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유세운은 머리와 허리를 짚고서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이것은 너무했다. 이렇게 극심한 통증이 느껴지다니 마치 진짜인 것만 같아 자신의 볼을 힘껏 꼬집었다.
“아악!”
유세운이 하는 짓을 가만히 바라보던 소년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너 설마 지금 꿈꾸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빌어먹을! 당연한 것 아냐! 너같이 어린 꼬마에게 두들겨 맞는 꿈이라니. 아주 개꿈이야! 젠장.”
“허허. 이것 참. 어쩔 수 없나?”
“뭘 어쩔 수 없다는 거…”
빠악!
휘리릭!
퍼억!
“쓰읍!”
앙다문 입술 사이로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유세운은 눈을 들어 소년을 쏘아 보았다. 소년은 그런 그를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하하하.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되긴 뭐가 되!”
“안 그래도 요즈음 밥해먹기 귀찮았는데 앞으로 네가 다 맡아 해라.”
소년의 말에 유세운의 눈썹이 역팔자로 올라갔다.
“뭐야!? 안 그래도 집에서 잠만 자고 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밥을 하라고?”
“그래.”
“하하. 이 어린 것이 어디서 버릇없이!”
주먹을 들어올리는 유세운을 바라보며 소년은 자신의 턱을 슬며시 쓰다듬었다.
“너 바보냐?”
“뭐?”
“몇 대 맞고도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을 보니 완전히 바보인가 보군. 하긴 그쪽이 부려먹는 입장에선 편하니 좋지만…”
“헛소리!”
소년은 은빛의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런데 언제까지 반말을 계속 해 댈 거냐? 상당히 귀에 거슬리는군.”
“아니 이런! 너는 집에서 어른을 공경하라는 말도 못 배웠어?”
소년은 역성을 내는 유세운을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훗. 어이가 없군.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고 지레짐작 하지 마라.”
소년의 말에 유세운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 위지평처럼 엄청난 동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바라보았지만 피부나 생김새로 보았을 때 결코 그렇지 않았다.
“헛소리! 너 지금 사실 나이보다 훨씬 동안이라 나보다 나이가 많다는 듯이 얘기하려 하는 거지?”
소년은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찼다.
“네놈 생각하는 수준이 고작 그 정도냐? 말해두는데 내 나이는 백오십 이후로는 세지 않아서 모른다.”
“하?”
소년의 말에 유세운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금세 눈썹에 다시 역팔자가 그려졌다.
“이게 사람을 치고서 우스개 소리한다고 봐줄 줄 알아!?”
“더 이상 때리면 골병들어 못 부려 먹을까봐 봐주는 거야. 시끄러우니 조용해라. 가자.”
유세운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던지 이를 갈며 검을 뽑아들었다.
“헛소리 하지 마. 너같이 어린 꼬마가 무슨…어? 어어?”
유세운은 갑자기 자신의 몸이 떠오르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버둥거렸다. 잠시 버둥거리는 유세운을 바라보던 소년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 좀 믿겠냐? 허공섭물(虛空攝物)이다. 최소 이 갑자(二 甲子)의 내공(內功)이 필요한거지…자식이 반노환동(反老換童)한지가 벌써 반 갑자 전 인 것 같은데…따라와라.”
“뭐…뭐야?”
유세운이 어이없어 소리치는 것을 무시한 소년 아니 노인이 몸을 날렸다. 노인의 몸을 따라 유세운은 그의 진기에 이끌려 같이 날아갔다. 높이가 삼장이나 달하는 나무위로 가볍게 뛰어 오른 노인은 가볍게 나뭇가지를 밟고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노인의 기에 묶여있는 유세운도 정신없이 그를 따라 아니 끌려갔다. 자신을 데리고도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달려가는 노인의 모습을 보던 유세운은 가볍게 혀를 차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동안 너무 피곤했던 거야. 하하.’
하지만 금세 자신에게 불어오던 바람이 잦아들자 조용히 눈을 떴다.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십장 높이의 폭포수였다. 밤에 은은히 뿌려지는 달빛을 받아 신비한 빛을 내는 폭포를 보여 유세운은 감탄했다.
‘멋진 곳이군.’
꽈당!
갑자기 자신을 속박하던 기운이 없어져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유세운은 인상을 확 구겼다.
“아니 왜 갑자기 떨어트리고 그래…요.”
아무리 생각하고 꿈이라고는 해도 이제는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그것도 아주 상당히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듯 유세운은 조심스레 말을 끝맺었다. 소년 아니 노인은 자신의 등 뒤로 보이는 목옥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흠 잘 들어라. 넌 앞으로 여기서 살면서 빨래와 식사. 그리고 청소를 담당 할 것이다.”
온통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것만 골라 주워 담는 노인의 말에 유세운은 금세 이성을 잃었다.
“헛소리 하지마! 이 꼬…아니 노인네야!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들만 당연하다는 듯이 꼽다니…그리고 나는 지금 무공수련을 하러가는 길이란 말야!”
“그래? 허. 그것 참. 그래서 어쩌라고?”
노인은 가볍게 그런데 어쩌라는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유세운을 바라보았다. 유세운은 어이가 없어서 다시 소리를 질렀다.
“이…당신이 뭔데 내 인생을 이렇게 휘저어 놓겠다는 거야!”
노인은 심각하게 고민하더니 아무리 생각해도 손해라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휴~어쩔 수 없군. 좋아. 그러면 이렇게 하도록 하자.”
노인의 말에 유세운은 잔뜩 기대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노인은 입맛을 다시며 말을 이었다.
“좋아. 내가 천하제일…아니 고금제일무공(古今第一武功)을 가르쳐 주마. 그러니 내가 얘기한 일들을 해라.”
“싫어! 죽어도 못해!”
자신을 보내 줄줄 알았던 유세운은 다시 한번 배짱을 부렸다. 노인은 씁쓸히 웃었다.
“쩝. 말로 해선 안 되는군.”
빠악!
휘리릭!
풍덩!
노인은 순간 자리에서 없어 졌다가 유세운의 바로 앞에 나타나 주먹을 휘둘렀다. 다시 한번 맞은 곳을 또 맞은 유세운은 허공을 선회하며 옆의 폭포 밑에 형성된 연못에 빠졌다. 유세운은 다급히 손을 휘저으며 소리쳤다.
“어푸! 나 난 수영을 못한단 말이얏!”
“그래?”
노인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진기로 유세운의 몸을 들어올렸다. 유세운이 허공에 떠서 물 밖으로 나오자 노인이 다시 물었다.
“그럼 아까 말한 것들을 할 테냐?”
“싫어!”
풍덩!
노인은 유세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진기를 풀어 다시 연못에 빠트렸다. 유세운은 이번에도 미친 듯이 손을 휘저었다.
“어푸! 어푸!”
“어때? 맘이 바뀌면 말해…그리고 말투도 바꾸고 말이야.”
“커흑! 어푸! 에이 씨! 어푸. 알…알았어……요. 켁켁! 살려줘요!”
“훗. 진작에 그럴 것이지 귀찮게…”
다시 한번 노인의 진기가 유세운을 들어올려 목옥 앞의 땅위에 사뿐히 내려놓았다. 유세운은 눈물을 글썽이며 기침을 하다가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바닥에 드러눕자 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들에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다.
“제기랄.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유세운은 곧 자신의 시야를 가리는 은발의 소년 아니 노인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머리 위에서 유세운을 내려다보던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흠. 일어나서 구배지례(九拜之禮)를 올리도록 해라. 그래도 명색이 무공을 가르쳐 주기로 했으니 제자로 맞아주마.”
“켁! 됐어요. 숨차 죽겠는데…아휴”
“그래? 아직 마신 물이 좀 적었나 보구나. 이번에는 거꾸로 쳐 박아서 진기로 눌러 볼까?”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무시한 말을 하는 노인을 바라보던 유세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보면 볼수록 저 통통한 볼은 귀여운 게 아니라 심술보 같았다.
‘얄미운 노인네 같으니라고. 쳇!’
하지만 시선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노인을 보고 유세운은 시선을 피하기 위해 천천히 아홉 번의 절을 했다. 노인이 흐뭇하게 웃으며 자기 자랑을 시작했다.
“후후. 잘 들어라. 내 이름은 은태정이다. 팔각연환권(八角連換拳)의 창시자이자 백 년 전 무림의 최고수(最高手)였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겠지만…지금은 더 이상 오를 경지가 없어 있던 무공들의 단점을 보완하며 놀고 있다.”
“하하. 예~”
유세운은 속으로 마구 욕을 해댔다.
‘어이구. 백 년 전 무림제일고수라고? 참 내. 어이가 없군.’
하지만 그런 유세운의 속을 모르는 은태정은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내 마지막 소원이라면 고금제일무공이라 불리는 천륜광검(天輪光劍)과 천마광휘(天魔光揮)와 내 무공을 겨루어 보는 것이지. 하지만 다 천 년 전의 무공이라서 영 꿈이다 싶구나.”
유세운은 갑자기 노인네 티를 내는 은태정을 아니꼽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그가 고개를 돌리자 감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 그러셨군요.”
“흠. 그래. 그러니 영광으로 알고 열심히 일하고 무공을 배우거라.”
유독 열심히 일하라는 부분을 강조하는 은태정을 보며 유세운은 고개를 숙이며 표정을 숨겼다.
“예. 잘 알겠습니다.”
은태정은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나중에 무림에 나가면 천륜광검과 천마광휘를 찾아 겨루어 보거라.”
“예.”
은태정은 고개를 숙여 유세운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래. 오늘은 힘들었을 테니 그만 들어가서 쉬어라.”
“예.”
광오문에 들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