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0화
619화-패도(覇道)의 좌(座) (2)
발악의 시작은 파괴였다.
설천위의 발악이 자신을 붙잡아두는 것에 있다면, 자신의 발악은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짧게 생각을 정리한 여인은 즉시 힘을 풀어냈다.
찢어낸다.
이 공간을 전부 찢어발기고 또 찢어발기면, 아무리 설천위라고 한들 한계는 찾아올 터.
연옥의 문에서 뽑아낼 수 있는 영력에는 한계가 있다.
연옥의 문에 있는 한계가 아니라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의 한계.
아무리 설천위라고 한들 인간인 이상 그 한계는 찾아온다.
그 한계까지 몰아붙이면 자신의 승리다.
영역의 재생은 따라오지 못할 것이고,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잡것들은 무너질 것이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놈이 감당하지 못할 때까지 날뛰는 거다.
화려하게 풀어진 일곱의 꼬리가 사방을 휩쓸기 시작했다.
영역을 끊임없이 찢어발기는 건 물론이고,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설천위의 군세까지 찢어발겼다.
본격적으로 힘을 풀어내기 시작한 여인의 동공이 짐승의 그것처럼 가늘어져 번뜩였다.
마치, 본래 그러했던 것처럼 가늘어진 동공이 세상을 훑어냈다.
[지독하군.]
혼의 본질을 꿰뚫어 헤집는 듯한 그 눈동자에 현태중은 헛웃음을 지었다.
[과연 신(神)을 노리는 괴물이라는 건가.]
발이 멈추려고 한다.
위압감.
아니, 위엄이라고 불러야 할까.
달기의 그것에서 피어난 것으로 보이는 힘이 현태중의 발을 묶었다.
스멀스멀 차오르는 공포가, 족쇄가 되어 발에 엉겨 붙었다.
그렇기에.
콰득!
망설임 없이 검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찌른 현태중은 웃었다.
[물러서지 마라!!]
참으로 지독한 힘이다.
눈앞의 괴물이 아닌, 뒤에 버티고 있는 주인의 힘이 말이다.
불사(不死), 아니 이미 죽은 자들이니 불멸(不滅)이라고 해야 하나.
이미 죽은 망자들을 소멸도 못 하게 만들어 부리는 주제에 고통은 또 생생하게 재현해놨다.
실체화.
마치, 생전 자신의 육체를 되찾은 것 같은 선명한 감각이 몸을 가득 채웠다.
‘더 정교해지는구나.’
술사가 아닌 자신이라도 느낄 수 있었다.
혼을 실체화시키는 설천위의 기술이 이미 어떤 기점을 넘어버렸음을.
망자를 되살리는 것에 가까운, 진정한 의미로 역천(逆天)의 영역에 들어서 버렸음을.
설천위는 그 부분을 크게 신경 쓰고 있지 않는 것 같지만, 현태중은 솔직히 걱정스러웠다.
이 힘을 아무리 그래도 인간에게는 너무…….
[허튼 생각 마라. 무인 나부랭이야.]
현태중의 옆.
부적을 쥐고 다가온 손휘가 히죽 웃었다.
[저 괴물 같은 주인 놈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아득한 영역에 발을 들이고 있으니. 네가 지금 떠올리는 우려는 티끌에 불과할 뿐이니까.]
웃으며 술법을 펼치는 손휘의 말에 현태중은 입을 다물었다.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광경이 고작 티끌에 불과하다면.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반으로 쪼개졌음에도 거대한 문 앞에 앉아, 턱을 괸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설천위의 모습을 눈에 담은 현태중은 이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금 몸을 돌려 검을 쥐었다.
[그래, 배운 네가 그리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알았다면 됐다. 그러니 무식한 칼잡이 놈아. 가서 싸워라. 저 괴물 같은 년의 꼬리에 생채기라도 낼 수 있는 건 너를 포함해 몇 되지 않으니.]
설천위가 죽여 부릴 수 있는 이들 중 강기를 쓸 수 있는 화경급 이상의 고수는 한 손에 꼽는다.
더 있긴 하지만 워낙 반항적인 놈들이 많아 쓸모없었다.
설천위의 힘이 있기에 공격이 닿기만 한다면 약간이라도 타격을 줄 수 있긴 하지만, 문제는 닿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자들이 대부분이라는 거다.
설천위의 불을 몸에 휘감고 폭탄 자살이라도 하듯 달려드는 자들도 있었지만, 달기의 재생도 이쪽 못지않았다.
그렇기에 손휘가 직접 현태중을 재촉하러 온 거다.
[시간을 끌어야 하되, 최소한의 손실로 끌어야 한다.]
상대가 읽어낸 것을 손휘라고 읽어내지 못할까.
인간의 한계는 오히려 적보다 손휘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설천위는 말 그대로 인간의 틀을 벗어나는 길을 가고 있었다.
그 끝에 어떤 괴물이 탄생할지 모르겠지만, 설천위 스스로 패도(覇道)를 걷는 괴물이 되는 것을 각오했으니 그 길은 결코 순탄치 않을 거다.
그러니, 지금 연옥의 문으로 흘러나오는 영력을 이용해 설천위가 이 군세에게 불멸을 부여한 것처럼 보여도 그 한계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올 수도 있다.
물론, 부족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시점에서나 그렇고 설천위는 여유로울 수도 있지만…….
허공을 떠도는 설천위의 눈동자로 보건대 그건 아닌 게 확실했다.
그러니.
[오현위영(五玄圍影).]
손휘는 설천위에게서 끊임없이 공급되는 영력으로 결계를 펼쳤다.
설천위의 힘이 깃든, 그림자가 요동치는 오방진의 결계가 여인을 포위했다.
무식하게 달려드는 저 칼잡이들보단 이쪽이 더 효과가 있을 터.
그렇게 자신하며 결계에 힘을 더하던 순간.
쩡!
굉음과 함께 오방진의 구석이 깨져나갔다.
오방진의 유일한 약점을 정확하게 공략한 그 공격에 손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번 균열이 생긴 오방진은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달려드는 무식한 무인들의 모습에 한 번 더 손휘의 미간이 꿈틀거리는 순간.
[꺼져라!]
분노에 가득 찬 여인의 목소리가 자신을 둘러싼 설천위의 군세를 날려버렸다.
어떻게든 버티는 강자들은 꼬리로 직접 갈기갈기 찢어 날려버리고, 그 기세를 멈추지 않고 자신의 뒤를 막고 있는 영역까지 갈라버렸다.
압도적인 힘.
언여휘의 기억이 온전치 못한지 술법은 펼치지 않았지만, 술법의 약점을 본능적으로 읽어내고 파훼해내는 솜씨는 그야말로 절품이었다.
술법으로도 무력으로도 막지 못하는 상황.
이대로 가면 설천위가 쥐어짜 내야 하는 영력의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고, 연옥의 문이란 말도 안 되는 물건을 흡수하는 설천위에게 가해지는 부담은 상상을 초월하게 될 거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턱!
손휘의 고민이 깊어지는 그 순간.
여인의 꼬리에 찢겨 나간 영역의 경계 사이로 두툼한 손이 끼어들었다.
그리고 그 빈틈을 억지로 비틀어 열어 그 머리를 들이민다.
“천위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포효와 같은 외침, 그리고 그대로 몸을 들이밀어 완전히 안으로 들어온 철백이 바닥을 굴렀다.
피투성이의 그 몸이 바닥을 구르며 피로 된 짧은 길이 생겨났지만, 철백도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네가 어찌?]
당황한 현태중의 물음에 여인의 뒤에 나타난 철백이 몸을 일으키고 가슴에 공기를 가득 채웠다.
“날 두……!!!”
제대로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날아온 꼬리가 철백을 휩쓸었다.
[철백아!]
이미 만신창이가 된 육체로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는 거력이 철백을 휩쓸자 현태중이 다급히 달려 나가려던 순간.
까득! 까득!!
모두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심지어, 날벌레를 쫓아내는 느낌으로 꼬리를 휘둘렀던 여인의 눈은 경악과 굴욕이 뒤섞여 커져 있었다.
“……까득!”
이를 악문 턱 위로 힘줄이 솟아나고, 이마와 관자놀이로 불뚝 튀어나온 혈관이 맥동한다.
극한까지 쥐어짠 근육들은 경련이 시작되지 않을까 할 정도로 파르르 떨리고, 그 육체는 이미 피로 범벅이었으나.
“나를 두고, 갈 생각 마라.”
여인의 꼬리를 제 몸으로 붙잡은 철백의 두 눈이 은색의 찬란한 빛으로 번뜩였다.
화르르르륵!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여인의 꼬리를 견뎌낸 철백의 단단함에 모두가 경악하는 그때.
철백의 몸 위로 칠흑의 화염이 타올랐다.
순식간에 꼬리를 타고 올라오기 시작하는 화염에 눈썹을 꿈틀거린 여인이 강하게 꼬리를 털어냈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채찍처럼 휘둘러진 꼬리가 허공을 쳤다.
인간이라면, 아니 설령 바위라 할지라도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져야 할 충격이 공간을 휩쓸었다.
허나 철백이 산산조각이 났을 거라는 끔찍한 상상에 눈을 감는 자는 없었다.
그 정도로 감성적인 존재는 이곳에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모두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이 자를 붙잡고 있으면 되는 거겠지!!!”
꼬리에 매달려 소리치는 철백의 몸이 불끈거린다.
이미 한계에 도달하고도 남았을 근육이 부풀어 오르며 더욱더 강하게 꼬리를 묶었다.
콰득!
허공에 생겨난 영역의 벽에 두 다리를 박은 철백의 눈이 번뜩였다.
마치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반응해주는 설천위의 영역에 철백은 확신했다.
지금 설천위는 자신의 말을 듣고 있다.
그렇다면.
“천위!!! 문을 열어라!!”
철백의 포효에, 옥좌에 앉아있던 설천위의 몸이 움찔거렸다.
문을 열라니.
설마, 연옥의 문을 완전히 개방하라는 건가?
아니 그런 게 아니다.
그렇다면?
짧은 생각 끝에 설천위는 철백이 무엇을 말하는지 읽어냈다.
그렇기에 침묵했다.
반응하지 않고, 입을 다무는 것을 선택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건…….
“열어라!! 천위!!”
빠득! 빠득!!
[이익! 이 무식한 대성성이 같은 것이!]
여인의 꼬리를 잡고 버티는 철백의 외침이 영역 전체로 울려 퍼졌다.
“네게 지켜지려고 이 전장에 나선 게 아니다!! 너도! 지키려고 이 전장에 선 거다!”
지키려고.
그 한마디에, 설천위는 희미하게 뜬 눈으로 영역의 벽을 바라봤다.
영역 밖에서, 벽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애써 무시하고 있던.
절로 튀어나오려는 한숨과 함께, 설천위는 끝내 완전히 눈을 감았다.
그래.
[부탁할게.]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설천위의 목소리와 함께, 영역이 열린다.
여인에게서 가장 먼 곳에서 열린 벽을 넘어, 일단의 무리가 들어온다.
“진짜 망할 스승님!!”
[크허어어어엉!]
포효하는 흑랑이 단숨에 달려든다.
하체가 없는 것처럼 길게 늘어나 달려든 흑랑은 방어를 위해 휘둘러지는 꼬리를 물고 몸을 비틀었다.
“다치면,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누가 할 말을.”
다친 팔을 고정시킨 채로 들어온 유예린과 백유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지독할 정도의 살기와 패기가 형체를 이뤄 다친 손의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살벌함을 넘어 공포스럽기 그지없는 두 사람의 뒤로, 창을 쥔 서하영이 따라 들어왔다.
구복이 사라진 뒤, 지상에 올라오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서하영은 말리는 다른 이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이 앞에 섰다.
움직일 수 있었다.
구복이 폭주하는 순간 그 충격을 너무 가까이에서 막아내느라 기절해버렸지만, 오히려 그 덕에 이후 싸움에 힘을 쓰지 않아 몸 상태 자체는 충분히 전투를 이어 나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니.
“저 바보가.”
밑바닥에서 함께 시작했던 바보 둘을 반드시 지켜내리라.
이 창으로.
억지로 영역을 열고 들어온 철백부터 각오를 다진 서하영까지.
총 다섯이 전장에 합류했다.
주현운은 부상이 너무 심한 이들을 위해 밖에 남은 상황.
지금 움직일 수 있는 모든 전력이 모였다.
“목표가 시간 끌기라네요.”
“흥.”
손휘에게 상황을 전해 들은 유예린과 백유는 코웃음을 흘렸다.
살기로 만들어진 회색의 검을 부러진 손 위로 겹쳐 만들어낸 팔로 쥔 유예린과, 패기로 이루어진 칠흑의 주먹과 자신의 주먹을 부딪친 백유는 동시에 땅을 박찼다.
“그딴 거 알 바 아니야. 내 남편 노리는 여자는 그 얼굴에 주먹을 때려 박아줘야지.”
“그거 당신이 할 말인가요?”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백유와 유예린이 각자 하나씩 꼬리를 맡았다.
그 뒤에 서하영까지 참전.
꼬리가 저지르는 파괴는 큰 폭으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쿵! 쿵!
연옥의 문은 그 크기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