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2화
621화-패도(覇道)의 좌(座) (4)
언려가 자신을 온전히 인정한 순간.
세상은 요동쳤다.
신격에 이르렀다 평해도 부족함이 없는 언려의 의지에 반응한 영력이 들끓었고, 공간을 뛰어넘어 나타나는 꼬리는 항거할 수 없는 파괴를 일으켰다.
쩍!
꼬리에 맞은 철백의 몸이 뒤로 날아간다.
맨몸으로 받아냈음에도 몸이 육편이 되어 흩어지지 않은 건, 단련 덕인가 천위의 도움 덕인가.
잘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철백은 몸을 일으켰다.
칠흑의 바닥을 딛고 일어섰다.
일어선 순간, 다시금 안면을 후려치는 일격에 몇 걸음이나 더 뒤로 밀려났다.
강적은 몇 번이고 만났었고, 약자로서 발버둥 쳐온 시간이 더 길었기에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상대로 버티는 건 나름대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거늘.
사람이란 것이 참 간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막하던 절벽 앞에서, 친우의 도움으로 몇 번이고 계곡을 뛰어넘었더니 이제는 강함이라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다.
괴물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었던 구복조차 힘 하나로 붙잡아 둘 수 있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후우.”
힘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토록 어색할 줄이야.
거리를 벌린 채 자신을 노리는 꼬리의 압박에 묵묵히 호흡을 고른 철백은 두 팔을 몸에 붙였다.
버틴다.
승기(勝氣)는 놓쳤지만, 그렇다고 시간 끌기까지 실패한 건 아니다.
아무리 적이 강하다고 한들.
버티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완벽에 가까운 자기 확신과 함께 철백은 자신에게 날아오는 꼬리를 받아냈다.
가장 앞에서, 받아낼 수 있는 만큼 전부.
조금이라도 뒤에 있는 이들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서.
철백은 이를 악물고 몸의 근육을 조였다.
온몸의 근육들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런 고통 따위에 휩쓸릴 여유는 없었다.
버틴다.
버티고 또 버틴다.
철벽과도 같은 의지가 철백의 몸을 단단하게 지탱했다.
무너지지 않는다.
부러지지 않는다.
나는 강철의 신념이니.
절대…….
툭.
두 눈을 부릅뜨고 공격을 받아내던 철백은 부드러운 감촉에 고개를 돌렸다.
“……쯧.”
혀를 차는 소리.
자신의 등에 닿은 백유의 반응에 철백은 그제야 주위를 온전히 인지했다.
막아 낸다고 막아 냈으나.
밀려나는 것까진 막지 못했는가.
최대한 많은 꼬리를 붙잡아 동료의 부담을 덜게 하고 싶었으나.
이미 꼬리의 개수에 한계는 없었는가.
자신이 받아내던 것과 같은 숫자의 꼬리를 다른 사람들이 받아냈다면.
축축하게 젖어오는 등에 철백은 이를 악물었다.
보지 않아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백유는 이미 피로 몸 전체를 덮었을 정도로 중상이라는 것을.
유예린도 다르지 않을 것이고.
서하영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머릿속에 차오르는 부정적인 생각에 이를 악물었던 철백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무의미한 걱정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오로지 하나.
설천위를 위한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다.
다른 모든 잡념을 쳐내고 철백은 다시금 힘을 끌어올렸다.
은색의 기류가 몸을 휘감는다.
천위의 불꽃은 이미 희미해져, 찬란한 은빛에 작은 그림자를 만드는 것에 그쳤지만.
그럼에도 충분했다.
버틸 수 있는 원동력으로, 그것 하나면 충분했다.
고개를 치켜든 철백은 어느새 가까워진 언려와 마주했다.
[후후, 좋구나. 좋아.]
즐겁다는 듯이 손을 휘두르는 언려의 손짓에 따라 몇 개나 되는 꼬리가 날아든다.
반사적으로 주먹을 움직여 꼬리를 쳐냈다.
몸으로 받아낼 것은 받아내고, 쳐낼 것은 쳐낸다.
[인간이란 참 어리석은 생물이야.]
그 모습에 언려는 크게 웃음 지었다.
여태까지 철저하게 자신만을 지키던 철백이 뒤에 동료가 붙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방어가 허술해졌다.
방어의 범위를 무리하게 넓힌 탓이다.
버티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뒤의 둘은 버려둔 채 자신만을 지키면 되는 일이거늘.
그 어리석음에 절로 웃음이 나와 언려는 고개를 저었다.
여흥은 이 정도면 됐다.
[자, 본격적으로 시작하자꾸나.]
힘의 사용법은 이제 충분히 익숙해졌다.
머릿속에 난잡하게 떠다니던 술법들도 정리가 끝났다.
이제 남은 건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뿐.
최후를 선언한 언려의 목소리에 전장에 서 있던 모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제, 정말 끝이 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긴장감이 가득 차오른 그 순간.
기습적으로 떨어진 꼬리를 철백이 막아 냈다.
팔을 들어 올려, 머리 위로 떨어지는 꼬리를 쳐냈다.
분명 끝이 아닌 가운데를 쳐냈음에도, 순식간에 돋아난 가시들에 의해 가죽이 뚫리고 살점이 뜯겨나갔다.
새하얀 뼈가 드러나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통증과 함께 은색의 기류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가가!!”
저 멀리서 서하영이 절규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철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웃고 있었으니까.
한점의 그늘조차 없이 은색으로 빛나는 은빛의 기류.
여태까지보다 더 강한 힘이 실려 있었다고는 하나 허무하리만치 쉽게 뚫린 육체.
이 두 가지가 말해 주는 차이는 하나다.
“우리의 승리다.”
확신을 품은 철백의 한 마디와 함께, 세상이 요동친다.
비틀리고, 비틀린다.
그것이 단순히 공간이 흔들리는 것이 아님을 언려는 단숨에 눈치챘다.
[무슨…….]
언려가 미간을 찡그리고 그 눈이 사방을 훑었다.
순간적으로 이변을 눈치채지 못했던 눈은 이내 빠르게 원인을 찾아냈다.
없었다.
이 격리된 공간에서 가장 눈에 띄어야 할 그것이.
“천위는 자기 힘에 부친다고 해서 도움을 포기할 정도로 근성 없는 녀석이 아니다.”
처참하게 망가진 자신의 팔뚝 위로 찢어낸 천을 감으며 철백이 웃었다.
“필요 없어져서, 거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입꼬리를 올린 철백의 목소리와 함께 기어코 세상이 어긋난다.
비틀리고 뒤섞여, 천지가 어긋나고 뒤바뀐다.
세상에 가득 찼던 영력을 잡아먹는 무언가가 들불처럼 일어선다.
이제는 완전히 상황을 인지한 언려의 눈이 딱딱하게 굳어 사방을 훑어봤다.
만에 하나라도 설천위가 연옥의 문을 전부 흡수했다면.
‘지금밖에 기회가 없다.’
이제 막 겨우 힘을 억지로 욱여넣어 채운 지금.
지금만이 설천위의 유일한 틈이었다.
만약 자신처럼 완전히 소화를 끝내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그러니, 지금 끝내야 했다.
세상에 가득 찬 영력을 먹어 치우는 힘을 자신의 의지로 밀어내며 언려는 술법을 펼쳤다.
이미 눈앞에 있는 잡것들은 안중에서 사라졌다.
중요한 것은 설천위.
자신의 힘이 최고조에 오른 지금, 어떻게든 설천위를 먼저 마무리하는 것이 우선이다.
살벌하게 눈을 뜬 언려가 뿌려낸 영력은 이내 빠르게 영역 전체를 훑었다.
설천위가 만들어 낸 영역(靈域).
그 안에 있음에도 놈의 힘이 이 공간 전체를 잡아먹지 못한 건 놈이 아직 미숙하다는 증거다.
술법을 준비하고 펼친다.
영역 곳곳을 훑어내고, 이제는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해졌을 놈의 기척을 찾았다.
그리고.
[음?]
그것이 없다는 것에 작은 당혹을 느낀 언려가 미간을 찡그린 그 순간.
그늘이 그녀의 얼굴 위로 드리워졌다.
그늘?
그늘이 있을 수가 있나?
설천위의 어둠에 갇혀 해가 없이 희미한 빛만 있는 이 장소에?
의문은 짧았고, 답은 빨랐다.
있다.
그늘 정도는 얼마든지, 생길 수 있었다.
[무식한 것!]
머리 위로 떨어지는 거대한 흑도.
그 위로 찬란하게 빛나는 존재가 세상을 내려보고 있었다.
대체 왜 여태까지 눈치채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찬란한 빛.
그 안에, 여전히 옥좌를 연상시킬 정도로 큼지막한 의자에 앉아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설천위가 있었다.
턱을 괸 채, 오만하기 그지없는 눈으로 자신의 발아래를 내려다보는 그 눈동자에 굴욕감을 느끼며 언려는 손을 까딱였다.
간단한 동작과 그렇지 못한 결과.
순식간에 치솟은 꼬리들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흑도를 산산이 부순다.
깨져 파편이 되어 흩어지는 검은 잔해의 빗속에서 언려는 입꼬리를 올렸다.
[오만하구나. 인간.]
달기의 기억 속, 자신을 몰아붙이던 설천위를 떠올리며 언려는 이번엔 되물었다.
[그 자리에 앉아 나를 상대할 셈이냐?]
달기는 그 끝에 비참하게 바닥을 굴렀는데.
너 또한 똑같은 결말을 바라는 것이냐?
비웃음이 담긴 그 물음에 말없이 내려다보던 설천위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검지를 가볍게 아래로 까딱였다.
너무나도 간단한 동작.
허나.
그그그그긍!!
설천위가 만들어 낸 영역 전체가 그 동작에 짓눌렸다.
하늘 위에 가득 차올랐던 패기가 모든 것을 짓눌렀다.
공간을 뛰어넘어 만들어 내던 자신의 꼬리가 묶일 정도의 압박감에 언려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지.
그래야.
[왕위를 빼앗는 보람이 있겠구나!]
내가 빼앗겼던 것을 되찾는 보람이 있지.
눈이 번뜩인 언려가 가볍게 땅을 박찼다.
장난을 치는 것 같은 사뿐한 몸짓.
허나, 단숨에 치솟는 그 몸은 순식간에 설천위를 향해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쾅!!
강렬한 굉음과 함께 언려의 몸이 튕겨 나왔다.
설천위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고, 튕겨 나온 몸이 바닥을 구르기 전에 겨우 균형을 다잡았다.
“하하하하! 내가 졸이 될 줄은 몰랐는데!”
하늘 위.
설천위의 발아래서 해진 옷을 대충 추스른 채, 검붉은 뇌전을 휘감은 주먹을 움켜쥔 백유가 웃었다.
옷은 해졌지만, 그 안에 드러난 속살은 이미 회복이 끝난 듯 상처 부위가 매끈했다.
멀쩡한 모습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백유의 모습에 겨우 균형을 잡고 일어섰던 언려가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 차오르는 것과 동시에.
“정말, 천박한 웃음소리네요.”
검을 뽑는 소리가 들려왔다.
검집에서 뽑는 소리가 아니라, 살점과 뼈를 가르며 빠져나가는 소리.
쿨럭.
입가에서 치밀어오른 피를 토해내며, 고개를 돌린 언려는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유예린의 눈과 마주쳤다.
살의(殺意).
오로지 죽인다는 의지만이 담긴 공허하고 삭막한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했다.
그 원초적이면서도 농밀한 살기에 언려가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꽈악! 꽈악!
허나, 그런 감탄도 잠시.
자신의 코앞에서 들려온 소리에 언려의 고개가 돌아갔다.
코앞에서 만신창이었던 팔이 온전해진 철백이 전신의 근육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있었다.
“힘을 뺀 이유가 있었군.”
짧은 감상과 함께 철백의 주먹이 언려의 안면을 강타한다.
이미 빠져나가고 없는 유예린이 있던 자리로 뼈와 살점이 튄다.
단 일격에 상대의 머리를 통째로 날려버린 철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쉽게 끝나진 않는다는 건가.”
저 멀리 날아간 파편에서 재생이 시작된다.
눈 깜짝할 새라는 표현도 부족할 정도로 짧은 시간 만에 육체와 옷까지 전부 재생한 언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알겠다. 패도(覇道)에 어울리는 힘이구나.]
자신이 아니라 아랫것들을 강화해 싸우게 하는 힘인가.
하지만 그렇다면, 그것도 의문이 남는다.
[고작 그런 방식으로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냐?]
아무리 아랫것들이 끊임없이 회복한다고 한들 자신은 잡지 못한다.
불사(不死)의 힘을 이길 수 있는 건 그보다 더 압도적인, 이치를 깨부수는 권능뿐이다.
그렇기에 신(神)들의 싸움은 그 권능의 싸움이 되는 것이고.
경지에 도달한 설천위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는데?
언려의 당연하다면 당연한 의문에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던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얼마든지.”
짧은 대답.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창을 움켜쥔 서하영의 창에 막대한 패기가 뒤섞인다.
바람을 휘감고 언제라도 날릴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던 서하영은 때를 느낀 순간 그대로 창을 집어 던졌다.
바람의 흐름을 완벽하게 가르고 아무런 저항도 없이 날아가는 창은 하나의 선이 되어 언려를 꿰뚫었다.
뒤이어 그 안에 깃든 설천위의 패기가 모든 것을 짓밟고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불사(不死)?
짓밟히고 불타오른 폐허에 그딴 건 남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