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4화
623화-결(結)
“하, 이거 참…….”
무너진 건물 중 그나마 멀쩡한 건물에 누워 쉬고 있던 살존은 허탈한 감각에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끝날 줄은 몰랐는데.”
그새 20년은 늙은 것처럼 주름이 늘어났음에도 아름답다는 말이 어울리는 미모의 살존이 허허롭게 웃었다.
“저 괴물 같은 놈.”
사라진 검은 영역 속.
여기저기 피를 칠하긴 했지만 멀쩡하게 서 있는 설천위의 모습에 허탈감이 들 정도였다.
자기들이 그 고생을 하면서도 막아내지 못했던 괴물을 그리 긴 시간도 안 걸려서 끝내다니.
거기에 보아하니, 언여휘 고것이 불러냈던 거대한 문도 사라진 것 같았다.
완벽한 해결.
너무 대단해서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그 해결에 살존이 허허롭게 웃을 때.
이쪽을 찾은 듯 설천위와 눈이 마주친 순간.
“다들 괜찮아요?”
어느새 앞에 도착한 설천위가 그들을 살폈다.
옷깃 하나 흔들리지 않는 걸 봐선 초고속 이동이 아닌, 공간을 뛰어넘은 전이였다.
“방금……?”
겨우 정신을 차리고 몸을 가다듬었던 성화린이 눈을 부릅떴지만 안타깝게도 설천위는 지금 그녀를 신경 써줄 여유가 없었다.
“상태는 어때요?”
[으음, 좋지 않구나. 원래의 수명을 되찾으려면 꽤나 긴 요양이 필요하겠어.]
영역에 들어가기 전, 오존을 살피도록 붙여놨던 신의의 말에 설천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요양하면 일단 좋아질 수 있다는 거네요.”
[아마 그럴 게다. 약이야 뭐, 재료를 못 구할 정도로 궁핍한 양반들은 아니니 문제없을 게다.]
그런 거라면 아무런 문제도 없지.
[다만, 당연히 한동안 전투는 무리다. 그리고 회복되더라도 체력이 크게 줄어드는 것까진 어떻게 할 수 없을 게다.]
“그런 건 상관없어요.”
싸울 일 자체가 없을 테니까.
자잘한 분쟁 같은 거야 계속 있겠지만, 오존이 나서야 할 정도로 큰 전투는 아마 생길 일 없을 거다.
설천위의 확신이 가득한 대답에 잠시 그를 바라보던 신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다. 이 자들은 천천히 옮기면 되니 일단 뒤에 있는 아이들부터 보자꾸나.]
“그래 주세요.”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가 곧바로 움직이려는 순간.
[이놈아 어디 가냐. 당연히 너도 포함이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채로 다시 전장에 나서려는 게냐?]
“전 멀쩡…….”
“천위, 당신이 치료받지 않으면 저도 안 받아요.”
고개를 젓고 저 멀리서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은 성벽으로 향하려는 설천위의 어깨를 부드러운 손이 짓눌렀다.
꽈아아악!
빙긋 웃는 유예린의 눈이 어색하게 고개를 돌린 설천위와 마주쳤다.
“치료, 받으실 거죠?”
“……응.”
* * *
치료를 받으면서도 설천위는 딱히 쉬진 않았다.
영력을 뿌려 언여휘가 만들어 놓은 진법을 부수고, 성벽에서 싸움을 일으키는 잡것들을 정리했다.
물론, 중간에 들켜서 혼났지만.
“정말, 자기 몸이라고는 생각도 안 하고……! 무해 대사에 불존 어르신도 있고, 맹주님도 있으니 일단은 쉬라고 했죠?”
“으응.”
간이로 만든 의방.
침대에 누워 반쯤 묶인 설천위는 자신의 상처를 꾹꾹 누르는 유예린의 손길에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아까 유매를 지키려다 생긴 상처인데…….
지금 말하면 안 되겠지?
찌릿한 통증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유예린이 깎아준 과일을 입에 물었다.
“끝나고 보니 좀, 허전하네요.”
침상의 아래쪽, 의자에 앉아 턱을 기대고 있던 연화의 말에 설천위는 피식 웃었다.
“허전은 개뿔, 이렇게 안 끝났으면 발바닥에 불이 붙은 것마냥 뛰어다니고 있어야 할 텐데. 헛소리하기는.”
“그치만…… 천마 어르신이…….”
입술을 우물거리며 아쉬워하는 연화의 말에 병실이 분위기가 단박에 무거워졌다.
모두를 지키기 위해 자력으로 연옥의 문을 반 토막 낸 천마.
그의 빈자리를 연화만 크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에게도 그는 스승과 같은 이였으니까.
혼을 볼 수 있으면서 그에게 가르침을 받지 않은 이는 설천위 주위에 없었다.
연화는 후에 다른 이들에게 그 소식을 들었으니 마음이 착잡했다.
마지막 모습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까.
“솔직히, 보고 싶어요.”
이번 전투에서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지만, 그중에 연화와 깊은 연을 맺은 이 중 가장 첫손에 뽑을 사람은 천마였다.
살아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인연이란 것이 좀처럼 쉽게 사라지진 않는 것이니까.
연화의 말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무겁게 동의했다.
이 슬픔은 꽤나 오래 갈…….
“그렇다는데요. 할배?”
[예끼 이놈아. 스승님이라 부르거라.]
“……응?”
“할배?”
“으응?”
익숙한 목소리.
당황하는 이들의 표정에 재밌다는 듯 웃으며 설천위가 손을 들어 올렸다.
퐁 하는 귀여운 소리와 함께 주먹만 한 구슬이 생겨났다.
긴 수염과 백발을 지닌 멋스러운 구슬이라는 것이 특이했지만.
[허허, 이승을 떠돈 경력이 얼마인데 고작 칼질 한번 했다고 사라지겠느냐?]
“하지만, 이승에 남은 이유가 이거라는 둥…….”
“마지막이라고 하지 않았…… 나?”
당황한 이들의 목소리에 작게 변한 천마가 웃었다.
[미련을 풀지 못했다는 말은 듣지 못한 것이냐? 아직 미련이 남았는데 어떻게든 이승에 붙어있어야지!]
“우리 처음 계약 기억하죠? 뭐 천마신교의 한을 풀어 달라 이런 거 안 들어줍니다.”
[그건 정식 제자가 되기 전의 일이지 않느냐!]
“약속은 약속이죠.”
성을 내는 천마를 웃으며 밀어낸 설천위는 반사적으로 손을 내민 연화의 손바닥 위로 정확하게 천마를 안착시켰다.
“보고 싶었다니까. 나 대신 좀 놀아드려.”
[이놈이?]
누굴 노망난 늙은이 취급을…….
“으아아아앙! 할아부지!”
[으, 으이? 연화야, 젖는다! 젖어!]
내 수염이!
작아졌음에도 어떻게든 유지하고 있던 내 수염이!
당황하는 천마와 울기 시작한 연화.
그 둘의 모습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나저나, 나 조금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천마의 무사 소식에 한결 부드러워진 분위기 속에서 화제를 바꾼 건 백유였다.
“나는 무조건! 무조건 천위가 마지막을 지을 거라 생각했거든?”
“그랬잖아요?”
“아니, 우리가 끝까지 싸워서 몰아붙이고 몰아붙인 끝에 천위가 내려와 까딱 마무리 짓는 거 말고.”
유예린의 답에 고개를 저은 백유는 연화의 볼에 비벼져 연신 형체가 오락가락하고 있는 천마를 가리켰다.
“천마 어르신이 마지막에 보여줬던 문을 가르는 일격. 그땐 스승의 마지막 일격이었으니까 나는 당연히 그걸 재현할 거라 생각했거든.”
“아.”
그건…… 그렇네?
백유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유예린은 고개를 돌려 설천위를 바라봤다.
어느새 고개를 돌려 창도 없는 벽을 바라보고 있는 설천위.
멀쩡하기 그지없는 표정과 편안한 안색이었지만…….
“뭔가 있군요?”
그가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유예린이 고개를 돌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답을 내려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향해서.
[으응? 무얼 말이냐?]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던 천마는 이어지는 백유의 설명에 웃음을 터트렸다.
[흐하하하하! 무리인 게 당연하지 않으냐. 내공이 많다고 하여 강기를 뿜을 수 없는 것처럼, 힘의 총량이 많아진다고 해서 천위가 내 검을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웃으며 고개를 아니 몸을 저은 천마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 상황까지 가는 것이 힘든 것이지만 만약 조건이 같았다면…… 현운이나, 율이 아니면 윤혜, 으음 예린이 너도 가능할 것 같고…… 유아 너도 비슷하겐 가능하겠구나. 하영이도 불가능하진 않겠어.]
그 정도면 거의 다 되는 거 아닌가?
천마의 말에 모두가 묘한 표정을 지을 때, 설천위의 어깨 위로 철백의 두툼한 손이 떨어졌다.
“천위.”
“꺼져.”
동지라는 듯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철백을 무시한 설천위는 고개를 돌렸다.
“나름 최선을 다한 거라고…….”
살짝 입술이 튀어나온 설천위의 옆모습에 유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삐졌다.”
답은 백유의 입에서 나왔지만.
* * *
무너진 황궁의 재건은 금세 시작됐다.
전장을 뛰어다니며 병사들을 설득하고, 하나라도 더 구하기 위해 노력하던 황제의 모습은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자연스럽게 군권을 쥐게 된 황제는 그 난리 속에서도 살아남은 관리들을 모아 과도하게 쌓인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기 시작했다.
“네? 제가요?”
“그래, 한동안 전문적인 술사 인력이 필요할 테니까. 파견 임무 한다고 생각하고 붙어있어.”
그 와중에 설천위는 미련이 눈에서 뚝뚝 흐르는 연화를 황제에게 떠넘겼다.
둘 다 좋아했으니 문제는 없겠지.
물론.
“헛수작 부리는 녀석 있으면 재껴버려.”
“네?”
“내가 허락하마.”
팍씨, 내 제자 건들기만 해봐.
연화에게 든든한 빽이 있다는 것까지 상기시켜 줬으니 문제없겠지.
무림맹에서도 인력을 남겨 사후 처리를 돕기로 했기에 흑룡단 또한 상당수가 남아서 정리를 도왔다.
여기에는 철백이 자진해서 남았다.
덩달아 서하영도 남았고.
본인들은 힘이 세니 잔해 정리 같은데 큰 도움이 된다고 하니 말릴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누군가는 남고 누군가는 떠났다.
설천위는?
당연히 요양을 위해 본가로 돌아갔다.
“생각보다 손님이 많네요?”
문제는 딸린 손님이 좀 많다는 것 정도?
치료가 필요한 살존과 사존은 물론이고, 백유와 백수아, 거기에 당연히 따라가야 하는 유예린과 설란까지.
열 명에 달하는 인원이 한 번에 집안으로 찾아왔음에도 설가의 안주인은 당황하지 않았다.
사실 그 숫자보다 면면이 중요한 거긴 하지만…….
편견이 없는 북존의 아내 정유화는 사파의 전 지존과 현 지존은 물론 살수의 우두머리에게까지 당연하다는 듯 침상을 내줬다.
그리고.
“움직이지 마세요.”
“이 정도는…… 내가…….”
자신의 남편에겐 딱 달라붙어 거동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어마어마하게 지극정성인 어머니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자신의 옆을 바라봤다.
“난 움직여도 된다니까?”
“안 돼요.”
“안 되지.”
“백유, 스승님을 보살피러 가셔야 하지 않나요?”
“괜찮아. 우리 스승님이 문제없다고 했어.”
나도 문제없다고.
당당하게 자신의 옆자리를 차지한 백유의 대답에 한숨을 내쉰 설천위는 이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드높은 하늘.
너무 높아서 그 끝이 보이지 않는 하늘 아래 따사로운 햇살이 지상을 비춘다.
찌뿌드드한 몸을 천천히 쭉 폈다.
뼈와 근육이 펴지는 기분 좋은 느낌과 함께, 이내 기지개를 끝낸 설천위가 웃었다.
“우리 결혼식은 언제 할까?”
“……낭만이라곤 더럽게 없네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좀 깨네. 천위.”
응? 지금 타이밍 아니야?
이런 자연스러움이 감동의 포인트 아니었나?
“어린 시절 웃으며 제 손을 잡아주던 아이가 양옆에 여자를 끼고 결혼은 언제 할 거냐고 묻는 나쁜 남자가 되어 버렸네요…….”
“꺄하하하! 그거 웃기네!”
아니 뭐가 웃기는데.
갑자기 자신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시작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뭐, 사이가 좋은 것 같으니 됐지.
유예린도 성격이 많이 부드러워진 것 같고, 백유도 뭐 미친 눈나라는 칭호와는 다른 꽤나 부드러운 성격이 된 것 같고.
진원지기를 소모한 어른들이 회복 좀 하고 나면, 무림맹으로 돌아가서 피해 입은 사람들도 좀 살피고 유가족들을 제대로 보살피는지 검사도 좀 해야지.
신의만 바쁘겠네.
“후우. 정말 안 되겠군요.”
순간 자신의 옷깃을 끌어당기는 손길에 어정쩡하게 설천위가 일어섰다.
그리고.
“좋아, 이 승부 마음에 들어.”
“응? 뭐가?”
멍때리느라 제대로 대화를 듣지 못했던 설천위가 고개를 갸웃한 순간.
“먼저 임신하는 사람이 우선권입니다.”
“그래. 좋아.”
응? 우선권? 무슨 우선권?
영문 모를 대화에 고개를 갸웃하던 설천위는 그대로 두 사람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들어갔다.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대낮에 벌어진 일이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