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9화
618화-패도(覇道)의 좌(座) (1)
[꺄하하하하! 원화(元化)의 술(術)? 천위! 드디어 미친 거야?]
몸 전체가 패기를 띈 영력, 검붉은 연기로 변하기 시작한 설천위의 모습에 여인은 웃음을 터트렸다.
미친 짓이다.
[네게 지금 남은 영력은 고작 한 줌 정도인데 패기로 부풀린다고 한들 원화의 술이 온전히 유지될 수 있을까?]
망가진다.
이건 무조건 망가진다.
부족한 영력은 끊임없이 흔들릴 것이고, 저 육체는 전투 끝에 흩어질 것이다.
오만하고, 무지함이다.
영역(靈域)을 펼쳤다고 해서 버틸 수 있는가?
그랬다면 원화의 술이 비술이자 금술로 지정되지 않았겠지!
웃음과 함께 배를 잡은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천위 아무리 너라고 해도, 지금 보여주는 마지막 발악은 추할 뿐이야.]
안타깝다는 듯 손을 휘젓는 여인의 동작은 부드러웠으나, 그 결과는 부드럽지 않았다.
공간을 가르고 지나가는 꼬리.
일곱의 꼬리를 전부 움직일 필요도 없다는 듯 단 하나만 움직인 꼬리는 거침없이 설천위를 휩쓸었다.
아래에서 위로 치솟는 공격이 단숨에 설천위를 집어삼킨다.
털 뭉치에 튀어나온 날카로운 발톱 끝에는 권능에 가까운 어떤 힘이 깃들어있었다.
북존을 비롯한 오존들이 속수무책으로 깨져나간 원인.
상식을 벗어난 초인들.
그리고 그런 초인들의 상식조차 깨부수는 세상의 이치를 넘어선 힘.
경외(敬畏)의 근간이 되는 불가해(不可解)의 현현.
그것이 바로 신(神)의 권능이다.
신격의 증명이자, 초월자의 증거.
미완성이라고는 하나, 두 신화적 존재를 흡수한 여인의 공격에는 두 존재의 권능의 흔적이 당연하다는 듯이 깃들어있었다.
압도적인 파괴력은 당연하고, 존재의 혼마저 찢어발기는 강력한 힘이었기에 설령 원화의 술을 썼다 하더라도 완전히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그래.
피할 수 없어야 정상이다.
[음?]
자신의 꼬리에 아무것도 걸리는 느낌이 없자 고개를 갸웃한 여인은 다시금 꼬리를 움직였다.
설천위가 있던 자리를 몇 번이고 헤집는 꼬리.
그리고.
[상상력이 빈약해.]
달기를 흡수한 탓인가?
원래 있던 곳이 아닌, 자신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여인은 고개를 돌렸다.
[어째서 거기에?]
아니, 어떻게?
살존도 아니고 자신의 이목을 속이고 이렇게 움직인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무엇보다, 설천위는 살존과 뿜어내는 기세의 종류 자체가 다르다.
살존은 살기마저 잔잔해 눈에 띄지 않는 반면 설천위가 뿜어내는 패기는 존재 자체로 시선을 모으는 힘이다.
아무리 원화의 술을 썼다 해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는데?
[역시, 아직 온전한 게 아니구나.]
의아해하는 여인의 반응에 설천위는 입꼬리를 올렸다.
온전하지 않다.
확실했다.
만약, 온전히 언여휘의 자아를 모두 계승했다면 유희랍시고 오존들을 괴롭히며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 거다.
제 딴에는 새로운 몸에 적응하기 위한 가벼운 몸풀기 정도로 여겼을지 모르지만.
술사로서의 언여휘는 직감이 뛰어나고, 나서야 할 때와 참아야 할 때를 잘 구분하는 인간이다.
그런 인간이.
[이걸 이리 놔둘 리가 없지.]
이렇게 안일하게 일 처리를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여인의 너머, 반으로 잘린 연옥의 문 앞에 도달한 설천위는 반쯤 열린 문을 어루만졌다.
[흐응? 천위 뭐하게? 설마 너도 연옥에 흥미가 있는 거야?]
그런 거라면 나쁘지 않지.
연옥의 힘을 받아들이고 새롭게 태어나는 거.
먼저 해본 사람으로서 적극 추천하고 싶었다.
이 정도로 상쾌한 기분은 그녀 생에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 어떤 자극도, 지금의 기분을 만들어낼 순 없다고 확신했다.
웃음 짓는 여인의 모습에 문을 가볍게 쓸어내던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검붉은 연기로 화한 몸이 일렁인다.
[널 뭐라 불러야 할까. 그래, 이것저것 섞였으니 잡종 정도면 되겠지.]
잠시 고민하듯 문을 톡톡 두들기던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이고 여인, 아니 이제 잡종이라 부르기로 한 존재를 내려봤다.
[달기의 기억을 온전히 이어받았다면.]
“내가 이곳에 서는 걸 네가 방치했을 리 없겠지.”
당연하다는 듯, 육체를 되돌린 설천위.
원화의 술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해제하는 설천위의 모습에 여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천위, 잡종이라니?]
희미하게 일렁이는 분노.
스스로가 초월했다고 생각했을 때, 이제는 자신에겐 없을 감정이라 여겼던 그것이 다시금 피어오른다.
[아무리 너라고 한들, 용서하고 포용해줄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단다?]
으르렁거리듯 말을 씹어뱉는 여인의 모습에 설천위는 피식 웃었다.
“이것저것 뒤섞여, 기억조차 온전하지 못한데. 잡종이 아니면 뭐라 부르겠냐?”
웃으며 손을 뻗는다.
“달기의 발악 때문인지, 아니면 애초에 완전히 섞이는 것이 불가능했던 건진 모르겠지만.”
절반 정도가 없는 연옥의 문 앞에서 설천위는 군세를 일으켰다.
달기와 싸우던 그때처럼 파도처럼 일어난 군세가 순식간에 사방을 가득 메운다.
“이걸, 내 손에 쥐여주면 안 됐지.”
화악!
단숨에 커진 패기의 막이 연옥의 문을 뒤덮는다.
그제야, 설천위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깨달은 여인이 두 눈을 부릅떴다.
[지금, 감히 연옥의 문을 흡수하려는 거야? 응? 천위?]
진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되묻는 여인의 눈에는 기이한 웃음이 일렁였다.
[원화의 술로 나와 싸우겠다는 것보다 더 말이 안 되는데? 설마 그 말도 안 되는 망상을 막지 않았다고 그리 자신만만한 거야?]
연옥의 문이 무엇인가.
천계의 존재들이 이 세상에 해가 되는 악(惡)을 봉인했는데 그 봉인을 억지로 뒤틀어 여는 통로다.
괜히 누군가가 조각한 것도 아닌데 인왕과 악귀들이 다투는 모습이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존재 자체로 천계의 신들과 연옥의 신들 사이의 충돌을 의미하며, 동시에 그 충돌이 구현화 된 것이 바로 연옥의 문이다.
불러내는 것만 해도 인간을 수십만 단위로, 말 그대로 갈아 넣어야 하는 것이 바로 연옥의 문이란 소리다.
그걸 흡수?
인간이?
백이면 백 흡수하려 시도하다가 몸이 터져나갈 것이고, 기적적으로 몸이 터져나가지 않고 그 힘을 받아들인다고 한들 천계의 힘과 연옥의 힘이 충돌해 폐인이 될 거다.
아니면 광인이 되거나.
그것도 아니면 힘에 잡아먹혀 다른 존재가 되겠지.
뭐가 됐든,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다.
육도(六道)의 파편을 흡수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그건 말 그대로 파편이기에 흡수가 가능한 것인 데다가, 그것조차 감당해낼 수 있는 인간은 전 대륙에서도 손에 꼽는다.
연옥의 문은 그 육도의 파편보다도 아득히 강한 그런…….
“반 정도라면, 못할 것도 없지.”
퉁, 검게 물들어버린 문을 두들기는 설천위의 한마디에 여인은 눈을 크게 떴다.
절반.
절반이라고 해도 말이 안 되는 소리지만.
만약.
만약.
천마가 이것을 예상하고, 연옥의 문을 반으로 나눈 거라면?
애초부터 목적이 시간 벌이를 위한 것이었다면?
직감이, 본능이 외쳤다.
찢어라.
죽여라.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
요동치는 달기와 구복의 기억에 따라 힘이 일어섰다.
털이 곤두선 일곱의 꼬리가 하늘을 가득 메울 크기로 펼쳐지고, 그 끝에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고 살기를 품었다.
[캬아아아악!]
짐승의 그것과 같은 외침이 터져 나오는 것과 동시에 꼬리가 사방을 휩쓴다.
깨지고 부서진다.
최전선에서, 여인의 꼬리와 맞부딪힌 현태중은 자신의 몸이 몇 갈래로 찢어지는 것을 느꼈다.
고통은 생각보다 덜했다.
남는 것은 아쉬움.
설천위를 위해 더 싸우지 못한다는 아쉬움만이 남아 흩어지려던 그 순간.
꽈악!
돌아온다.
육체가, 검을 쥔 손이.
순식간에 돌아온 감각에 현태중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앞으로 나아간다.
그 검에 깃든 것은 현태중의 강기가 아닌, 설천위가 품은 패도의 불꽃.
지배하고, 짓밟는 패도(覇道)의 힘.
오존이 자신의 진원지기를 태우고서도 작은 생채기를 내는 것조차 버거웠던 털과 가죽이 갈라진다.
털은 불에 타고, 칠흑의 패기에 침범당한 가죽은 검의 압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갈라졌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이게 가능한 일인가?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 자신도 모르게 뒤를 향해 고개를 돌린 현태중은 기겁했다.
설천위가 만들어낸 흑관에 뒤덮인 연옥의 문 앞.
아예 큼지막한 의자까지 만들어 그 앞에 자리를 잡은 설천위의 두 눈이 싸늘하게 전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감정, 무자비.
후퇴도, 패배도 용납하지 않을 거라는 그 눈에 담긴 명령은 오직 하나였다.
전진.
적이 이 자신의 앞으로 오는 것을 막으라는 것이 아니라.
적의 모든 것을 짓밟아라.
오만하기까지 한 그 눈빛에 현태중은 말없이 몸을 돌렸다.
반항?
애초에 할 생각도 없었고 할 이유도 없다.
만약 이 육체가 설천위의 힘으로 불사에 도달했다면.
달기가 부리던, 언여휘가 다루던 그 괴이의 존재들과 같아졌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
[허허허, 이것 참…… 죽음을 담는 도객이 죽지 못하는 꼴이 되다니.]
허허롭게 웃는 소백진과 함께 현태중은 앞으로 나아갔다.
[이 잡것들이……!]
자신의 꼬리에 몇 개나 되는 생채기를 만들어낸 벌레들의 발악에 여인의 입가에 분노가 가득 서렸다.
본디 감정의 표현이 드물었던 언여휘와는 명백히 다른, 격한 감정의 변화.
허나 본인은 그것이 다르다 인식하지 못한 채 지금의 분노를 토해낼 고민에 빠져있었다.
어떻게 해야 이 화를 풀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설천위를 막을 수 있지?’
순간적으로 돌아온 이성이 분노보다 지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설천위를 막는 거다.
연옥의 문을 흡수할 수 있냐 없냐 묻는다면 무조건 후자를 고를 테지만, 설천위가 저리 자신만만한 태도라면 얘기가 달랐다.
직감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막아야 한다.
놈이 연옥의 문을 먹어 치우는 순간 지금이 자신에게 승산은 없으니.
‘……지금의 나?’
생각이 거기까지 닿은 순간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의 나라면 승산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의 내가 아니면 되지 않는가?
지금 굳이 싸울 필요가 없지 않은가?
쓱 주위를 훑어본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을 가로막고 이 영역을 구성하고 있는 건 설천위의 흑관이다.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강도로 짜여진 흑관이지만…….
‘찢을 수 있다.’
지금의 자신이라면 찢을 수 있다.
그렇게 판단한 여인은 거침없이 후퇴를 선택했다.
분노했다가, 냉철하게 움직였다가.
제 성격이 지금 들불처럼 오락가락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며, 여인은 벽을 향해 접근했다.
설천위의 군세에는 그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는 강자가 없기에 단숨에 병력들을 찢어발기며 돌진한 여인은 영역의 끝에 닿았다.
눈앞에 있는 벽만 찢어발기면, 나갈 수 있다.
설천위가 연옥의 문을 흡수하든 말든 상관없다.
달기와 구복.
그 둘을 온전히 흡수한 자신이 시간을 통해 완전해지는 순간 승리는 자신의 것이 될 테니.
미래를 위해 거침없이 지금의 후퇴를 받아들이고 행동하는 여인의 꼬리가 치솟았다.
달기의 그것과 달리 일곱밖에 되지 않는 꼬리였지만 그 위력은 달기의 것을 아득히 뛰어넘는 파괴의 화신 그 자체.
단숨에, 영역의 벽을 찢고 가른다.
[……이게 무슨?]
그렇기에, 여인은 당황했다.
분명 확실하게 찢고 갈랐음에도.
[어찌?]
영역의 벽은 멀쩡했으니까.
“나가지 못해. 네 모든 것이 짓밟히는 그 순간까지.”
저 멀리서, 거대한 옥좌에 앉아있는 설천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그 어깨 위로 내려앉은 망토가 펄럭였다.
그것이 그가 스스로의 힘을 일부러 방출하기 위해 만들어낸 갑주임을 깨달은 언여휘는 경악했다.
[정녕, 연옥의 힘을 전부 흡수하고 있는 것이냐?]
이건, 이건 말이 안 됐다.
연옥의 문을 흡수하려 든다?
그렇다 치자.
그런데 그 와중에 연옥의 문에서 새어 나오는 지독한 영력까지 흡수해 다루고 있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건…….
불가능하다.
그리 소리치려는 순간.
설천위와 눈이 마주친 언여휘는 깨달았다.
지금 저건, 무리하고 있는 거다.
자신을 붙잡아두기 위해서.
연옥의 문을 흡수해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
정말 모든 것을 걸고.
[추하구나……!]
발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발악해야 하는 존재가 설천위 혼자가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