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강호에 나가자마자 겪은 일들.”
다가닥. 다가닥.
넓은 대로 위를 흑마를 타고 천천히 걸어가던 유세운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자신의 안장 옆에 매달아 놓은 유주란이 챙겨준 꾸러미와 아버지가 주신 검 한 자루가 달랑 놓여 있었다. 유세운은 될 수 있는 한 말을 천천히 몰며 중얼 거렸다.
“최대한 늦게 가야만 해. 빨리 가면 빨리 갈수록 맞을 매만 느는 거야. 그래 나는 최대한 늦게 가야만 해.”
마치 자신에게 최면을 걸듯이 중얼거리며 말을 몰아가는 유세운의 안색은 창백하기만 했다. 결국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 유세운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휴~이제 당분간 아버지도 형도 누나도 못 보는구나…”
침울한 표정을 짓던 유세운은 멀리 보이는 마을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고개를 내젓던 유세운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쩐지 배가 고프다 했어. 너무 천천히 오느라 시간이 이렇게 늦었군.”
유세운은 흑마의 옆구리를 차며 외쳤다.
“좋아 오늘은 아예 저기서 하루 묵어가는 거야. 이랴!”
왜 이 생각을 빨리 하지 못했을 까라는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말이 달리기 시작하자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겼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는 유세운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렸다.
“이렇게 달려보는 것도 좋은데. 이랴!”
질주하는 말위에서 바람을 느끼며 마을에 도착한 유세운은 약간은 상기된 표정으로 마을을 둘러보았다. 그리 크지 않은 마을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낙화루(洛花樓)라는 주점이었다. 유세운은 그리로 말을 몰고 가 주점 앞에 세웠다. 유세운이 말에서 내리자 짧은 콧수염의 점소이가 다가와 말고삐를 넘겨 받아들고 사라졌다. 유세운은 천천히 말안장에서 내린 검을 허리에 차고 주점 안으로 들어갔다. 주점 안으로 들어가자 귀엽게 생긴 점소이 하나가 달려왔다. 점소이는 유세운을 바라보고는 그의 뒤를 한번 바라보았다. 유세운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뭘 찾아?”
“아! 일행분이 어디계신가 하고 봤습니다.”
유세운은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나 혼자 왔어.”
점소이는 유세운의 말에 당황해하더니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쇼.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잠자리를 봐 드릴까요?”
유세운은 점소이의 말에 잠시 생각해 보는 듯 하더니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묵고 가야겠군. 방 하나 잡아주고 일단 밥부터 먹을 테니 그렇게 알게.”
점소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장섰다.
“일단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공자님 창가면 어떻겠습니까?”
“창가라 좋아. 가지.”
앞장선 점소이를 따라가며 유세운은 자신의 신세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품속에 있는 돈주머니를 만졌다. 아버지가 주신 여비와 형이 따로 준 여비가 있어 충분하게 즐기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점소이의 안내에 따라 이층의 창가에 자리를 잡은 유세운은 흐뭇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간단한 요깃거리 좀 챙겨오게.”
“예.”
점소이는 고개를 숙이고는 사라졌고 유세운은 자신의 어른스런 말투에 빙긋이 미소 지었다. 유세운은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열두 개의 탁자 중에 자신을 포함해 네 개의 탁자만이 차 있었다.
왼쪽 탁자에는 열다섯 정도 되어 보이는 청년과 열한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가 이야기 하며 밥을 먹고 있었다. 푸른 청의에 한 자루 검을 어깨에 메고 있는 것을 보아 둘 다 무림인인 것 같았다. 특히 청년은 앉아 있는 자세나 풍기는 느낌으로 보아 실력이 녹록치 않아 보였다. 물론 아버지보다는 못해보였지만 느낌만으로도 명문의 제자 같아보였다. 그리고 소녀는 아주 귀엽게 생겼다. 특히나 커다란 눈망울이 인상적인 아이였다.
오른쪽에는 한 노인이 앉아서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안광이 강렬하고 짧게 기른 턱수염이 무언가 한가락 하는 자 같았다. 척 보기에도 쉬워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만큼은 모르지만 형보다는 훨씬 윗줄인 것 같았다. 그가 천천히 마시는 술을 보며 유세운은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내 나이 열둘. 이제 술을 먹어볼 나이도 되지 않았나?’
유세운은 점소이가 음식을 가져오면 술도 한번 시켜 봐야겠다는 생각을 몰래하며 혼자 속으로 웃음 지었다.
그리고 정면에는 두 명의 상인차림의 사내들이 앉아 술을 마시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유세운은 그들의 이야기에 슬며시 귀를 기울였다.
“흐흐흐. 그러니까 말이야. 그날 밤 앵앵이와…”
“그래? 하긴 앵앵이가 엉덩이 하나는 일품이지.”
잠시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던 유세운은 가볍게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리다가 청의의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자신처럼 주위를 둘러보던 소녀와 눈이 마주치자 괜히 상인들의 이야기가 생각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러고보니 세상에는 기루라는 곳도 있었군. 나중에 한번 가봐야지. 에이 그런데 왜 그런 얘기를 해가지고서는…쓰읍.’
가볍게 속으로 투정을 부리며 시선을 돌려 상인들을 쏘아보던 유세운은 슬며시 다시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가 크고 예쁜 눈을 들어 아직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유세운은 슬며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어제 누나가 해주던 말이 생각났다.
-매사에 조심해라. 아차, 하는 순간에 죽을 수도 있으니까.
‘큰일 날 뻔했군. 그래. 어려 보여도 무림인인데. 괜히 눈 마주쳤다가 죽을 지도 몰라.’
혼자 긴장한 유세운은 괜히 애꿎은 탁자에 천천히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나 그리고 있었다. 그때 주점의 일층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이층 창가에 자리가 없다고? 죽고 싶은 거냐? 어디 내가 왔는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워낙 큰 목소리로 떠드니 이층까지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세운은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과 오른쪽의 노인 그리고 좌측의 청년과 소녀의 자리가 모두 창가에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가볍게 혀를 찼다.
‘아무래도 내가 자리를 내줘야겠군. 에구.“
속으로 혼자 결정을 내리고 있을 때 이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을 부술 듯한 소리를 내며 누군가가 올라왔다. 유세운은 혹시 모르니 어떤 자인지 볼 요량으로 힐끔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대뜸 후회했다.
이층으로 올라온 거한은 키가 거의 팔 척에 달했고 등에는 커다란 도끼를 메고 있었다. 도끼의 날 크기만 봐도 너비가 삼 척에 높이가 삼 척이나 되는 도끼였다. 도끼의 크기에 주눅이 드는 것을 느끼며 그자의 얼굴을 본 유세운은 더욱 후회했다. 대체적으로 각진 얼굴에 눈꼬리가 위로 치켜져 올라가 척 봐도 성깔이 더러워 보이는 그런 얼굴이었다. 게다가 풍기는 위압감 역시 녹록치 않아 보이는 자였다. 유세운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거인은 이층을 한바퀴 둘러보더니 청년과 소녀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유세운은 일어나려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있다가 가볍게 숨을 돌리며 자리에 앉았다.
도끼를 맨 거한은 청년과 소녀의 탁자 옆까지 다가가 바닥에 침을 뱉었다. 유세운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저런 더러운 놈…’
유세운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거한의 입이 열리며 그 얼굴에 가장 잘 어울릴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굵으면서도 상당히 듣기 거북한 목소리였다.
“흐흐흐흐. 이게 누구야? 청의쌍검(靑衣雙劍) 위지남매가 아닌가?"
거한의 말에 귀여운 눈의 소녀가 눈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 묻어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흠. 그 덩치하며 생김새하며 보아하니 흉신대부(凶神大斧) 마방이군요."
소녀의 말에 마방은 눈이 한 치는 위롤 치켜떠졌다. 잠시 부리부리한 눈으로 쏘아보던 마방은 한쪽 입가를 위로 비틀어 올렸다.
"흐흐흐. 그래. 그래 참으로 건방진 계집이구나.“
마방은 자신의 턱을 한번 손으로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너희 사부 청의뢰검(靑衣雷劍) 하후추에게 진 빚이 생각나는군. 아직도 비 오는 날이면 어깨가 쑤셔오거든?"
소녀는 마방의 무서운 기세에도 전혀 놀라거나 떠는 기색 없이 태연히 말을 이었다.
“정말 별 볼일 없다던 사부님의 말씀이 딱 맞네. 사부님 말씀으로는 워낙 건방진 성격이 문제라 훈계 해주시려고 삼 초식만에 양 어깨를 베고는 가셨다던데.”
“뭐? 건방진 성격?”
금세라도 도끼를 잡아 휘두를 것 같은 분위기에도 소녀는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사부님에게는 도저히 자신이 없으니 그 제자들을 노리는 꼴이란…”
“뭐야!? 이것이 정말!”
마방은 참지 못하고 커다란 손을 들어 탁자를 내리쳤다. 청년과 소녀는 뒤로 빠르게 물러나며 검을 뽑아들었다. 청년은 차분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진정 사부님에게 진 빚을 저희에게 갚겠다는 말씀이오?”
청년의 말에 마방은 입가에 흉소(兇笑)를 머금었다.
“크흐흐 당연하지. 네놈들의 사부에게 당한 후 절치부심(切齒腐心) 산속에 들어가 수련을 해왔다. 안그래도 그 작자를 찾아가려고 했었는데 이렇게 버르장머리 없는 그의 제자들을 봤으니 먼저 빚을 좀 받아내야 겠다.”
마방은 천천히 자신의 도끼로 손을 가져갔다. 청년은 묵묵히 그가 하는 행동을 주시하다가 소녀와 눈을 마주쳤다. 청년이 소녀 앞에 비스듬히 섰고, 소녀 또한 검을 들고는 조용히 청년의 뒤로 걸음을 옮겼다. 마방은 잠시 그들의 행동을 보더니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지었다.
“합격술(合擊術)인가? 흐흐흐. 하긴 청의쌍검의 합격술이 유명하다는 말은 들었다. 어디 한번 견식해 볼까?”
마방은 그 말과 함께 자신의 등에 맨 커다란 도끼를 한손으로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살기를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 이장면을 보던 유세운은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
“정말 짜증이군. 강호에 나와 처음으로 본 무림인이 저렇게 치사한 놈이라니…”
유세운의 혼잣말이 들렸는지 마방의 치켜떠진 눈이 그를 향했다. 유세운은 자신을 쏘아보는 눈빛에 금새 사색이 되었다.
‘헉! 이런 젠장 집에서 하던 말버릇이 그만…’
마방은 자신의 도끼날 부분을 혀로 핥으며 유세운을 쏘아 보았다.
“지금 나를 두고 한 말이냐? 꼬마?”
“흠. 누구라고는 말 안했는데 뜨끔하신가 보죠?”
유세운은 비꼬면서 대답하는 자신의 혀를 뽑아버리고 싶었다. 워낙 가문에서 협의를 배우며 자라다보니 저런 치사한 인간에게 나오는 말이 무의식중에 비꼬아져 나왔다.
‘아아~유세운 십이 세. 낙화루에서 한 떨기 꽃처럼 지고 마는 것인가?’
마방은 가볍게 도끼를 좌우로 휘둘렀다.
휭! 휭!
무시무시한 바람소리와 함께 마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흐흐. 정말 죽고 싶은가 보구나. 아니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무릎 꿇고 싹싹 빌어라. 그럼 네놈은 고통 없이 죽여주마.”
마방의 말을 들은 유세운은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빌어먹을 녀석. 용서해 준다는 말은 하지도 않는군. 쳇! 이제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흥! 헛소리 집어 치우시죠. 아버님 말씀이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굽히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마방은 천천히 도끼를 어깨에 걸쳐 메더니 유세운에게 다가갔다. 바로 코앞에 서서 내려다보는 마방을 보며 유세운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휴~아버지. 소자 이렇게 먼저 가나봅니다. 부디 건강하시길…’
마방은 목을 좌우로 비틀더니 도끼 자루를 움켜쥐었다.
“흐흐흐. 강단이 제법이야. 그럼 한번 부러져 보려무나.”
마방의 도끼가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이로 올라가더니 태산압정(泰山壓頂) 초식으로 번개처럼 유세운의 정수리를 향해 도끼를 내리쳤다.
슈아악----
강호에 나가자마자 겪은 일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