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8화
617화-연옥 (4)
[흐응, 천위와 놀기 전에 너희와 어울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자신의 앞에 선 오존들을 보며 여인은 웃음 지었다.
[마침 조금 시간이 필요한 시점이니까.]
달기와 구복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나는 온전히 ‘나’를 유지했는가?
그 의문은 조그맣게 여인의 머릿속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구복은 축생의 힘에 휘둘려 넝마가 되어있었고, 달기는 설천위에게 꺾여 존엄을 잃어버린 상태였기에 큰 어려움 없이 먹어 치울 수 있었지만…….
과연 그렇다고 해서 완전하다고 할 수 있는가?
작은 의문은 끊임없이 파문을 만들었지만, 여인은 웃음 지었다.
이 파문은 반드시 끝나고, 끝나는 그 순간 자신은 완전해진다.
그런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단, 가볍게 움직여볼까?]
머릿속이 복잡할 때는 몸을 움직이는 법이라고 했던가.
몸이 약할 때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지금 이 몸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마치, 모든 것이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편안함만으로 가득한 이 육체라면.
[이런 것도 가능하지.]
장난스럽게 웃으며 여인이 스스로의 뺨을 어루만지는 순간.
밑에서부터 치솟는 무언가에 북존이 움직였다.
얼음을 휘감은 검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치솟던 무언가가 부딪힌다.
찢어질 듯한 굉음이 터져 나오고 사방으로 냉기가 폭발한다.
그 일대의 모든 것을 얼려버리듯 퍼져나간 냉기에, 사존은 되려 얼굴을 굳혔다.
아무리 진원지기마저 태워 힘을 쥐어짜고 있다고 한들, 힘의 통제는 자신들의 본업이다.
그런데, 이런 의미 없는 힘의 폭발이 일어났다는 소리는…….
“쿨럭.”
자욱한 냉기의 연기가 사라지고, 모습을 드러낸 북존의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뼈가 부러진 듯 덜렁거리는 팔과 파편이 되어 발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빙검.
완벽하게 파훼 된 자신의 일격에 놀란 북존 앞에 보이는 건 하나의 털 뭉치였다.
회색의 털로 이루어진, 무언가.
짐승의 꼬리처럼 보이는 그것을 살피는 북존의 눈에는 의심이 깃들어있었다.
단박에 자신의 검을 깨부순 그 일격은 눈앞의 털 뭉치처럼 뭉실뭉실하지 않았다.
오히려, 날카롭고 딱딱했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자신의 앞에 놓인 털 뭉치를 노려보던 북존은 본능에 맡겨 몸을 비틀었다.
일순간의 직감으로 몸을 비틀었으나, 그 순간 머릿속을 차지한 생각은 늦었다는 것이었다.
죽는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찬 순간.
“흐읍!”
기합성과 함께 도착한 사존의 주먹이 털 뭉치를 쳐올렸다.
그와 동시에 완전히 적의 사거리에서 벗어난 북존이 상처 없이 몸을 빼냈다.
카가가각!
치솟은 털 뭉치 위로 떨어진 살존의 단검이 단숨에 털 뭉치를 휘감았다.
문제는 절삭 음이 아니라 금속과 금속이 충돌하는 소음만이 가득했다는 것.
“……더럽게 단단하네.”
북존의 옆에 내려선 살존은 이가 나간 단검을 바라보다 이내 다른 단검을 꺼내 둘을 교차시켜 날을 갈아냈다.
오랜만에 하는, 추억이 서린 잡기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추억에 잠겨있을 여유는 없었다.
“꼬리처럼 생긴 외형에 발톱이라…….”
뭉툭한 털 뭉치 끝에 살벌하게 솟아있는 세 개의 발톱을 보며 살존은 미간을 찡그렸다.
단검의 날이 나간 건 저 발톱에 부딪혔을 때다.
털 뭉치는 질겨서 베지 못하긴 했지만, 날이 나갈 정도는 아니었고.
[생각보다 꽤나 여유롭네? 진원지기라는 게 그렇게 여유롭게 써먹을 수 있는 힘이 아닐 텐데?]
웃음기가 섞여 있는 여인의 질문에 살존은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으니까.
격발시킨 진원지기는 순간적으로 강한 힘을 주지만 당연하게도 그 지속력은 좋지 못했다.
벽을 넘고도 수십 년을 더 쌓아 올린 세 사람의 경이적인 내공 제어력이 힘의 낭비를 최소화시키고 있어 멀쩡해 보일 뿐, 속은 이미 망가지기 시작했다.
진원지기는 육체의 근간을 이루는 힘.
억지로 꺼내쓰는 순간, 육체의 근간은 무너지고 인체의 내부에 흐르던 기의 흐름은 흐트러진다.
설령 진원지기의 힘을 낭비하지 않고 오래 휘두를 수 있다고 해도, 육체의 붕괴가 훨씬 더 빠르기에 그 끝은 오래 걸리지 않아 찾아온다.
‘멈춰야 해.’
그렇기에 살존은 지금이 멈출 때라는 것을 직감했다.
북존의 중상.
이미 늙어, 진원지기의 소실로 인한 부작용이 벌써 눈에 보이기 시작한 사존.
전세는 이미 기울었다.
자신이 여기서 진원지기를 태워 날뛴다고 한들 변하는 건 없다.
조금 전, 북존을 깨트렸던 일격.
제대로 보는 것조차 힘든 일격이었다.
맞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
지금 언여휘였던 여자는 제 입으로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무리하게 싸우지 않고 물러나는 것이…….
“후…….”
이성적으로는 맞다.
한숨을 내쉰 살존은 단검에 두른 진원지기를 더욱더 날카롭게 벼렸다.
“얼린다.”
부러진 자신의 팔을 통째로 얼려 고정시킨 북존이 앞으로 걸어갔다.
어느새, 여인의 뒤로 숨은 털 뭉치가 꿈틀거린다.
[북존, 과연 저 아이의 아비다운 정신력이네.]
가벼운 말투와 달리 다소곳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우아한 몸짓으로 여인은 팔을 앞으로 내저었다.
[그러니, 철저하게 부숴주는 게 예의겠지.]
화악!
잔잔하게 웃는 여인의 뒤로 털 뭉치가 치솟았다.
꼬리의 형태를 갖추고 펼쳐진 털 뭉치의 숫자는 일곱.
“애휴.”
사는 건 힘들겠네.
고개를 저으며 북존의 옆에 붙은 살존이 단검을 양손에 쥐었다.
“셋 정도는 얼려봐.”
“둘 정도는 처리해주지.”
살존의 반대편에 선 사존이 주름이 깊어지기 시작한 얼굴로 웃었다.
그 둘의 목소리에 희미한 미소를 지은 북존이 앞으로 나섰다.
“충분하다.”
화악!
북존의 일보에서 시작된 냉기가 단숨에 세상을 집어삼킨다.
쏜살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꼬리가 순식간에 얼음에 갇혔다.
동시에 도약한 살존과 사존이 거의 본능에 몸을 맡겨 꼬리의 공격을 피해내고 각자의 무기를 때려 박았다.
살존은 극한까지 강기를 벼린 단검을.
사존은 칠흑의 뇌전을 휘감은 주먹을.
꼬리를 덮은 털이 갈라지고, 그 속살이 드러났다.
꼬리를 덮은 털이 타오르고, 그 속살이 드러났다.
성공.
두터운 방어를 뚫었다는 것에, 만족할 법도 하건만 살존과 사존의 얼굴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애초부터, 고작 털 정도를 정리하는 것에서 그칠 생각으로 했던 공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시, 고목을 무시할 수 없는 법이네.]
고작 털에 그친 것에 자존심이 긁힌 두 사람과 달리 여인은 되려 둘을 칭찬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달기의 털과 구복의 털이 뒤섞인 부드러움과 강함을 동시에 가진 가죽에 이렇게까지 상처를 내다니. 대단해.]
신화시대를 살았던 두 존재의 가죽을 헤집을 수 있다는 소리니, 눈앞의 이 셋은 신화시대에 태어났더라도,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을 영웅이 됐으리라.
하지만.
[안타깝네.]
그럼에도, 거기까지다.
달기라면.
구복이라면.
각 개체라면 저 둘의 공격만으로도 능히 가르고 그 살과 피를 볼 수 있었겠지만, 그 둘이 온전히 합쳐진 지금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쩌적!
북존이 얼렸던 꼬리 위로 균열이 생겨났다.
그 안에서 요동치는 거력에 이를 악문 북존이 더욱더 냉기를 쏟아부었으나.
[조잡한 발악이야.]
쩡!
결국, 강렬한 균열음과 함께 깨져나간 얼음에서 탈출한 꼬리들이 날뛰었다.
콰가각!
단숨에 후려치는 공격에 오존들의 몸이 날아갔다.
뼈가 부러지고, 살점이 터졌다.
까득.
이를 악물고 일어선 살존은 한쪽 눈이 보이지 않음을 인지했다.
북존은 부러졌다가 억지로 얼렸던 팔이 사라져 있었고, 사존은 가슴의 한쪽이 크게 주저앉아있었다.
까드드득!
이를 악문 살존은 굽어졌던 허리를 쭉 폈다.
동시에 일어서는 사존과 북존을 보며 속에서 타오르던 감정을 터트리기 위해 포효하려던 그 순간.
“여기까지.”
그들의 몸이 정지했다.
순식간에 몸 곳곳을 때리는 무언가에 힘을 잃은 세 사람이 허물어졌다.
“어머니!”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자신을 받아드는 백수아의 목소리에 살존의 입술이 삐뚤어졌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네가……!
화경에 오른 사람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까 말까 한 적 앞에, 고작 다 죽어가는 어미를 받아내겠다고 오다니.
그러다 잘못되면 그게 진정한 불효임을 모르는 것이냐.
백수아를 나무라는 말이 입에서 절로 튀어나왔으나.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응급처치는 했으니, 일단 안정부터.”
“네.”
“알았다.”
자신의 아버지와 사존을 받아든 설란은 백수아와 함께 재빨리 자리를 이탈했다.
[흐응? 이대로 놔주라고? 싫은데…….]
“싫어?”
여인의 말에 설천위는 싸늘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네가 싫다고 해서 바뀌는 게 있나?”
[으으응?]
“언여휘, 아니 이젠 언여휘인지 뭔지 모를 괴물아.”
덤덤하게 양팔을 가슴 앞에 모은 설천위는 검지와 중지를 펴고, 약지와 소지는 뒤얽힌 수인을 맺었다.
“계획이 온전히 실행된 것이 아닌 시점에, 도주했어야지.”
달기와의 싸움에선 이미 상대방의 영역이 깔려있었고, 그 영역을 먹어 치우는 형태의 싸움을 했기에 사용할 이유가 없었다.
거기에 무엇보다.
설천위는 여태까지 진짜 자성영역을 썼던 적이 없다.
자성(自省).
스스로를 성찰해, 그것을 구현화해 내는 것이 자성영역의 핵심이다.
자신의 힘, 지식, 자아 등등 모든 것을 되짚고 그 끝에 찾아온 깨달음을 구현화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술사들은 자신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을 자성영역으로 삼는다.
이 정도는 할 수 있다.
영역을 펼치면 이 정도는 능히 해낼 수 있다.
그것이 술사들이 자성영역으로 자신의 한계를 억지로 늘릴 수 있는 이유다.
그것에 밀린 악귀들 또한 비슷한 개념으로 만들어낸 것이고.
하지만.
자성영역(自省靈域)이라는 말을 진정으로 이룬 사람은 이 세상에 고금(古今)을 통틀어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다.
그리고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부처다.
깨달음을 얻어 신(神)의 영역에 도달한 것으로 만들어지는 절대공간.
애초에 인간이 자신과 주위를 완전히 되짚어 자신의 것으로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신(神)이 아니라면 완전한 이해도, 지배도 없다.
그렇기에 설천위는 여태까지 다른 술사들이 쓰는 것처럼 자성영역을 펼쳐왔다.
이 정도 영역을 뿌리면, 이 안에서 나는 이 정도는 할 수 있다.
거기에는 자성(自省)이라고 할 법한 깊은 고찰 따윈 들어있지 않았다.
설천위의 재능은 말 그대로 웬만한 것은 전부 가능하게 만들었으니까.
그렇기에 설천위의 직감은 그것이 통하지 않는 적들이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달기가 그러했고, 구복이 그러했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로는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진짜 자성(自省)을 통해 만들어낸 영역(靈域)이 필요했다.
자신이 얻은 힘은 무엇인가.
현경에 오른 무(武)?
애초부터 거의 모든 것이 가능했던 술(術)?
천마의 수련을 통해 배운 중력?
항상 품고 있던 패융?
자신의 의지에 따라 실체화할 수 있는 군세?
정체 모를 시스템을 통해 얻은 스킬들?
나는.
아니, 나를 이루고 있는 힘은 무엇인가.
그 고찰은 달기와의 싸움 속에서도 가슴 한쪽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백유와 유예린을 구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시간을 끌려 하는 세 사람을 보면서.
저 밑에서 이를 악물고 기어 올라오는 것이 느껴지는 철백을 느끼며.
설천위는 깨달았다.
인정했다.
“나는.”
세상을 뒤덮는다.
흑관이 만들어낸 결계가 어느새 언여휘였던 여인과 설천위를 거대한 공간에 가뒀다.
이제 갓 태어나 자성영역이라고 할 것이 없었기에 별다른 반항 없이 갇힌 여인의 눈은 흥미롭다는 듯 설천위를 향하고 있었다.
그런 여인의 시선에도 설천위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모두를 지키기 위해 인간을 포기할 수 있는 괴물이다.]
패도(覇道)를 걷는 괴물이 되어, 나의 앞을 막는 모든 것을 짓밟는 괴물이 되리라.
독선이고, 오만이며, 무지이지만.
[꺄하하하하! 원화(元化)의 술(術)? 천위! 드디어 미친 거야?]
몸 전체가 패기를 띈 영력, 검붉은 연기로 변하기 시작한 설천위의 모습에 여인은 웃음을 터트렸다.
조롱으로 가득 찬 그 웃음에도 설천위는 흔들리지 않았다.
애초에.
지금의 목표는 저 여자가 아니었으니까.
패기와 영력으로 뒤엉켜 흩어지는 설천위의 눈동자는 여인의 뒤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의 스승이, 자신에게 맡긴 물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