삼검이라 소개한 사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풍기는 기운이 잘 느껴지지 않았지만 육감은 절대적으로 그자의 위험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허허. 자네 나이도 그리 많아 보이지 않네만 실력이 보통이 아니군?”
“감사합니다.”
독고청은 자신의 처소까지 밝은 대낮에 소리 없이 방문한 불청객을 빤히 바라보았다. 독고청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래. 무슨 일인가?”
독고청의 물음에 죽립인은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딴청을 피는 자를 향해 일갈을 터트리려는 찰나 죽립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주변에 흩어져 있는 다섯 명의 흔적은 믿을 만한 자들 입니까?”
“흐음.”
단번에 자신의 호위들인 철마오령(鐵魔五靈)의 흔적을 알아채는 것으로 보아 결코 자신의 아래로는 보이지 않았다. 독고청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만한 자들이지. 아직까지 노부의 곁에서 단 한 순간도 떨어져 있던 적이 없던 자들이니.”
죽립인은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군요. 그런데 얘기가 조금 길 것 같습니다만…”
독고청은 죽립인의 말에 자신의 머리를 두들겼다.
“허허. 이래서 늙으면 죽어야 한다니까…이리와 앉게나.”
독고청은 죽립인에게 자리에 앉으라 말하고는 조용히 차를 타기 시작했다. 죽립인은 자리에 앉은 채로 죽립을 고쳐썼다. 독고청은 차가 끓자 차 주전자와 찻잔을 들고 탁자로 다가왔다. 찻잔에 차를 따라서 조용히 죽립인을 향해 밀어냈다. 찻잔은 아주 천천히 죽립인을 향해 날아갔다. 죽립인의 입가에 가는 미소가 지어졌다. 비웃음 같기도 한 웃음은 자신의 앞까지 날아온 찻잔을 잡음으로써 사라졌다. 찻잔에 담긴 경력은 대단해서 어쩔 수 없이 어깨를 흔들어 경력을 풀어 헤쳤다. 한차례 어깨의 흔들림 만으로 자신의 칠성의 공력을 받아내는 것을 본 독고청의 안색이 침중하게 굳어졌다.
‘저자는 분명 열두 명으로 이루어진 자들 중 셋째라고 했거늘. 저리 태연히 내 칠성의 공력을 받아 내다니… 저자의 정체는 대체 뭐지? 그리고 저들의 문파는 어디지?’
독고청은 심중의 뜻을 하나도 내비치지 않고 태연하게 자신의 찻잔에도 차를 따라 죽립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죽립인은 입가에 쓴 웃음을 지었다.
‘흐음. 제법이군. 실력을 보여 줬음에도 조급하게 나서지 않는다는 말인가?’
독고청은 자신의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물었다.
“어떻나? 힘들게 구한 용정차인데.”
독고청의 태연한 물음에 죽립인은 침음을 삼키고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깊고도 부드러운 향이 입안을 감싸 안자 저도 모르게 한마디 했다.
“하. 극상품의 용정차로군요?”
“허허허. 자네 차 맛을 좀 아는군.”
죽립인은 찻잔을 내려놓고는 독고청을 쏘아보았다. 그의 눈에서 마치 파도와 같은 거센 기세를 읽은 독고청은 입가에 가는 미소를 지으며 마주 보았다. 한참을 쏘아보던 죽립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꺼냈다.
“저희가 도와 드릴 테니 강남무림을 석권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태연하게 꺼내는 말치고는 허황된 말이라 독고청의 안색은 처음으로 미미한 변화를 보였다. 독고청은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자네의 세력이 어떠한 줄 알고 그리고 무엇을 믿고 강남무림재패를 꿈꾸라는 건가?”
죽립인은 자신 또한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강자 특유의 기운을 맘껏 뿌려대고 있는 죽립인을 보며 독고청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나에게…아니 우리 철마성에게 무엇을 바라는가?”
독고청의 물음에 죽립인은 말없이 차를 마시는 것으로 대답했다. 독고청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자네 너무 자신을 과신하는 것 아닌가? 들어오기는 쉬웠지만 나가기도 쉬우리라고는 말 못해주겠네만…”
“하하. 물론 그렇겠지요. 하지만 태상성주님께서 그렇게 만들지는 않으실 겁니다.”
“무슨 뜻이지?”
독고청의 물음에 찻잔을 내려놓은 죽립인의 말이 이어졌다.
“제가 아니 저희가 태상성주님의 꿈을 이루어 드리지요. 그러니 강남무림을 재패 해주십시오.”
“나의 꿈?”
독고청의 물음에 죽립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태상성주님이 꿈에 바라마지 않던 것을 제가 드리지요.”
“나의 꿈이라…”
독고청은 남들이 알고 있을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알 수가 없었다. 잠시 고민을 하던 독고청이 눈을 들어 바라보자 죽립인은 다시 차를 마시며 대답했다.
“태상성주님의 꿈이라고 하니 조금 추상적일지도 모르겠군요. 전 무림인들의 꿈이라고 하면 될까요?”
“전 무림인의 꿈?”
“예. 누구라도 오시할 수 있는 강한 힘. 그것을 드리지요.”
“뭐? 뭐라? 허허허.”
독고청은 자신의 앞에서 말하는 죽립인의 말에 웃음만이 터져 나왔다. 이미 모든 마도인들이 꿈꾸어 마지않는 극마(克魔)의 경지에 접어든 자신에게 더욱 강한 힘을 주겠다고 말하는 죽립인이 우습기만 했다. 물론 자신보다 더 뛰어난 경지는 존재했다. 심검(心劍)의 경지라든가 전설상으로만 전해져 오는 광검(光劍)의 경지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당금 무림에 그 정도의 고수가 나타난 지는 이미 몇 백 년이 지난 얘기였다. 하지만 그 생각은 계속해서 이어지지 못했다.
“저는 이미 심검의 경지에 들었습니다.”
“뭐?”
아무리 자신이 딴 생각을 했다지만 이건 분명히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아직 자신도 과연 그런 경지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가끔씩 드는 경지를 자신의 앞에 있는 죽립인이 벌써 들었다고 했다. 많이 보아줘야 오십이나 되었을 정도의 중년인인 죽립인은 죽었다 깨어도 들 수 없을 거라 생각됐다. 독고청이 웃음을 지었다.
“자네 생각보다 농이 심하군.”
“하하하. 아무리 제가 겁이 없기로서니 감히 태상성주님 앞에서 그럴 수 있겠습니까?”
독고청은 자신의 전신에서 극마의 경지에 들어선 기운을 줄기줄기 뽑아내기 시작했다.
“아니라면 증명해 보이게.”
죽립인은 그런 그를 태연히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좋습니다. 그게 서로의 의견의 합일을 위해서라도 좋을 것 같군요.”
죽립인 또한 앉은 자세에서 자신의 기운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독고청의 노안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죽립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옥(玉)빛을 내며 유형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천천히 뿜어져 나오는 유형의 기운은 자신에게 닿는 모든 것을 소리도 없이 파괴하고 있었다. 죽립인의 앞쪽 탁자가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을 보던 독고청은 침음을 삼키며 기운을 죽였다. 죽립인도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기운을 죽였다. 죽립인의 입가에 승자의 미소가 걸렸다.
“이제는 믿어 주시겠습니까?”
독고청은 한순간에 몇 년은 늙은 듯한 표정으로 의자에 등을 파묻었다.
“그래 믿겠네. 자네가 거의 전설이 되어가는 심검의 경지에 든 것을 축하하네.”
“아닙니다. 이건 저만의 경지가 아니라 태상성주님께서도 충분히 오를 수 있는 경지입니다.”
“그…그런가?”
모든 무림인의 꿈이라고 했다. 강한 힘. 누구라도 오시할 수 있는 그런 경지인 심검에 드는 것이라면 철마성을 통째로 내줘도 아까울 것이 없는 것이었다. 자신이 심검의 경지에 들기만 한다면 이정도 성은 언제라도 다시 만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독고청은 이제는 잊었다고 생각했던 젊은 시절의 혈기가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좋네. 내가 강남무림을 재패해주겠네.”
“감사합니다.”
독고청은 의구심이 들어 죽립인을 보며 물었다.
“하지만 강남무림 재패가 자네에게 무슨 이득이 되는 것인가?”
죽립인은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단지 저는 위의 명령을 따르는 것일 뿐이니까요.”
죽립인의 말에 독고청의 안색이 침중하게 굳어졌다.
‘누가 있어 심검의 경지에 든 자를 수하로 부린단 말인가? 그렇다면 나 또한 심검에 들어도 그 자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잠시 죽립인을 쏘아보던 독고청은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좋아. 이번 일은 수락하마. 어차피 강남무림 재패 또한 철마성의 목표이니…그리고 내가 너희 주인을 능가해주마. 감히 나를 우습게 안 것에 대해 확실히 응징해주지.’
독고청은 마음속으로 다짐하고는 죽립인을 향해 미소 지었다.
“알겠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일단 나는 그 뜻을 내 아들 놈에게 전해 주겠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의 얘기는 비밀로 해주십시오.”
“물론이지. 걱정말게.”
독고청은 웃으며 죽립인에게 말을 했고 죽립인 또한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바보 같은 늙은이. 네 속을 모를 줄 아느냐? 하지만 네가 아무리 용을 써도 도주님에게는 도달 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구나.’
독고청과 죽립인은 서로 미소 지으며 속으로 비웃었다. 둘은 태연히 찻잔을 들어 용정차의 깊고 부드러운 향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독고청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허공을 향해 입을 열었다.
“성주에게 내가 할말이 있다고 전해라.”
“존명.”
철마오령중 하나의 인기척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 죽립인의 입가의 미소가 진해졌다.
‘어차피 너희는 모두 없어져야 될 인물들 서로 힘을 소진하는 것이 좋겠지.’
육감을 깨닫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