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616화 (616/624)

제616화

615화-연옥 (2)

“거의 다 됐어요……!”

잘려 나온 구복의 파편을 또 한 번 먹어 치운 연화는 직감했다.

이제 정말 머지않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구복의 힘은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라면……!’

소 언니가 무리하지 않고도 우리끼리 끝낼 수 있어.

연화의 생각이 통했는지 주현운은 여태까지 없었던 수준으로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떻게든 조금 더 공격해 철백의 부담을 줄이는 것과 동시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수의 파편을 잘라 냈다.

팔이 부러진 소윤혜가 억지로 공격에 참가하는 것이 얼마나 좋지 않은 일인지 아니까.

무리하게 움직이면 평생 장애가 남을 거다.

그렇게 두지 않으려면 지금 자신이 해내야 한다.

연화의 도움도 있으니 충분히 가능하리라.

날카롭게 눈을 뜬 주현운은 그야말로 사방을 점하며 구복을 썰어 나갔다.

잘려 나가면 잘려 나갈수록 점점 더 민첩해지는 구복이었으나.

결국 철백에게 묶여 한자리에 뿌리가 고정된 나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가지를 격렬하게 흔든다고 해도 그 한계는 명확했다.

거기다.

“……더 빨라진 것 같은데?”

주현운의 성장은 멈추지 않았다.

철백이 끊임없이 성장하며 꾸역꾸역 구복을 붙들고 있는 것처럼, 주현운도 끊임없이 성장해 구복의 속도를 계속해서 앞서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성장 속도.

적이 강해지면 그보다 더 강해지면 된다.

그 말도 안 되는 전투 방식에 연화는 혀를 내두르면서도 자신의 일에 집중했다.

괴연천식을 지배하는 것 자체는 성공했지만, 방심해선 안 된다.

축생의 힘은 자신이 흡수했던 혈주의 힘보다 더 지독했으니까.

이 힘에 먹히면 안 된다.

스스로에게 그렇게 끊임없이 되뇌면서 연화는 구복의 파편을 먹어 치웠다.

솔직히 말해서.

‘이제 스승님과도 붙어 볼 만할지도……?’

끝없이 늘어나는 힘에 취할 것 같았다.

대부분의 힘이 괴연천식에 묶여 외부에 둔 상태이기에 자신의 육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벗어난 힘을 품을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이렇게 구복의 파편을 덥석덥석 먹어 치울 수 있었던 거고.

웬만한 것 정도는 힘으로 다 찍어 누를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착각이 아닐 수도?’

살짝 올라오는 콧대에 시야가 조금 가려지는 것 같았지만, 연화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무턱대고 하는 무식한 인간이 될 순 없지.

오만한 사람이 위에 서면 아랫사람들이 고생한다고 하잖아?

나는 그런 사람이 안 될 거니까 지금부터 참아야지.

음음.

망상에서 시작된 다짐이었으나, 그 효과는 의외로 뛰어났다.

자신을 차분하게 가라앉힌 연화는 침착하게 구복의 파편을 먹어 치웠다.

흔들림 없이.

확실하게.

흡수한 파편에서 의지를 짓밟고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완전히 지배한 짐승, 흑랑(黑狼)이라고 부르기로 한 자신의 식령과 함께 구복의 힘을 흡수해 나갔다.

그리고.

콰득!

끝내 주현운의 검이 구복의 목에 틀어박혔다.

완전히 베어 내진 못했으나, 반쯤 검이 박혔음에도 제대로 된 반항을 하지 못하는 구복의 모습은 이 전투가 드디어 끝에 다다랐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모두가 승리를 직감한 그 순간.

철컥.

떨어진 곳에서 도를 쥐고 있던 소윤혜가 움직였다.

일격.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동료들의 모습에 완전히 힘을 풀어 완벽한 탈력 상태를 만들어 냈던 육체가 즉각적인 반응으로 힘을 토해 냈다.

한껏 이완됐던 근육들이 단숨에 수축하는 것과 동시에 활이 튕기듯 전신이 일순간에 궤적을 그린다.

마치 미리 정해져 있었다는 듯 구복과 연화의 머리 위로 꽂히던 무언가 중 하나를 소윤혜의 참격이 갈랐다.

“……어?”

자신을 향해 날아오던 무언가를 소윤혜가 베어 버린 것을 반 박자 늦게 인지한 연화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키릭.]

괴성과 함께 육체가 비틀리는 구복의 몸이 빛으로 화하기 시작했다.

* * *

“선택해!”

광기에 찬 웃음을 터트리는 언여휘의 손끝에서 빛이 터져 나온다.

허공에 그려지는, 단순히 복잡하다는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술식.

그러나 그것을 막기 위해 설천위는 즉각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갈등.

까득!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목구멍까지 치달았지만, 이를 악문 설천위는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지금 언여휘가 실행한 술법은 자신이 아니라면 막지 못한다.

권능.

달기의 그것처럼 아예 자신의 육체와 그 주변을 영역으로 만든 언여휘의 힘이 권능처럼 그녀를 휘감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막을 수 없다.

권능이란 애초에 그런 힘이다.

단순히 무공이 강하다고 해서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언여휘가 펼치고 있는 술법은 달기와 구복의 혼 그리고 자신마저 제물로 삼아 연옥을 여는 것이다.

막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해 온 모든 고생이 허사가 되고 만다.

연옥이 열린 순간, 감당할 수 없는 괴이들이 쏟아져 나올 테고 그 힘의 수혜를 받은 지상의 괴이들도 날뛰기 시작할 것이다.

황궁이 무너진 지금, 제대로 된 수습이 없다면 전국의 위정자들이 일제히 군세를 일으킬 것이다.

본인을 왕이라 자칭하며, 스스로 만인지상의 위치에 올랐음을 선포할 것이다.

그 옆에서 괴이들은 유혹의 말을 속삭일 것이고, 그들에게 현혹된 지도자들은 가축처럼 취급하는 백성들의 피와 절규로 그들의 배를 채워 줄 것이다.

세상에는 죽음과 절망만이 무겁게 드리워질 것이고, 끝내 연옥과 연결된 세상은 인세가 아닌 지옥이 될 것이다.

인간의 멸망 따위는 당연히 없다.

괴이들은 자신들의 식량을 싹 먹어 치워 없앨 정도로 멍청하진 않으니까.

단지 절망과 고통 속에서 모든 인간이 지옥에서 살아가게 될 뿐이다.

까득!

그런 선택을.

나는 할 수 있는가?

언제나 확신을 가지고 움직였던 손끝이 굳었다.

제대로 익히지 못했던 가문의 무공이 폭주하기라도 한 것처럼 꽁꽁 얼어붙은 손끝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손발이 얼고, 세상도 얼어붙는다.

극한의 집중력 속에서.

설천위는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언여휘와 두 눈이 마주쳤다.

승리.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는 그 두 눈이 설천위에게 묻고 있었다.

선택해라.

네 개인의 지옥이냐?

이 세상의 지옥이냐?

지옥밖에 없는 선택지를 던지며, 언여휘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나는.

‘네가 무엇을 선택할지 알고 있다.’

설천위.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까지 참고 인내해 온 것이니라.

* * *

쿵!

동시에 무릎이 땅에 닿았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통증.

그것이 단순히 육체의 통증이 아니라 혼의 통증이란 것을 직감했다.

까득!

이를 악무는 소리와 함께 두 손이 바닥을 짚는다.

“감……히……!”

지독할 정도의 패기가 흘러넘친다.

혼이 찢어발겨지는 고통에 무릎을 꿇은 것조차 굴욕이라는 듯 그 육체를 강제로 일으켰다.

“죽……일 겁니다……!”

그 옆에서 지독한 살기를 뿜어내는 유예린이 마찬가지로 몸을 일으켰다.

“선택할 필요 따위…….”

없다.

그렇게 말할 것이다.

자신들은 버틸 수 있으니까.

너는 네가 해야 할 일을 해라.

연옥이 열리는 것을 막기 위해 흑룡단을 만들었을 때부터 아니, 무림학관에서 계(癸)라는 치욕스러운 낙인이 찍히고서도 그곳에 붙어 있었던 것이 아니던가.

어떻게든 길을 찾아내서 피를 토하고 뼈를 깎는 노력으로 이곳까지 도달했던 것이 아니던가.

나는 네 앞길을 막는 여자가 되지 않을 거다.

나는 네 등을 밀어주는 여자가 될 것이다.

나를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어 줬던 그 손이 나로 인해 묶여서 진창에 처박히는 꼴을 두고 보지 않을 거다.

세상을 죽이더라도.

나를 죽이더라도.

너를…….

회색으로 일렁이던 시야가 흔들린다.

서서히 색을 되찾는다.

그것이 자신의 어깨를 짚은 손에서 시작됐음을 깨달은 유예린의 고개가 홱 하고 돌아갔다.

“천위……!”

으르렁거리는 백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도 그녀처럼 분노를 뱉어내고 싶었으나,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혼을 찢어발기던 힘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죽음의 문턱에서 자신이 돌아왔음을 직감했다.

“후우.”

후회 혹은 슬픔.

그런 표정을 한 설천위가 호흡을 내뱉었다.

언여휘가 지금 펼치고 있는 술법이 그러했듯, 지금 설천위가 유예린과 백유에게서 풀어내고 있는 주독(呪毒) 또한 설천위가 아니면 해제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설천위가 예전에 언여휘의 혼에 새겨 넣었던 낙인과 거의 유사한 형태를 한 주독이었으니까.

혼에 직접 새겨지는 이 주독은 다른 사람에겐 푸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설천위만의 기술이었다.

그렇기에.

설천위 본인이 직접 움직여서 심혈을 기울이지 않으면 결코 해제할 수 없다.

심지어 두 사람을 동시에 치료해야 한다면.

까득!

언여휘를 방해하는 것 따윈 불가능하다.

이를 악문 설천위가 고개를 들었다.

언여휘의 술법은 이미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그그그긍!

허공에 나타난 희미한 형태의 문이 굉음을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연옥.

수십 미터는 될 법한 거대한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끝이다.’

이제 남은 방법은 얼마나 빨리, 얼마나 피해를 줄이며 연옥의 괴물들을 처리하느냐로 넘어가 버렸다.

세상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절규가 끝없이 이어질 것이고, 설천위는 하나라도 더 많은 괴이들을 잡기 위해 온 세상을 누벼야 할 것이다.

황제는 이 틈에 권력을 잡으려 하는 종자들과 맞서 싸워야 할 것이고.

무림맹은 괴이에 먹혀 날뛰는 무인들을 잡기 위해 발에 땀이 나도록 돌아다녀야 할 것이다.

사천맹도 다르지 않겠지.

허공에 나타난 연옥의 문이 점차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지옥의 존재들과, 그들과 맞서는 인왕이 새겨진 연옥의 문이 굉음을 내며 열리던 그 순간.

달기와 구복을 흡수하고 자신마저 녹여 내던 언여휘가 기어코 연옥의 힘을 빨아들이는 그 순간.

[참으로 긴 세월이었다.]

나지막한 독백이 울려 퍼졌다.

이 전장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또렷하고 혼에 스며드는 목소리.

모두의 시선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한곳을 향했다.

허공에 나타난 한 존재가 검을 늘어트린 채 서 있는 곳.

흰 머리와 흰 수염을 흩날리며, 노인은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천마아아아!]

언여휘에게 흡수되어 가던 달기의 단말마와 같은 비명과 함께 천마는 허허로운 웃음을 흘렸다.

[내가 왜 이승에 이리 오래도록 떠도는가 했더니, 바로 이때를 위해서였는가.]

나는 미련 때문이라 여겼거늘.

그 또한 아니었는가.

나는 결국 끝까지 무지한 인간이었을 뿐인가.

씁쓸한 웃음과 함께 천마는 검을 들었다.

[천위야. 천위야. 나의 제자야.]

심상 세계에서 자신에게 구배지례를 올렸던 제자를 부르며 천마는 웃음을 지었다.

[잘 보거라.]

검을 들어 하늘을 찍었다.

[이 뒤는 네게 맡길 것이니.]

하늘을 찍었던 검이 사선으로 그어진다.

부드럽게 안에서 바깥으로, 아기가 휘둘러도 편안할 것 같은 궤적으로.

검이 세상을 갈랐다.

“……!!”

“이 무슨……!”

“허어……!”

보는 눈이 있는 오존들에게서 신음과도 같은 감탄성이 터져 나왔고.

설천위와 함께 바라보던 백유와 유예린은 신음조차 흘리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천마? 천마? 천마아아아아?!”

마지막의 마지막에 예상치 못한 방해에 직면한 언여휘가 괴성을 내질렀다.

아니.

모든 걸 방해받은 것은 아니었다.

달기와 구복은 확실하게 흡수하고 있었고.

연옥의 문 또한 닫힌 게 아니었다.

그저.

그저……!

“어찌 인간이! 연옥의 문을 벤단 말이냐!!”

연옥의 문이.

거대하기 그지없는 연옥의 문이 사선으로 뚝 하고 베어졌을 뿐이다.

그 뒤로 공간 전부가 지워진 듯한 공백으로 세상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회오리바람이 일어났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마치 생명체가 중상을 입은 것처럼 연옥의 문을 통해 들어오는 힘이 크게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안 된다.

최소한 이 육체를 완성할 수 있는 달기와 구복의 것만이라도 빼내야 했다.

두 눈을 부릅뜬 언여휘가 손을 뻗어 연옥을 향해 애를 쓰는 그 순간.

[그럼, 뒤를 부탁하마. 제자 녀석아.]

세는 것조차 힘든 무수한 세월을 이승에서 버틸 정도로 강대했던 혼을 태워 일격을 날린 천마가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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