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3화
622화-패도(覇道)의 좌(座) (5)
창을 휘감은 바람이 터져 나오는 것과 함께 화염이 치솟는다.
모든 것을 짓누르던 패기의 압박에 더해 흑염(黑炎)마저 언려를 집어삼키자, 주위에 가득 차 있던 영력이 요동쳤다.
통한 건가.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철백은 멈추지 않았다.
타오르는 화염 속에 갇힌 언려를 향해 나아간다.
확실하게 끝을 맺기 위해.
인간의 상식으로 녀석의 끝을 단정 짓지 마라.
오로지 눈앞에 드러난 진실만으로, 녀석의 죽음을 목도한 것만으로 결론지어라.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며 철백은 앞으로 나아갔다.
주먹을 당겨 휘두를 준비를 끝내고, 그런 철백의 머리 위를 백유가 뛰어넘는다.
위에서 떨어지는 백유의 주먹.
아래에서 파고드는 철백의 주먹.
거기에 언제 어디서 빈틈을 노리고 있을지 모를 유예린의 칼날까지.
완벽한 위기.
그 속에서.
[신기하구나.]
화려하게 피어오른 꼬리가 모든 것을 튕겨냈다.
자신을 태우던 불꽃도, 세상을 짓누르던 패기도, 송곳니를 드러내던 인간들도.
하나도 빠짐없이, 같잖은 것들을 전부 날려버린 언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연옥의 문을 먹어 치우고 어떤 힘을 손에 넣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이건 명백히 이상하니라.]
멀쩡히 일어나 자신을 노려보는 인간들을 보며 언려는 확신했다.
이상하다.
분명, 살을 가르고 뼈를 부수는 것이 느껴졌었는데.
저 인간들이 고통에 강해 신음 한번 흘리지 않는다는 건 가능한 일이지만, 저리 멀쩡히 일어서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불사(不死)? 불가능하다. 인간의 불사만큼 불가능한 개념은 없으니.]
달기가 자신의 부하를 끊임없이 재생시키고, 언여휘가 제물의 힘을 이용해 인형들을 끝없이 수복시키는 것과는 다르다.
살아 있는 인간.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고 있는 인간을 죽음에서 꺼내는 일을 몇 번이고 반복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애초에, 네가 처음 펼쳤던 영역에서는 그런 힘 따위 없었다.]
자신을 가두고, 불멸의 군세를 불러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다.
인과(因果)란 세상의 이치이고 그건 술법에서도 다르지 않다.
하물며 존재를 정의하는 권능이라면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지금 설천위의 힘에서는 그 인과가 보이질 않았다.
대체 어떻게?
그런 의문이 절로 들 수밖에 없는 기이한 힘이다.
의문으로 가득 차 있는 언려의 눈빛에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던 설천위는 덤덤하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언려, 잊은 건가?”
세상을 짓누르는 압박과 함께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선 철백과 유예린, 백유가 언려를 향해 달려든다.
“네가 놓친 것을 나 또한 가지고 있다는 걸.”
달려오는 철백을 후려치고, 그 대가로 꼬리가 뜯겨나갔다.
날카롭게 세운 발톱이 백유를 저지하는 대가로 전부 부러졌다.
어디서 나타난 지 모를 유예린을 후려치는 대가로 팔이 잘렸다.
[놓쳐? 뭘?]
내가 뭘 놓쳤지?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멀리서 서하영의 뒤에 앉아 숨을 몰아쉬고 있는 연화였다.
[아.]
언여휘가 달기와 구복이라는 신화시대의 짐승을 자신과 엮어낼 결심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
계획의 시작.
[축생(畜生)…….]
내가 놓친 것.
그렇다면 설천위가 가지고 있는 건?
고민은 짧았고, 답은 빠르게 나왔다.
언여휘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으니까.
[수라(修羅)구나!]
끝없는 투쟁의 길.
지옥 중에서도 유일한, 죄인이 투쟁만으로 벌을 받는 세계.
죽음도 소멸도 없는 끝없는 투쟁이 곧 형벌이 되는 세계.
패도(覇道)란 곧 싸움의 길이니.
수라도의 힘을 엮어냈다면, 이 기이한 재생력도 납득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과하다.]
권능의 영역에 들어선 힘이라고 할지라도, 과했다.
이 끝없는 재생은 아무리 생각해도 과했다.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달려드는 세 사람에게 막혀 설천위에게 다가가지도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갔다.
조급해지기 시작한 건 언려였다.
설천위가 모든 힘을 수습하기 전에 쳐야 하는데.
지금 설천위를 처리하지 못하면 승산이 없는데.
[꺼져라!]
대체 이 잡것들은 언제까지 버틴단 말이냐.
아무리 육체가 재생된다고 한들 고통은 여전할 것이고, 인간의 정신력에는 한계란 것이 있는 법이거늘.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분노의 감정이 언려의 눈에 붉게 일렁였다.
그래. 끝없이 재생한다면, 재생하지 못하도록 아예 지워버리면 될 일이지.
농밀하게 농축된 힘이 언려의 의지를 따라 움직인다.
단 일격.
두 번의 공격을 허용하더라도, 한 번의 공격으로 셋 중 하나는 지워버리리라.
그런 의지를 품은 언려의 손 위로 일렁이는 검은 구체가 생겨났다.
누가 봐도 위험한 상태였으나, 철백도 백유도 망설이지 않았다.
대놓고 앞으로 뛰어든다.
자신을 후려치는 꼬리들을 쳐내고, 맞아가며 앞으로 나아간다.
칠흑의 뇌전이 하늘을 뒤덮고, 은빛의 운무가 지상을 먹어 치운다.
순수함 끝에 신성을 품은 철백의 일격이 언려의 복부를 꿰뚫고, 하늘의 분노를 머금은 칠흑의 번개가 언려의 안면을 꿰뚫었다.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얼굴로, 언려는 웃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내지르는 손이 이미 꿰뚫린 자신의 가슴을 따라 나아간다.
가슴을 꿰뚫은 날붙이를 따라 그 끝에 있는 인간에게 도달한다.
그리고.
“조잡하다.”
세상이 요동친다.
언려의 일격이 유예린의 몸에 닿는 그 순간.
공간이 뒤틀렸다.
그리고.
쾅!!
설천위가 앉아 있는 옥좌에서 거대한 폭음과 함께 그 일대의 공간이 날아갔다.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공격을 단숨에 흡수해, 자신의 안에서 터트린 설천위는 피가 흐르는 손으로 팔걸이를 가볍게 두들겼다.
“내 패도는 지키는 것.”
그것을 위해서라면 나는 어떤 괴물도 될지니.
이 자리에 앉아있는 이상.
“나를 꺾기 전에 그 어떤 재해도 내 군세를 집어삼킬 수 없다.”
[천좌(天座) 패도지위(覇道之位)]
침략을 위한 군세는 열세에 모든 것을 포기하지만, 지키기 위한 군세는 열세에 모든 것을 손에 쥐려 발악하니.
내 군세는 오로지 지키기 위한 것이며, 등 뒤에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육신도 그 정신도 결단코 꺾이는 일 따위는 없으니.
선명하게 빛나는 설천위의 몸에서 흘러나온 힘은 끊임없이 모두를 살폈다.
설천위가 무너지지 않는 한, 이 싸움이 끝날 때까지 그의 보살핌 아래에 있는 이들이 무너질 일은 없다.
달려든 백유의 주먹이 재생을 시작한 언려의 머리를 터트렸다.
철백의 팔은 그대로 언려의 허리를 휘감아 부러트렸고, 꺾이는 언려의 심장을 유예린의 칼이 헤집었다.
저 멀리 선 창을 쥔 서하영이 지친 연화를 지켜내며 조금씩 전진해 오고 있었다.
[하핫.]
재생된 머리를 까딱이며 언려는 웃었다.
[짜증 나네?]
비틀린 몸이 요동친다.
이미 몇 번이나 되는 파괴와 재생으로 흐트러진 옷을 뚫고 털이 솟구친다.
인간의 형태를 포기.
언여휘라면 하지 않았을 선택이었으나, 달기와 구복과 뒤섞여 완성된 언려라면 목숨 걸고 거부할 선택은 아니었다.
육체의 크기는 힘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의 크기이기도 하다.
효율의 차이로 크기의 차이를 뛰어넘을 순 있으나, 효율이 비슷하다고 할 때 육체가 클수록 안에 담기는 힘이 크기가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괜히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 어마어마한 크기로 몸이 커지는 게 아니다.
단숨에 몸이 커진 언려가 앞발을 휘둘렀다.
달려드는 철백을 쳐낸다.
휘두르는 꼬리에 백유가 날아가고 가슴께로 파고든 유예린은 칼을 찔러넣은 대신 가시처럼 치솟은 털에 꿰뚫렸다.
죽음에 가까운 치명상을 입었으나, 그럼에도 즉시 회복한 셋은 다시금 언려를 향해 달려들었다.
치열한 투쟁의 장.
서로의 목을 물어뜯기 위해 뒤얽히는 존재들의 전투 속에서.
세상은 천천히 잦아들고 있었다.
“……아.”
언젠가부터 자신과 연화를 노리는 꼬리가 없음을 깨달은 서하영이 창을 내렸다.
요동치던 영력이 잠잠해졌다.
“괴물 같은 스승님.”
입술을 삐쭉인 연화가 한숨을 내쉬며 옆에 있는 흑랑의 머리를 때렸다.
“너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해잖아!”
[끼잉! 끼잉!]
항의하듯 우는 흑랑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린 서하영은 연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도 한 건 별로 없으니 괜찮지 않니?”
“그야…….”
“네가 저 셋 사이에 끼어들어 싸운다는 거 자체가 욕심이야.”
다른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억지로 남겨놓고 온 주현운이 아닌 이상에야 저 사이에 끼어드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아예 격이 다른 세상이니까.
웃으며 고개를 저은 서하영은 편안해진 호흡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정복이 끝나가는 것 같네.”
패도(覇道)라.
“첫 모습을 떠올리면 전혀 아닌데 말이야.”
* * *
싸우고 싸운다.
꼬리를 휘두르고 앞발을 휘둘렀다.
수십 겹으로 펼친 결계로 공격을 막아 내고 몇 번에 걸쳐 펼친 저주가 상대를 집어삼켰다.
하지만.
통하지 않는다.
설천위가 만들어 낸 이 영역에서 적을 향한 공격은 전부 설천위에게로 향했다.
결계는 압도적인 힘에 무너졌고.
물리적인 충격으로 만들어낸 상처는 재생됐으며.
혼을 집어삼키는 저주와 독은 설천위에게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손발이 막힌다.
산을 찢어발기는 일격도.
황하를 반으로 가를 일격도.
모두가 막혔다.
어느 순간부터, 적의 뒤에 꼬리가 생겨나지 않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적의 공격에 발이 묶였다.
어느 순간부터.
[카학!]
피를 토했다.
부서지고 망가져도, 당연하다는 듯이 회복됐던 몸이 회복을 멈췄다.
거대한 육체를 유지할 힘을 잃고, 인간의 형태로 돌아온 언려의 손이 땅을 짚었다.
짐승의 모습으로 부끄러울 것 하나 없었던, 사지로 대지를 짚는 이 모습이 어찌나 치욕스러운지.
말로 못 할 정도의 굴욕감 속에서 언려는 고개를 들었다.
저 위에서 자신을 내려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자신이 펼친 마지막 발악의 여파를 받아낸 그 몸은 피로 얼룩져 있었으나.
그 눈동자만큼은 변한 것이 없었다.
하늘은 말할 것도 없이 높고.
칠흑의 하늘 아래 빛나는 설천위는 여전히 찬란하게 빛났다.
그리고.
[아아…….]
패기로 이루어진 거대한 존재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 광경에 결국 언려의 고개가 꺾였다.
무너진다.
손을 들어 움켜쥔 것에는 한 줌의 영력뿐이다.
자신이 지배하던 영력도, 공간도 이미 설천위에게 뺏긴 지 오래다.
권능의 편린조차 남지 않은 힘은 완전히 짓밟혀 그 속살을 드러냈고 그 결과 육체는 격을 잃었고, 혼은 꺾여버렸다.
바닥에 엎드려 있는 언려의 머리 위로, 찬란한 빛이 내려왔다.
빛나는 존재 아래 칠흑과 같은 어둠이 번져나간다.
그리고.
“끝이다.”
옥좌에서 내려온 설천위의 발이 언려의 머리를 짓밟았다.
[소녀, 패배를…….]
인정한다.
말을 끝맺기도 전에, 설천위의 발이 완전하게 언려의 머리를 부쉈다.
“끝에 다 몰려서 하는 항복 같은 건 안 받는다.”
단숨에 끝을 맺은 설천위는 붉은 피가 묻은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피를 머금은 검붉은 머리와 함께 고개를 든 설천위는 자신의 곁에 서 있는 이들을 보며 웃었다.
“그럼, 집에 가서 밥이라도 먹을까?”
언제나처럼.
* * *
사라진다.
황궁의 하늘 위에 떠 있던 거대한 검은 반구의 그것이 사라진 순간 제도의 싸움에 참여하고 있던 모든 이들은 깨달았다.
끝났다.
그리고 동시에 확신했다.
“아무래도, 괴물은 인간 쪽이었던 것 같군.”
승자가 누구인지.
피가 묻은 수염을 쓸어내며 정존 심유는 허허롭게 웃었다.
천하제일인이라.
차후의 무림은 그가 말하는 패도(覇道)를 따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